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을 일으켰던 그의 세계사적 모래폭풍, 1400년을 지나 이제 한반도에 몰아닥친 것인가

대제국 비잔틴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강대국이 각각 서쪽과 북쪽을 압박하고, 풍요한 중계무역의 혜택을 누리는 '아라비아 펠릭스(행복한 아라비아)'가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아랍인들은 아직 진이라는 정령과 수백이 넘는 우상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같은 일신교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민족으로서 통일된 정체성은 더더욱 갖지 못한 상태였다. 유목과 약탈을 통해 과격한 호전성과 빠른 기동력을 갖춘 그들은 탁월한 지도자도, 효율적인 정치 체제도 없이 그저 주변국가에게 ‘골치 아픈 침략자’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다.

메카인들의 반발을 진압하다
사막도 뜨겁게 달궈지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흩어진 모래알 같던 아랍인은 한 지도자를 만나자 세상을 뒤흔드는 강력한 모래폭풍으로 탈바꿈한다. 그들은 하나의 신 알라를 신봉하며 강력한 신정일치의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일신과 무력을 결합한 새로운 집단은 곧바로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고 중동 일대와 아프리카 북부, 유럽, 인도아 대륙과 중앙아시아로 진출해나갔다.

   
▲ 마호메트 <일러스트 제공=한겨레21 장광석>

이 '신에게 복종하는 자' 무슬림과 그들의 종교 이슬람교는 그 뒤 1400년 세계 역사를 바꿔버렸다. 21세기 들어 세계 인류 13억명이 신도라고 일컫는 이슬람교의 근원에는 창시자 모하메트(아랍어로는 무함마드)가 자리잡고 있다.

"서기 570년 무렵(일설에는 571년) 마호메트는 아라비아반도의 서부 상업도시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메카를 정복한 쿠라이시족의 지도자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6살 때 고아가 돼 할아버지와 삼촌의 손에 양육됐다. 자라서 무역일을 하던 그는 고용주로 자신보다 14살 정도 더 많은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명상생활'을 집중적으로 하게 된다.

40살 때 동굴 속에서 기도와 명상을 계속하던 그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찾아온다. '코란'을 전송받는다.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가브리엘로부터 코란의 구절을 주기적으로 전해받았다고 한다.

마호메트는 처음 친척과 친구들에게 설교해 소수의 신도를 얻었다. 그러나 다신교를 믿던 대다수 쿠라이시 가문 사람들과 메카인들은 그의 메시지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메카인들의 압박과 살해 움직임이 계속됐다.

마호메트는 야스리브 사람들의 주선으로 서기 622년 메카를 탈출해 야스리브로 간다. 메카인 암살대를 피해 우여곡절 끝에 야스리브에 무사히 도착한 이 사건은 이후 '헤지라(이주 또는 망명이라는 뜻)'로 기록돼 이슬람교의 큰 전환점을 이룬다.
 

아울러 622년은 이슬람교 원년인 헤지라 원년이 된다. 이슬람교는 이 헤지라로 최초의 종교공동체(움마·ummah)를 갖추게 됐다. 나아가 마호메트는 '메디나의 헌장'을 채택해 공동체의 최종결정권을 장악했다. 강력한 신정일치 체제를 세운 것이다.

   
▲ 마호메트의 기적 모습 그림.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왼쪽 얼굴 없는 사람이 마호메트이다(이슬람 미술에서 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금기시돼왔다). <사진 제공=한겨레21>


그 뒤 마호메트는 야스리브에서 새로이 '메디나(예언자의 도시라는 뜻)'로 이름을 바꾼 이 도시의 움마에 참여하고 있던 유대인 정주자 세력을 단계적으로 추방-배제하고 이슬람교의 아랍화를 강력하게 추진한다. 다른 한편으로 다신교인 메카 세력과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등 초기 이슬람 세력을 급속도로 팽창하는 데 성공한다.

헤지라 7년인 서기 628년 메디나의 이슬람 세력에 밀려 휴전에 동의했던 메카 세력은 2년 뒤 마호메트가 휴전을 깨고 1만명의 무장세력으로 진군해오자 그대로 항복한다. 메카에 들어간 마호메트는 다신교의 중심이던 카바(신의 처소라는 뜻)에서 유일신 알라를 상징하는 흑석만을 남긴 채 다른 우상의 상징물들을 다 없애버리는 정화 의식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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