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은 통제의 대상이 아닌 존재자체로 보자

   
 
페이스북을 처음 하면서 멋진 선생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춘천 강원사대부고 김현진 선생님입니다. 글에는 항상 제자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고, 학교에 있는 커다란 벚꽃나무 아래서 매달 한 번씩 담임을 맡고 있는 반 학생들과 사진을 찍어 페북에 올려주는 모습에서 훌륭한 교육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강원사대부고만이 아니라 본지의 독자들에게도 전달해 주고 싶습니다. 김현진 선생님이 전해주는 학생 인권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 강원사대부고 김현진 교사

인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의 국어 관련 정책의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인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자연법 상의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즉, ‘학생’도 당연히 권리의 주체라는 것을 뜻하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학생’을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존재로 보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합니다. 심지어, 학생을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해 놓고는 그것을 ‘너희들에 대한 어른들의 사랑’이라고 포장합니다. 

결국, 그렇게 학교에서 교육받은 개인들은 성인이 되어도 자신에 대해 스스로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어른 아이’가 되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는 것은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교 교육의 중요한 기능 중 한 가지는 ‘민주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중요한 기능이 민주시민을 키워내는 것이라고 볼 때, 학교는 당연히 인권친화적인 곳이어야 합니다. 또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학교에서 왜 ‘인권’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사진 1 <사진 출처=Bahareh bisheh 플리커>

사진 1을 보신 적 있나요? 인도에 있는 어느 고아원에서 엄마 품이 그리워 바닥에 엄마 모습을 그려 놓고 누워 있는 아이의 사진이라고 합니다(물론 사진은 작가가 보고자 하는 것을 찍는 것이기에 저 사진이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 아이의 자세가 어디에서 취하는 자세인지 아시죠? 인권감수성은 저 사진을 봤을 때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는 그 느낌입니다.

즉, 어떤 존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본능적으로 보장받아야하는 존엄성’이죠. 인간이면 누구나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인권이기 때문에 극악무도한 사형수의 인권도 존중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형수의 존재를 보자는 것이죠. 그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는 별도로 얘기하고 사형수라는 존재가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 ‘인권’입니다. 이 얘기에 동의하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인권감수성을 갖고 계신 겁니다.

   
▲ 사진 2 <사진 출처=Animal Arirang 페이스북>

사진 2를 함께 보실까요? 이 사진에서 어떤 상황이 먼저 눈에들어오세요? 많은 분들이 저 노동자가 먼저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요, 저는 계단을 무심히 내려가는 시민들이 먼저 보였어요. 물론, 저 사진에 찍힌 장면이 찍는 사람의 의도가 들어간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건 이 사진에서 무심하게 지나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참 씁쓸해 보입니다.

저렇게 위험천만하게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것이 말입니다. 저 노동자는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죠? 밥벌이라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에 의해, 본래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 저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렇게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해 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진 속의 노동자가 안전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게 장치와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인권의 존중이 생명에 닥친 위험과 동시에 노동자의 생계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 사진 3 <사진 출처=Cartoonist Dijwar ibrahim 페이스북>

이번엔 좀 멀리 가볼까요? 사진 3은 그야말로 지구인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고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했으며, ‘인간의 존엄성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제 두 돌 지나 세 살 된 아기 아일란 쿠르디가 왜 저렇게 죽어가야 하는가? 다른 문제를 다 배제하더라도 도대체, 저 아기가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누가 왜 무슨 자격으로 빼앗았을까? 이게 그다지 먼 얘기만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학생이 본래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인권’은 언제부터, 왜 존중받지 못하게 되었는가? 라는 고민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단지, ‘대학입시’라는 한 가지 틀 때문에 학생의 인권이 보장받지 못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학교 급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생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니라 ‘지도와 통제’의 대상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미 오래 전부터 학교는 학생을 통제의 대상으로 규정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대식 학교는 식민지배와 함께 출발하면서 황국의 신민을 키우기 위한 역할에 충실했고, 식민지의 유산으로서 학교의 틀은 그대로 유지해 왔습니다.

앞부분에서 ‘인권’은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권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타인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순간, 모든 관계에서 인권 친화적 관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학교가 인권친화적인 공간이 되기 어려운 이유를 이해하셨나요?

우리나라 학교의 출발 자체가 이미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학교와 교사가 학생을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학교를 인권친화적인 곳으로 바꾸기 위한 시작입니다. 여기까지의 얘기에서도 '인권이 학교와 무슨 관계냐?'는 물음표가 여전히 남아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중등, 특히 고등학교에는 알바를 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성화고 아이들은 ‘알바’가 알바가 아니라 생업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모 피자 업체가 주문 후 30분 안에 배달이 안 되면 환불을 해준다고 광고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토바이를 타고 30분 이내에 피자를 배달하던 청소년 노동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고 이후 청년 유니온이란 단체에서 강력히 요구해서 30분 이내 배달 서비스는 없어졌습니다. 참 씁쓸하죠? 피자 한판을 따뜻하게 먹는 것이,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배달하는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이것도 결국 배달 노동자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 즉 배달 노동자의 생명을 경시하는, 어느 누군가의 목숨보다 30분 빨리 피자를 배달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반인권적인 문화’가 우리사회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학교에서 인권을 이야기 하려면 가장 시급한 것이 학교 문화 혁신입니다.

학교 문화 자체를 인권 친화적으로 특히, ‘직장’으로서의 학교 문화를 인권 친화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도 인권 친화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몸으로 압니다. 교무실 분위기가 어떤지, 어느 선생님이 어느 선생님과 친하고 안 친한지.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학생들에게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이죠. 처음부터 학생 그리고 교사에게 인권을 교과 지식처럼 가르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글쎄요. 문화는 예전 것인데 지식은 새로운 것이라면 그 지식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권은 지식이 아니라, 삶과 그 사회에 녹아든 문화거든요. 문화는 가르친다고 표현 하기보다 ‘전수’한다고 표현합니다. 전수는 단순히 교수-학습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그래서 학교 문화를 인권 친화적으로 바꾸자는 얘기가 나온 게 한참 뒤늦은 감이 있는데도 우리에게는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죠.

교육과정처럼 해설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교 문화를 바꿔야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학생인권은 결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사회적 이슈가 됐던 ‘청소년 두발자율화’는 학생들의 머리 길이를 더 길게 허락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규제하던 머리 길이와 색을 결정할 권리를 그 주체인 학생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가 학생 인권을 보장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권은 인권의 주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결정할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니까요.

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학생 인권을 보장해 주면 학교에 동성애자 청소년이 늘어날 거라고요. ‘동성애’ 자체는 개인적으로 제게도 어려운 대상입니다. 하지만 ‘동성애’는 인정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정체성에 관한 것인데 어떻게 찬성과 반대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누군가가 "당신은 왜 여성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요? 결국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타인이 왈가왈부할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동성애자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하거나 차별받는 것이 반인권적인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이 반인권적인 것임을 알면 됩니다.

인간은 그 어떤 조건에 의해서라도 차별 받으면 안 되는 하나의 우주입니다. 인권은 인간 그 자체를 보자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 '人間'입니다. 우리가 서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람입니다. 그가 가진 그 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우선 그 존재를 먼저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권감수성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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