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육사의 시 ‘광야’에 나오는 구절 처럼 부지런한 계절은 두 번이나 피어선 지는 것을 반복했고, 학교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심스레 현장학습을 다녀오곤 했다.

사고가 일어난 후, 많은 부모와 교사들은 가슴을 치고 울었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학생들을 그냥 그렇게 죽어가게 한 것이 미안했고, 그런 배를 타고 즐거운 수학여행을 가게 한 것이 미안했고, 그런 참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도 했다. 또한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죽었으니 이제부터 교육을 바꿔야 한다고도 했다. 즉, 사고 이전에 ‘세월호’는 단순히 배의 이름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배 이름 그 이상의 여러 의미를 가지는 사회적 상징이 됐다.

참사 2주기를 앞두고 학교는 세월호 사고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되새길 것인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부모에 의한 아동 학대 및 살해 사건과,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연결 지어 생각해 본다.

학대되고 살해된 아동은 ‘계부’나 ‘계모’와 살았기 때문에 비극적으로 삶을 마무리한 것이 아니다. 계부와 계모의 틀에 사건을 가둬 버리면 그것은 그저 ‘인성이 덜 된 개인이 저지른 패륜’에 머무르고 사회가 져야 할 책임은 사라져 버린다.

건강한 사회라면 그러한 부모들로부터 학대받는 아동을 보호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고, 패륜적 범죄를 저지른 시민사회 구성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법적 처벌이 가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세월호 사고 이후 우리 사회가 나아갔어야 할 방향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가만히 있어서 죽었다는 말은 언급하지 말자. 그 말은 사람의 도리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수학 여행을 가던 2학년 모든 학생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현장을 떠올려 보라. 아이들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지’를 말이다. 그 아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와 사회가 자신들을 반드시 구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 아이들에게 사죄해야 할 일은 그저 ‘죽게 해서 미안하다’가 아니다. 우리가 사과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믿고 있던 구조를 위한 공적 시스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과, 그 이후 책임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시 참사 2주기를 흐드러진 벚꽃과 함께 맞닥뜨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법적 처벌을 받았어야 할 사람들은 법을 속이며 평형수를 빼냈고, 필요 이상으로 짐을 싣고 안개가 자욱한 인천항을 출발했으며, 사고가 난 후 승객인 척하고 자신들만 탈출했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무엇인가? 바로 민주시민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이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인성’이 아니라 ‘민주 시민의 도덕성’인 것이다. ‘도덕성’은 ‘착한 것’이 아니다. 법과 관습의 경계에서 개인과 사회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감각이 도덕성인데, 세월호 사고의 소위 ‘책임자’라는 사람들은 개인과 사회의 이익 앞에서 균형을 맞추지 않았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세월호 사고와 같은 참사를 또 다시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인성교육’이 아닌 ‘민주시민이 되는 교육’인 것이다.

민주시민의 가장 큰 임무는 국가와 사회가 ‘괴물’이 되는 것을 견제하는 것이다. ‘민주시민’ 의 기본 조건은 자발성이다. 자발성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욕망과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교는 학생에게 자발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발적인 학생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스스로 해 봐’라고 말하면서 학생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부담 스러워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학교와 사회에서 학생들은 혼란스럽다.

사회와 학교 그리고 학부모들은 인성교육과 교과교육을 별개로 여긴다. 대부분의 교사와 학부모는 성적도 올려주고 인성교육도 적절하게 해주는 학교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러나 옛 사람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교과지식’ 안에 이미 ‘인성 지식’이 다 들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명심보감’ 아니겠는가?

명심보감의 내용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지식과 인성을 동시에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명심보감의 내용은 상징적 의미가 큰 것이지, 학교교육의 내용으로 온전하게 들어오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인성’은 배우는 자가 주체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가르치거나 양육하는 자가 보기에 배우는 사람이 그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는 성격이 강하다. 배우는 자의 주체성을 등한시하게 된다. 이것이 ‘인성교육’이 갖고 있는 위험요소 중의 한 가지이다.

또한,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인성’의 문제로 접근할 경우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지워질 수밖에 없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개인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을 때 개인이 속한 사회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것은 ‘건강한 민주 시민들로 이루 어진 사회’에서 가능하다. ‘건강한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은 학교 교육의 의무다.

그렇다면, 이제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강원사대부고 김현진 교사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자. 교육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에 용기 있게 아니라고 말하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자.

교사는 가르치는 자이다. 동시에 배우는 자이기도 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용기 있게 ‘하지말자’고 말해 보자. 이런 용기는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교육을 제자리로 갖다 놓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혁신은 더하기 알파가 아니다. 하고 있는 것 중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고, 망가진 것을 고쳐서 다시 쓰는 것이다.

학교 교육의 중요한 목표 중 한 가지인 ‘민주 시민 육성’이라는 목표는 이러한 수업을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이하는 지금, 학교가 해야 할 일은 공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육 과정상의 목표인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더 이상의 ‘괴물’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학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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