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동·서독, 유럽까지 아우르는 리더십 발휘

   
▲ 앙겔라 메르켈 수상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9번째 미사일까지 발사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온다. 어느덧 북한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통일의 동반자라기보다 ‘웬지 머리 아프고 문제만 일으키는 존재’로만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장차 어떻게든 북한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까? 아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 출신이 통일국가의 대통령으로 취임해 남북을 통치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독일이 분단된 시절 동독의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차별 받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임에도 자기 신념을 표출할 줄 알았던 한 여성과학도, 앙겔라 메르켈. 그녀가 결국 통일된 독일의 최초 여성수상이 되어 유럽을 이끄는 탁월한 리더가 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독일이 우리와 비슷하게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돼 있던 시절, 많은 동독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 동독을 탈출해 자본주의 민주국가 서독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그런 시절에 그런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다. 바로 목사인 호르스트 카스너였다.

카스너는 동베를린 판코우에서 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와 함부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그는 동독에서 목사로 일하기 위해 동독으로 돌아갔다. 그가 동독 보통사람들의 희망이나 선택과는 정반대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들어간 이유는 하나다.

“동독 사람들도 기독교를 알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신학적인 발판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스너가 동독으로 들어갈 때 함부르크 출신인 아내 헤르린트 엔취도 태어난 지 한 달 반밖에 되지 않은 딸을 안고 동독으로 갔다.

그리고 이 딸이 35살이 됐을 때 독일은 통일됐다. 딸의 이름은 앙겔라 메르켈, 바로 2005년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수상이 된 인물이다. 나중에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됐지만, 그녀가 처음 동독으로 들어갔을 때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 2015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메르켈 수상

당시 동독은 무신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권력을 쥐고 통치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지배세력은 교회를 외형적으로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교회를 음으로 양으로 교묘하게 탄압했다.

카스너 역시 동독으로 돌아오자마자 비밀경찰 슈타지(STASI:국가안보부)의 반체제 인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와 가족은 끊임없는 감시의 대상이 됐다.

카스너는 동독의 쇼로프하이데 근교의 템플린에 있는 목사관 발트호프에 가족과 함께 정착했다. 그는 발트호프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작은 교회를 운영하면서 목사관 시설을 활용해 작은 사회활동을 벌였다. 개신교 목사들을 위한 연수도 유치하면서, 슈테판재단의 지원을 받아 정신지체자 직업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정신지체자들은 이곳의 밭이나, 대장간, 대바구니 작업장에서, 그밖의 여러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앙겔라는 이 사람들을 이렇게 기억한다.

“이곳에서 일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늘 감동을 받았어요.”

카스너는 집안일을 결코 밖에 나가서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도 카스너는 가족들이 서독의 텔레비전을 보도록 했다. 동독 방송은 거의 보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은 전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뤄졌다. 바깥 사람들은 메르켈의 집에 어떤 책이 있는지 식구끼리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몰랐다.

호르스트 카스너는 그런 식의 이중생활을 잘 소화해냄으로써 자녀들의 앞길을 어떻게든 열어주려 애썼다. 또한 자신이 동독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기던 해 앙겔라 메르켈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선생님은 기독교 신앙 속에서 자란 그녀를 다른 학생들과 차별했다. 학교 선생들은 기독교에 대해 악의적으로 가르치곤 했다.

“기독교 신앙은 국민을 우둔하게 만들고, 비과학적이다.”

앙겔라는 자기네가 서독에서 온 목사 집안으로 동독 정권의 감시와 특별관리를 받고 있다는 특수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들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기 위해 1학년을 마친 뒤 동독 정권이 만든 관제기관인 개척단에 입단했다. 나중에는 청년단체인 자유독일청년단(FDJ)에도 들어갔다. 여기 입단한 사람만이 원하는 학업평가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메르켈은 어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5학년 때부터 러시아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0학년 때 나간 러시아어 올림피아드에서는 동독 전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메르켈은 공부를 매우 잘 하는 학생이었다. 무엇이든지 쉽게 이해했다. 앙겔라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에게 목사의 딸로서 다른 아이들보다 항상 더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어머니 헤르린트 카스너는 앙겔라와 그 세 살 아래인 남동생, 열 살 터울의 여동생을 직접 가르쳤다. 일종의 홈스쿨링을 한 것이다. 앙겔라도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폭넓은 지식과 사고틀을 갖출 수 있었다. 앙겔라는 다른 동독의 청소년들은 잘 모르는 신학이나 교회사에 대해 매우 정통했다. 나아가 기독교의 소중함과 믿음, 그리고 기독교적인 도덕에 대해서도 충분히 배웠다.

앙겔라는 라이프치히의 칼 마르크스대학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입학자격고사를 보기 직전에 입학허가가 취소될 뻔하는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교내에서 연 문화행사에서 앙겔라와 친구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실 앙겔라는 인문학이나 언어학에 관심도 더 많았고, 능력도 더 뛰어났다. 그러나 입학학과는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김나지움(독일의 대학준비중등교육기관으로 9년제)을 거치면서 인문계열 학과는 이데올로기적인 체제 규정이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엄격하게 통제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문화행사에서 이미 대학 입학을 보장받은 앙겔라와 몇몇 친구들은 학교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했다. 그들은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거의 ‘저항’으로 내비칠만한 행위를 감행했다. 반체제적으로 해석될 만한 시를 낭송하는가 하면 모금한 돈을 학교당국이 지정한 베트남 지원기금으로 내지 않고, 모잠비크의 마르크스주의 해방운동기구에게 보냈다.

