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지, 코페르니쿠스보다 100년 앞서 지동설 주장한 조선의 과학자

   
▲ 칠정산내외편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대왕 시대 최고의 과학자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장영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국내 과학사학자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장영실이 비록 천재적인 기술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당대 최고 과학자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의 많은 과학 전공 교수들은 세종 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이순지와 이천을 꼽는다. 세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과학 프로젝트 중 하나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시간을 알아내는 천문학, 당시 동양 용어로 역법이었다. 그리고 당시 중국의 역법을 뛰어넘어 우리만의 역법이론을 세운 과학자가 바로 이순지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이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물리학적인 증명이 없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시도해 성공했지만 종교법정은 그를 풀어주면서도 길릴레오의 책은 출판을 금지시켰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인 1767년이다.
 

   
▲ 조선 최고의 과학자 이순지
[출처=문화재청]

그러나 조선의 이순지(李純之, 1406~1465)는1400년대에 해와 달은 물론 행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일식과 월식이 언제 일어나는지 예측할 수 있는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발간했다.

칠정산(七政算)이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는 뜻으로 해와 달, 5행성(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예보하는 것이다.

이 책은 서울에서 관측한 자료를 기초로 계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 전까지는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의 위도를 기준으로 했는데 이를 서울 기준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일본의 경우 칠정산(七政算)에 해당하는 정향력(貞享曆·일본인이 만들어 일본에 맞는 역법)은 조선의 것보다 240년 후인 1682년에 등장한다. 이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나산, 박안기(螺山, 朴安期)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명문가 자제, 중인 계급에서나 하는 과학자가 되다
지금으로부터 586년 전인 1430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세종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다가 갑자기 신하들은 바라보며 물었다. “한양의 위도가 얼마인고?” 세종 앞에 늘어선 많은 신하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세종이 다시 물었다. “한양의 위도가 얼마인고?” 신하들은 머리를 숙인 채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세종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 신하가 앞으로 나섰다.“한양의 위도는 38도 강(强)이옵니다” 이 신하가 바로 이순지다.

당시 그는 승문원에서 외교 문서 관련 업무를 맡았던 전형적인 사대부 출신 관료였다. 하지만 세종은 그에게 천문역법을 책임지라며 발탁인사를 단행했다. 명문 집안의 태생이 중인 계급에서나 하는 과학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조선의 독자적인 천문역법을 세우고자 했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중국의 역법을
빌려 썼고 고려 때는 그것을 개성 기준으로 약간 수정해서 사용했다.
 

   
▲ 앙부일구 [출처=문화재청]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천도한 후에는 그것을 약간 더 수정해서 사용했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을 기준으로 한 천체 운동은 계산하지 못했다.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지를 중심으로 조선의 천문역법을 정비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역법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순지는 세종에게 진언했다.

“못 만드옵니다.”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
“달력을 만드는 서운관(書雲觀, 오늘날 국립기상천문대)에 인재들이 오지 않사옵니다.”
“왜 오지 아니하느냐?” 
“여기는 승급이 느리옵니다.”

당시 과학자는 중인 계급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사대부에서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세종은 즉시 명령했다.

“서운관의 승급 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아니 오옵니다. 서운관의 봉록이 적사옵니다.”
“봉록을 올리거라.”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오옵니다.”
“왜 그러느냐?”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하옵니다.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당시 정인지는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든 집현전 학자이자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 영의정이었다.
이에 세종은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다. 그리고 1444년 드디어 조선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분석해 중국과 아랍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자국에 맞는 독자적인 달력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지가 계산한 지구 공전 시간, 현대 계산과 불과 1초 차이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며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세종은 몹시 기뻐하며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처럼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핵심기술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다.
 

   
▲ 혼천의 [출처=문화재청]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1400년대에 불과 1초 차이로 정확하게 계산해 냈던 것이다. 이는 세종시절 과학기술 수준이 세계 최정상급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순지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학자로, 이천(李薦 1376~1451. 무신이자 과학자)을 감독관으로 장영실(蔣英實)은 기술자로 임명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1432년부터 천문기기(天文機器)제작 사업을 시작해 6년 만에 완성한다.

이 기간에 혼천의(渾天儀), 간의(簡儀), 자격루(自擊漏)를 비롯해 앙부일구(仰釜日舅)의 제작이 완료되어 전국으로 배포됐다. 이를 기반으로 계절의 변화와 하루의 시각을 알 수 있는 흠경각루(欽敬閣漏)가 세종의 숙소인 강녕전(康寧殿) 옆 흠경각에 세워졌다.

1436년 이순지는 모친상을 당하여 자신의 후임으로 김담(金淡, 1416~1464)을 추천하고, 시묘살이를 위하여 관직을 물러난다. 김담 역시 훌륭한 천문학자였지만 세종은 이순지를 종5품에서 정4품으로 무려 3단계나 승급시키고 그의 아버지에게까지 명을 내려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출사할 것을 명한다.

당시 이순지는 어머니의 시묘를 하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두 차례나 눈물로써 상소를 올리며 벼슬을 사양했지만, 세종은 이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순지는 1445년(세종 27년)에 <제가역상집>이라는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주로 천문, 역법, 의상, 구루의 4부에 걸쳐 당시의 지식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 창경궁 자격루 [출처=문화재청]

의상이란 천문 기구를 말하고, 구루란 해시계와 물시계를 말한다. 세종 때 수많은 천문기구와 해시계, 물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런 연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자연 과학의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이순지는 수학에도 전문가였다. 그래서 토지 측량 사업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세조 11년(1465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정평군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순지는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고액권 화폐의 인물을 선정할 때 장영실이 10인의 인물후보군에 포함됐다. 특히 그가 만든 자격루의 유물 그림은 구 1만원권 화폐의 뒷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장영실은 조선시대 과학기술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이순지는 그 업적에 비해 평가 절하돼 안타깝게 한다.
 

삼국시대부터 가르친 플러스(+), 마이너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은 1490년대에 세워진 에스파탸로, 스페인 국립대학이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졌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워 문과와 명산과로 나누어서 교육했다. 서양보다 무려 800년도 전에 이 땅에 국립대학이 세워진 것이다.

문과는 관리를 길러내기 위해 논어, 맹자 등을 가르치고, 명산과는 밝은 明자, 계산할 算자로 계산을 밝히는 과이다. 지금 말로 하면 수학과라고 할 수 있다. 명산과에서는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해 산관(算官)으로 배출했다. 산관들은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면서 세금 매길 때나 성을 쌓을 때, 농지를 다시 개량하는 일을 주관했다. 이러한 산관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특히 명산과에서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구장산술에는 방정이 나온다. 서양에서 들어온 것으로만 알고 풀었던 방정식이 이미 삼국시대 국립대학의 교육 과정 중 하나였던 것이다.
 

   
▲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입학처 http://goo.gl/FZ1vL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책에 밀률(密率)이라는 것이 있다. 비밀할 때 密, 비율할 때 率. 영원히 비밀스러운 비율이라는 뜻이다.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바로 원주율, π를 의미한다.

고려시대 수학에서는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고 되어 있다. 특히 이순지의 칠정산외편을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고 되어 있다. 현재 컴퓨터로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이다. 무한소수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비밀스러운 비율이라는 의미이다.

이뿐 아니다. 현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플러스, 마이너스는 이미 삼국시대에도 존재했다.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으며, 마이너스를 부채를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현재 교육이 우리 고유의 수학은 잊은 채 플러스(+)와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 수학 이론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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