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성의 우등생보다 스마텔리트

   
 

호기심이 한창일 4살배기 아이. 엄마 아빠와 같이 있을 때면 온종일 귀찮게 쫓아다니며 대답하기도 난감한 외마디 질문을 쏟아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그 질문은 바로 "왜(Why)?"입니다.

묻는 사람 입장에서는 간단한 질문이지만, 답변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를 궁리해서 조근조근 설명해 내야 합니다. 아마 육아를 경험한 분들이라면, 이 '왜? 신드롬'의 공포를 잘 아실 듯한데요. 문제는 아이의 이 '왜?'란 질문에 답변하는 것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어려운 수학문제나 인류가 검증해내지 못한 미지의 분야를 묻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우리 민정이! 아빠는 너를 사랑한단다." 하면 아이는, "왜~?"라고 되묻고, 그러면 아빠는, "그거야 아빠 딸이니깐 그렇지" 하면, "왜 딸을 사랑해야 돼?" 뭐 이런 식이죠. 뻔한 질문이라 귀찮기도 하고, 막상 설명하려니 뜻밖에도 그 이유를 자세히 생각해보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또 이 외마디 질문은, 내가 그저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에 대해 재조명하는 계기로써 인생의 일대 전환기가 되기도 하는데요. 며칠 전 TV에서 대학입학 수시전형 합격조회를 앞둔 고3 학생들의 인터뷰 장면을 보았습니다.

지원한 대학 홈페이지에 수험번호를 입력하면 합격여부가 나타나는데, 대입시험을 수년간 가슴 졸리며 준비했던 것에 비해 합격자발표는 야속하리만치 간단한 절차라는 생각마저 드는 순간, 조회결과는 불합격. 이 학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손으로 머리를 싸매더니, "이제 난 쓰레기네! 친구, 가족들 얼굴을 어떻게 보나?"하며, 혼자 어디론가 가서 울먹입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인터뷰자가 질문을 던집니다. "많이 낙담한 것 같은데, 혹시 대학에는 왜 가려는 것이죠?" 그러자 학생은 눈물을 훔치면서, "대학에 왜 가냐구요? 글쎄… 아… 대학엔 왜 가는 거지? 어.., 이런 질문은 처음이라서… 어? 진짜 대학을 왜 가려는 거지?" 하고 머뭇거리며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정말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10년이 넘도록 대학에 가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유를 잘 모르고 있다니 말이죠. 여러분도 "대학에 왜 가야 할까요?"라는 질문이 생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맞는 답변들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 학생은 "왜(Why)?"라는 질문으로 뜻 밖에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자신을 발견했고, 또한 누군가의 생각을 그냥 당연한 듯이 따라가고 있었다는 엄청난 사실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불합격에 고통스러워한 이유가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체면이 손상됐다는 것인데요.

학생들에게 있어 대입 학습의 효용성이 탐구와 연구 측면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통과의례로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학교교육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죠.

얼핏 보면 “이렇게 풀어낸 분석들이 뭐 그리 특별한 것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대졸이냐 고졸이냐, 그리고 명문대 출신이냐 아니냐에 따라 사회적으로 얼마나 차별을 두는지 알기나 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왜(Why)'라는 질문의 답변에 따라, 같은 공부(일)를 하더라도 크게 다른 결과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표가 내 체면, 내 행복, 내 명예, 내 재산 등에만 머물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출세주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중고등학교에서 수학, 과학, 언어실력을 키우는 이유가 출세하기 위해서이고, 대학에 가려는 이유도 출세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이미 무의식 중에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세가 옳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는 둘째 치고라도 말이죠. 우리의 염려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공부하고 있다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염려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의 대학 불합격이, 출세를 이유로 하는 합격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되는 것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행복과 편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우리는 '리더(Leader)'라고 합니다. 리더의 싹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대학 불합격이란 전적으로 자신의 체면을 구기는 것이 아니고, 머리가 나쁜 아이로 낙인찍히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가 목표했던 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은 한 번 실패일 뿐이고, 조금 더뎌 지겠지만 어디에서라도 계속해나갈 것을 생각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 리더의 싹을 가진 학생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 하기를 멈추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학생들이 진정 미래를 이끌어나가야 할 재목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목표가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이라면, 이는 출세주의에 가깝습니다.

자기만 아는 출세주의자가 이끄는 사회에는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대학은 목적이 아닙니다. 수단입니다. 그 분야에 더 정통하기 위해서 최고 대학 입학증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최고 대학에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외마디 질문 '왜(Why)'의 미학입니다. 대학 밑에 자신의 인생을 두면 안 됩니다. 대학은 자신의 인생을 빛내줄 수도 있고 또 침체시킬 수도 있는 수단일 뿐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청소년 여러분들도 자신에게 한 번 질문을 던져 보세요.

"나는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 거지?"라고 말이죠. 그것이 그저 출세 주의인지 아니면 내가 그토록 하고 싶은 것을 위한 수단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송민성 님은 모티베이터, 작가강사, 교육컨설턴트, CS리더십 전문가, 서울디지털대학교 학생지원팀장으로 일을 하면서 <나침반 36.5도>와의 인연으로 진로교육에도 참여하여 학생과 학부모 강연도 열정을 다해 참여해주고 있습니다.

저서: <비하인 더 커튼(Behind the Curtain)> (연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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