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어 궁형 받은 경험을 통해 돈의 가치 이해

   
▲ 중국 제남시 서한묘에서 출토된 도자기 제품으로 된 명기. 한나라 때 귀족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사마천이 ‘화식열전’을 쓴 데는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자신이 돈이 없어 처참한 궁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한 무제 때 흉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돼 남성의 성기를 거세하는 궁형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앞둔 때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는 속전제를 채택하고 있어 그가 50만전으로 정해진 속전을 낼 경우 이 형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마천 일가는 한달의 기한 동안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50만전은 투옥 직전 대부로 출사하고 있던 사마천으로서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사마천 자신이 쓴 ‘화식열전’의 내용에 비춰보면, 50만전이라는 돈은 소봉의 부를 누리는 부자가 2년 반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사마천 집안은 채 20만전도 모으지 못했다. 부인이 집에 있는 솥단지까지 팔아 간신히 5만전을 구하고, 다시 친정 부모님께 사정하고 빌어서 10만전을 추가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동료 공경대부들에게도 사정을 호소했으나 ‘천자의 뜻을 거스린 죄수의 가족’이라고 문도 열어주지 않기 일쑤였고, 일부 마음씨 좋은 공경대부도 몇천전 정도 빌려주며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이런 처절한 경험이 있었기에 사마천은 돈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돈과 관련된 세상의 인심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가 ‘화식열전’에 쓴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분명히 떠난다”는 글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한편 이 ‘화식열전’을 열전의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 자서’ 바로 앞에 배치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이 글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배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태사공 자서는 열전 마지막에 들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기> 전체의 서문으로 평가되곤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화식열전’의 기조가 한나라 조정의 중농억상책을 비판한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 해 20만전 수입 정도를 기준으로 하는 소봉의 사례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대단히 풍부하게 열거한 것은 그가 이 정도 돈의 의미와 힘을 얼마나 연구하고 천착했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그 사례의 2가지 정도만 있어도 그는 자신의 남성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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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생
- <사기열전-하> 사마천/을유문화사
- <고대 중국의 재발견-시공디스커버리 총서> 시공사
- <역사의 혼, 사마천> 천퉁성/이끌리오
▶▶ 대학생 이상
- <중국의 역사> 진순신/한길사
- <한국의 부자들> 한상복/위즈덤하우스
- <진시황제-역사군상 시리즈44> 학연(일본책)
- <중국통사> 해연출판사(중국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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