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마이어 암셀로부터 8대째 내려오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어떻게 부와 명성을 쌓았나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0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보상이다.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 같으니,
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에게는 복이 있다.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구약성서 시편 127편)
 

   
▲ 로스차일드 가문 창업자의 다섯 아들.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장남 암셀, 차남 살로몬, 3남 네이선, 4남 칼, 5남 제임스. [사진 제공=한겨레21]


‘워털루전투 사건’으로 유명해지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마이어 암셀(1744~1812년)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유대인 집단거주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교 랍비양성학교에 다니다가 11살 때 부모가 천연두로 죽자 학교를 그만두고 소년가장으로 경제생활에 들어갔다. 유대인 사설금융업자의 도제로서 경험을 쌓은 그는 통일 이전 독일의 제후 귀족 부호들을 상대로 옛날 화폐와 골동품 등을 팔아 돈을 번다.

이와 함께 의도적으로 독일의 권세가들에게 접근해 결국 헤센카젤공국의 지배자인 하나우공 빌헬름의 신임을 얻어 궁정 어용상인이 된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붉은색(rot)과 방패(schild)의 합성어로, 마이어 암셀의 집에 붙은 붉은 방패에서 비롯됐다.

그 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유럽의 군주국가들과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가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하자 마이어 암셀은 빌헬름의 빼돌린 재산을 대신 관리하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이때 이미 영국에 진출해 있던 야심적이고 모험적인 셋째 아들 네이선(1777~1836년)은 이 비밀자금을 정식으로 투자하기 전에 여러 나라의 국채를 사고 되팔아 엄청난 단기차익을 챙기고 사업적 명망까지 얻는 데 성공한다. 네이선은 이 자금으로 채권, 금, 주식, 밀무역 등에 투자한다.

그 뒤 마이어 암셀의 다른 네 아들도 각각 프랑크푸르트(첫째 아들 암셀), 빈(둘째 살로몬), 나폴리(넷째 칼), 파리(다섯째 제임스)로 진출해 혁명과 전쟁의 대변혁기에 가장 이른 시간 안에 주요 정보를 공유한 채 유럽 전역을 커버하는 선진금융 기법으로 막대한 부를 쌓는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워털루전투 사건’일 것이다. 당시 유럽 전역을 무대로 가장 빠른 정보입수-전달 체계를 구축하던 로스차일드상회는 워털루전투의 결과를 자체 능력으로 런던상회에서 24시간 정도 일찍 알 수 있었다. 이 정보력을 바탕으로 영국 정부의 국채를 몇 시간 일찍 무더기로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무려 1억3500만프랑의 이익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한편 다섯 아들은 모두 유럽의 중심국가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는다. 작위를 받으며 5발의 화살을 쥔 손이 그려진 문장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그 뒤 형제에게는 ‘5발의 화살’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나폴레옹 전쟁 뒤 로스차일드 가문은 사실상 ‘유럽의 숨은 지배자’가 된다. 전쟁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가 하면,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한 영국군의 자금 조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네이선은 영국을 겨냥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뚫고 영국 상품의 비밀교역을 주도했다.

결국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재정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네이선이 사실상 좌지우지하게 됐고, 막내 제임스도 프랑스에서 국왕 루이 필립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는 지위에 올랐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느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고대 유대인은 한 왕에게 복종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왕들이 한 유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철저히 유대적인 성공요인들

   
▲ 로스차일드 가문의 발상지인 창업자 마이어 암셀의 집. 가운데 건물의 왼쪽 부분. 1869년 촬영한 사진. [사진 제공=한겨레21]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후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 그리고 각국 정치권력과의 밀접한 유대관계 등을 활용해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해 부를 더욱 늘렸다.

프랑스의 경우 프러시아전쟁에서 패배한 뒤 1871, 1872년 두 차례에 걸쳐 배상금을 조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영국에서는 몇 시간 만에 400만파운드를 영국 정부에 조달해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영국이 전격적으로 인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엄청난 부와 이런 뛰어난 공로를 바탕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자 유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재벌가문으로 부상한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새로 건국하는 민족적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런던의 로스차일드은행은 잉글랜드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프랑스의 최고급 포도주 가운데 하나인 보르도의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등을 생산하는 포도원도 이 가문의 소유이다.

현재 표면적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10명이 약 15억달러 자산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 자산은 그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가문의 국제적 명성과 신용은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성공을 거둔 요인으로는 이런 것들을 꼽을 수 있다.

1. 단결: 가문의 형제들이 하나의 화살묶음처럼 뭉쳤다.
2. 네트워크 경영: 네트워크를 통해 전체의 효율을 최대로 높이고, 위험을 분산시켰다.
3. 신용경영: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해 신용을 쌓고 다음 단계에 더 큰 거래를 장악했다.
4. 정보경영: 가장 정확한 정보로 가장 빠르게 사업기회를 잡아나가는 선진 경영기법을 동원했다.
5. 정경유착: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권력자와의 인맥을 형성해 사업기회를 잡는 데 능숙했다.
6. 2세 체제 준비: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경제교육(상황에 따라선 실무교육까지)을 시켰다.

이런 요인들은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유대적인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형제들이 뭉치는 것은 유대인들의 가족경영 방식과 일치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만든 회사 이름을 보면 ‘로스차일드 부자상회’ ‘로스차일드 형제상회’로 돼 있다. 실제로 월가에서 활동하는 레만 브라더스 은행도 이름 그대로다. 유대인들은 혈육이 같이 사업을 벌여 성공하거나 먼저 성공한 사람이 다른 형제를, 사촌을 차례로 끌어들이는 식으로 사업을 발전시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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