문제가 된 시는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몹스의 일생’으로서 애완견을 빌어 동독사회를 풍자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길이 잘 보이는 담 모퉁이 위에
몹스들이 즐겨 앉아 있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화려한 세상을 여유있게 만끽하기 위해
아, 인간들이여, 당신 자신 앞에 펼쳐질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담 위의 몹스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나아가 학생들은 동독의 국가를 영어로 불러제꼈다. 교장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이 사건으로 앙겔라의 학급 학생들은 이틀 동안 비밀경찰 슈타시의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이 사건은 학부모들의 열성적인 구명운동과 앙겔라 아버지인 호르스트 카스너가 동독 집권공산당의 지구당에 이의제기를 하는 등의 활동에 힘입어 학생들의 대학입학 허가를 보장받는 것으로 결말날 수 있었다.
 

   
▲ 젊은 시절의 메르켈

1973년 앙겔라는 라이프치히에서 물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생활은 매우 평범한 편이었지만, 곧 남학생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나타내는 식으로 발전했다.

그녀의 관심영역은 점차 순수 물리학을 넘어서 매우 다방면적으로 확대돼 나갔다. 그녀는 사람 만나는 것을 즐겼고, 여행도 자주 했다.

메르켈은 교환학생으로 러시아를 방문했고,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구경했다. 이 때 러시아에서 만난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도 한다.

메르켈은 학생으로 동독 과학아카데미 라이프치히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자연과학분야의 석사학위 논문도 완성했다.

메르켈 부부는 1978년 동베를린으로 이사했다. 남편 울리히는 베를린 훔볼트대학의 강사로 일하고 되고, 앙겔라는 그토록 갈망하던 베를린과학아카데미의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특히 앙겔라가 일하게 된 중앙물리화학연구소(ZIPC)는 동독에서 확실한 자유를 만끽했고, 일반 동독국민들보다 훨씬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었다.

동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메르켈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게 된다. 하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워진 분위기에서 마음껏 “스스로의 자립정신과 개성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연구소의 자유독일청년단의 젊은 동료들과 과학 이외의 정치 사회 및 국제문제에 대해 활발한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에서는 공산주의 체제의 변화문제를 놓고 지식인들이 점차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분위기가 조성돼가고 있었다. 메르켈도 동료들과 함께 소련이 당시 새로이 제기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대해 자주 토론을 벌이곤 했다.

과학자이면서도 정치에 대한 관심이 컸던 메르켈의 자질은 그 뒤 급격스럽게 닥쳐온 독일통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메르켈을 새로운 세계, 정치로 나아가게 이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독의 모든 시스템과 가치관에 익숙해 있는 데다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서독의 정치세력과 조응하면서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엄청난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억압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게 결정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 독일 맥주 순수령 500주년 행사에 참석해 건배를 나누는 메르켈 수상

바로 이런 매력 때문에 메르켈은 통일 독일의 자유롭게 열린 공간에서 비교적 작고, 틀이 덜 짜져 있지만, 그렇기에 더 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신생정당 민주약진(DA)를 자신의 첫 정당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 뒤 메르켈은 민주약진이 동독의 기민당과 연합정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의회에 진출한 뒤 다시 동독의 기민당이 서독의 기민당으로 확대 개편하는 과정에서 통일 독일의 첫 수상이 된 헬무트 콜의 첫눈에 들어 일약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앙겔라 메르켈, 총명하면서도 침착한 이 승부사는, 동독의 35년 경험을 살려 적을 줄이고 파트너는 늘리는 방식으로 성공의 하늘로 날아오르게 된다.

■ 메르켈의 진로탐험 과정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 요소들

1.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대립하는 두 정치체제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
-메르켈은 35년 동안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았다. 동시에 그녀는 서독의 텔레비전을 늘 시청하는 생활도 병행했다.
-전혀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두 정치체제를 무난하게 소화해낸 경험과 지혜는 나중에 그녀가 이질적인 정치집단과도 조화와 연합을 이루게 하는 능력으로 발전한다.

2. 깨어있는 부모님의 존재
-메르켈의 아버지가 열어준 서독 텔레비전을 통한 정치교육, 어머니가 열어준 홈스쿨링과 기독교적 성실성은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어쩌면 메르켈의 아버지가 동독행을 선택하는 순간 정치인 메르켈에 대한 독일내 잠재지지세력이 일정부분 확보됐다고도 볼 수 있다. 결과론적으로 일종의 정치적 선견지명을 발휘했다고도 할 수 있다.

3. 다양한 가치관의 장점을 두루 소화해 진정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
-메르켈은 상호대립적이기조차 한 가치관을 각각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능숙하다.
-정치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 대해 정통하고, 대학진학과정에서는 인문계열에 더 능하면서도 이공계를 선택한 결정을 내리는 등 매우 적응력이 뛰어나다.

4. 참고 기다리고 침묵할 줄 아는 품성

   
▲ 2013년 독일 다하우수용소를 방문해 희생된 유태인들에게 헌화하고 묵념하는 메르켈 수상

-메르켈은 동독의 학창시절 동안 동독 정권의 반민주, 반기독교적 정책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나중에 정치인이 됐을 때 잘 참고 기다리는 과정을 거리낌없이 소화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고난의 과정을 겪으며 메르켈은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하는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5.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녀는 태어나던 해 바로 아버지의 동독행 선택에 따라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대해 배려하는 의식이 잘 형성될 수 있었다.
-또한 10대 때 아버지가 운영하던 기독교 사회활동기관에 온 정신질환자들과의 교류 경험에 따라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에도 빈틈이 없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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