단 한치의 영토도 없던 유비를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다

난세, 한 영웅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후손이라는 그는 별다른 기반조차 없이 천하쟁패전에 뛰어들었기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신세였다.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기고 한때 적이었던 조조에게 망명….
황제의 밀명으로 조조 제거 계획에 가담했다가 탈출해 원소에게 망명….
원소의 주력군에서 이탈해 예주목으로 있다가 조조에 쫓겨 다시 유표에 망명….

서기 207년 영웅 유비는 그런 처지에서 형주 융중의 초려를 세 번째 방문한 끝에 제갈량을 만나게 된다. 당시 47살이던 유비는 그렇게 별 볼일 없는 망명 장군의 신세이면서도 놀랍게도 자신의 주변에 인재가 많다고 생각했다. 관우·장비·조운 같은 무장들과 손건·미축 같은 문신들…. 그러나 당시 27살에 지나지 않던 이 천재 전략가로부터 나오는 계책은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영웅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탁월한 발상, 정확한 미래 예측 능력
“지금 조조는 100만이나 되는 무리로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으니 그와 다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손권 역시 삼대의 통치로 안정돼 있는데다 능력 있는 이들을 등용하고 있어 연합세력이 될 뿐이지 공략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는 지리적으로도 반드시 차지해야 할 곳으로 지금 이곳을 차지한 자는 지킬 능력이 없으니 여기를 취해야 합니다. 익주는 비옥한 땅이 천리나 이어진 천연의 부고로서 역시 주인이 무능해 총명한 새 주인을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서쪽과 남쪽의 각 민족을 어루만지며 손권과 연합한 뒤 천하의 형세 변화가 있을 때 형주와 익주 양면에서 북벌을 감행한다면 통일의 패업은 달성될 것입니다.” 

천하삼분지계-이미 북방을 평정한 막강한 조조의 세력과, 장강의 지세에 의지해 강남을 공고하게 장악해가는 손권의 세력에 맞서 중원의 남서쪽에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천하를 삼분한 뒤 궁극적 천하통일을 달성하자는 계책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동양 5천년 역사에서 사실상 최고의 참모로 꼽히곤 하는 제갈량의 천하 데뷔를 알리는 이 천하삼분지계는 다음 3가지 점에서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 제갈량. 참모 하나의 능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사진 제공=한겨레21>

1. 그 발상 자체가 탁월했다.
2. 실제로 역사는 이 발상에서 예견한 대로 흘러가는 등 정확한 미래 예측 능력을 함축하고 있다.
3. 무엇보다 이 발상 자체를 근본부터 불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삼고초려 직후 잇따라 터져나왔는데도, 이 모든 난관을 헤치고 제갈량은 발상의 원래 그림을 관철해 나갔다.

이 발상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벤처’적이다. 형주와 익주의 경제력과 전략적 가능성을 정확한 미래 예측 능력과 결합해 리노베이션하는 모델….

형주부터 보자. 7군 117개 현으로 이뤄진 형주는 전한 시대에 비해 후한 시대에 엄청난 인구 증가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력과 무력의 절대 기초를 이루는 인구가 전한 때 360만명에서 후한 말기 630만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후한 말기 이후 군웅할거에 따른 전투 등으로 중국 전역에서 인구가 격심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형주 지역은 상대적으로 전투의 피해를 적게 입은데다 오히려 전란을 피해 들어온 이주민이 적지 않아 ‘형주 인구 600만명설’은 충분히 가능하다.

익주는 형주보다 더욱 전란의 피해가 적었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농업 발전이 이뤄졌기에 인구가 650만~700만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그러니까 형주·익주를 합쳐 1400만 선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정도면 형주 점령 직전 조조 세력의 관할 인구 2900만명의 절반에 육박한다. 여기에 손권 세력과 연합해서 동쪽과 서쪽에서 양면작전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한다면 한번 해볼 만한 쟁패전이 된다.

게다가 형주에서 한수를 넘어 신야-완을 거쳐 진격하면 중원의 심장이 바로 지척에 놓인다는 전략적 이점도 빼놓을 수 없다. 나아가 한나라 때부터 대규모 군수품 저장기지를 설치해온 형주와 익주에 당시 엄청난 군수물자가 비축돼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위대성은 그 전략을 공식적으로 발안했다는 것 자체를 뛰어넘는다. 오히려 숱한 난관을 돌파하면서 이 계책을 현실로 만들어나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유비가 형주의 전격 점령을 채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형주의 새 후계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삼분지계는 그 뒤 숱한 난관과 좌절을 극복해나가야 했다.

그 결과 제갈량이라는 걸출한 참모를 만났을 때 단 한치의 영토도 가지고 있지 못하던 유비는 삼분천하의 한 축을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참모 하나의 능력으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다. 
 

   
▲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죽음을 맞는 유비. 이 자리에서 유비는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이 모자라다면 대신 황제에 오르라는 유언을 남긴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유비의 놀라운 유언
게다가 참모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를 시작으로 맺어진 군신 관계를 죽을 때까지 멸사봉공의 자세로 지켜나간다. 유비는 죽어가며 공개적으로 이런 유언을 남긴다.

“그대의 재능은 참칭자인 조비의 열배나 되오.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켜 대사를 반석 위에 놓아줄 것이 틀림없소. 만약 내 아들 유선에게 보좌할 만한 그런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오.”

이건 놀라운 유언이다. 그보다 700여년 전 춘추시대에 오나라 왕 합려에 이어 등극한 부차가 선왕과 자신의 등극을 위해 공헌한 오자서에게 나라를 쪼개주려고 한 적은 있지만, 왕이 진심으로 속마음으로부터 신하에게 아들 대신 즉위하라고 유언을 남긴 전례는 없다.

거기에 대해 정사 <삼국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제갈량, 울면서 ‘신은 고굉의 힘을 다하여 충절을 지켜나갈 것이며, 신이 뒤를 잇는 일 같은 것은 죽는 한이 있어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최고의 참모가 최고의 충신과 결합하고, 그리고 그들이 약소국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쓰러지는 비극적 서사구조 앞에 숱한 동양권 민중들은 1800여년 동안 하염없는 슬픔과 함께 끝없는 사랑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답한다.

왜 제갈량은 유비를 주군으로 선택한 것일까? 당시 최대 세력 조조 역시 엄청난 열정으로 인재를 모으고 환대했으며, 손권 역시 인재 등용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제갈량 정도의 인재가 출사할 경우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연구자들은 조조를 선택하지 않은 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서주 태생인 제갈량이 소년 시절 조조군의 만행을 경험했으리라고 공통적으로 꼽는다. 조조의 아버지가 서주에서 서주군의 호위를 받고 이동하다가 갑자기 도적으로 돌변한 서주군에 의해 살해된 데 대한 보복전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 때 조조는 대단히 비이성적으로 잔인한 살육과 파괴를 지시해 ‘수만명이 학살되고 그야말로 개 한 마리 살아남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아가 어느 정도의 부정을 용인하더라도 자유경제의 경쟁원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식의 조조(둔전제 실시 등)에 대해 제갈량 같은 정부개입주의자, 도덕적 명분론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손권의 경우도 인재는 두루 찾았지만, 이미 둔전의 일종인 부곡제의 세습화로 신참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로 고착화해가고 있었다. 나아가 이미 천하삼분지계의 대구상을 가지고 있던 벤처형 참모 공명에게는 역시 조조나 손권과 같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벤처형 주군이 가장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 제갈량. 참모 하나의 능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왜 제갈량의 능력에도 촉나라의 천하통일은 실패한 것일까?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국력의 격차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형주를 오나라에 빼앗긴 뒤 국력의 격차는 끔찍할 정도다. 위나라가 통칭 3천만을 넘는 인구를 장악한 반면, 촉나라는 그 5분의 1 선인 600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천하삼분지계에서 기본 전제로 확인된 오나라와의 동맹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수차례 깨지면서 약소 2개국의 국력이 서로 약화돼 갔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오촉동맹을 파괴하는 근본 동인은 형주를 둘러싼 오나라-촉나라 갈등에서 비롯됐지만, 그 구체적인 계기는 촉나라 황제 유비의 의형제 관우가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형주의 통치와 방어를 맡고 있던 그가 제갈량의 방략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위나라 정벌에 나서고 그 반대급부로 오나라로부터 배후 공격을 받아 형주를 빼앗긴 것이다. 관우 자신도 포로로 잡혀 죽는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비가 전군을 동원하다시피 해서 삼분지계의 가동을 위해 계속 동맹국으로 남겨두어야 할 오나라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전쟁으로 두 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돼(유비와 장비가 이 소용돌이 속에서 잇따라 죽었다) 위나라와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된다.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죽었다?
제갈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근본적으로 인구와 국력의 격차가 심화되는 구조에 맞서 운명을 건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게다가 형주 없이 익주 하나로 통일전쟁의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남만의 오랑캐로 구성한 ‘비군’이나 서량의 기마병도 북벌에 동원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북벌에 나서면서도 항상 보급 문제로 골머리를 썩어 중원 아닌 훨씬 서쪽 농서지방의 농산물을 겨냥한 작전을 지속적으로 벌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출사표로 표현되는 5차례의 북벌은 영웅의 죽음으로 마감되는 ‘중국판 그리스 비극’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위나라에는 제갈량을 이길 수는 없어도 제갈량을 막을 수는 있는 사마의가 버티고 있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인 촉나라를 강화하기 위해, 이 촉나라가 옛 한나라의 수도 낙양을 수복하고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제갈량은 신상필벌의 엄격한 법치를 끝까지 관철했다. 인재가 부족한 촉나라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군령을 어긴 인재 마속을 벤 일(읍참마속·泣斬馬謖)은 이런 고뇌의 표현이다.

   
▲ 제갈량은 약소국 촉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발명에도 힘을 썼다. 촉에서 중원으로 나가는 좁고 험한 잔도에서 이용하기 위해 발명한 외바퀴 수송기구인 목우의 모습 <사진 제공=한겨레21>


그가 국력 양성을 위해 얼마나 앞장서 근검절약을 했는지는 병이 깊어지면서 후주 유선에게 남긴 이런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지금 저에게는 성도에 뽕나무 팔백 그루가 있고 척박한 땅이나마 열다섯경이 있으니 자식의 의식을 해결하기에는 넉넉합니다. …제가 죽는 날 안팎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재물을 지니지 않게 함으로써 폐하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오늘날 의학적으로 분석하면 제갈량의 죽음은 과로와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질병 때문이라는 견해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훗날 당나라의 시성 두보는 죽을 때까지 처절하게 살아야 했던 제갈량을 기려 이런 시를 남겼다.

삼고초려 이래 숱한 천하의 계책 내고
三顧頻繁天下計
양조 열어 빚 갚는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兩朝開濟老臣心
출사해 이기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스러지니
出師未捷身先死
영원히 영웅의 눈물 옷깃 적시게 하누나
長使英雄淚滿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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