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가는 ‘군주들의 무덤’ 20세기에 어떻게 살아남았나

제국이 융성할 때 그 군주제는 ‘안전’하다. 비록 특수한 사정에 따라 군주가 바뀔 수는 있어도 군주제 자체는 제국의 융성이라는 현실의 반대급부로 자연스럽게 존속된다. 그러나 제국이 더 이상 융성하지 못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공화제가 군주제를 압도하고, 첨단이 전통을 능가하며, 개인이 집단에 우선하는 21세기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 
“엘리자베스 2세, 영국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및 기타 해외 영토의 여왕, 영연방의 원수 및 신념의 수호자….”

영국 왕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황청의 교황을 제외하곤 유럽 어느 왕가보다도 역사가 길다. 현재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는 서기 827년부터 839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잉글랜드 국왕 에그버트왕(Egbert, King of England)의 직계 후손이다.

가계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기 5세기 초엽 최초의 웨스트색슨 왕 세드릭(Cedric, first King of West Saxons)에까지 이른다. 그러니까 약 1,500년의 가문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서기 1066년 국왕으로 즉위한 노르망디공 윌리암으로부터 따지면 40번째 국왕이 된다.
 

   
▲ 1985년 한 자리에 모인 영국 왕실 멤버들. 맨 오른쪽에 다이애나 빈도 보인다. [사진 제공=한겨레21]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와 상관없이 영국 왕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손꼽히는 ‘명가문 가운데 명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영국 왕실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명예와 호사, 그리고 부와 특권을 누리고 있다.

“2002년 4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즉위 50주년(Golden Jubilee)을 기념해 런던 버킹엄궁 정원에서 열린 야외 콘서트에는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록그룹 퀸, 기타의 신화 에릭 클랩튼, 엘튼 존 등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왕실쪽은 콘서트 참석 신청서를 낸 200만명을 대상으로 컴퓨터 추첨을 해 2만 4,000여 명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이 행사는 즉위 50주년을 맞아 영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펼쳐진 수천개의 크고 작은 기념행사 가운데 하나다.”

“영국 왕실의 재산은 최대로 60억파운드(약 1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약 4분의 3이 여왕의 몫이라고 영국의 한 주간지가 보도했다. 이와 달리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식적으로 약 3억파운드의 재산으로 영국에서 100위권 부자로 집계되고 있다. 이 경우는 버킹엄궁과 왕관 그리고 왕실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 등을 여왕의 개인 재산에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25만파운드가 넘는 유산에 대한 상속세율이 40%이지만, 국왕은 이 상속세를 물지 않는다. 1993년 엘리자베스 여왕과 존 메이저 보수당 정부가 ‘군주로부터 군주로의 상속에는 세금을 면제한다’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2년 여왕의 모후가 101살로 타계하면서 남긴 유산 7천만파운드(약 1,400억원)에도 상속세를 물리지 않았다.”

“1999년 6월 벌어진 20세기 영국 왕실의 마지막 결혼식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식은 전세계에 방영돼 약 2억명의 시청자들이 지켜보았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2001년 1년 동안 가든파티, 연회, 리셉션을 통해 7만여명을 접대하는 등 각종 행사와 왕실 유지 비용으로 쓴 돈은 3,530만파운드(약 706억원)에 이른다. 여왕은 지난 1년 동안 공식행사에 2,200회 참석하고, 22회의 수여식을 열어 2,600여 명에게 서훈을 수여했다. 그리고 모두 2만 1,000건의 기념식 메시지를 보냈다.”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린 에드워드 8세?

   
▲ 찰스 왕세자의 부인 다이애나 빈과 앤드류 왕자의 부인인 퍼거슨 빈이 애스코트 경마 개장 첫날 화려하고 대담한 옷차림으로 입장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왕자들과 이혼했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영국 왕실은 이런 화려한 무대의 다른 한편에서는 격심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있다. 우선 왕가에서는 지난 3세대 동안 매 세대마다 퇴위와 이혼 등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태가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른바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렸다’는 저 유명한 전설을 낳은 것이다(그러나 이 전설은 최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비밀문서를 근거로 심슨 부인이 실제로는 나치 독일의 열렬한 지지자로 독일쪽에 비밀정보를 흘렸다는 주장이 나와 크게 손상받고 있다).

다음 세대인 마거릿 공주(엘리자베스 2세의 동생)도 이혼하고, 그 아랫세대인 찰스 왕세자대에 이르면 아예 이혼이 정상인 것처럼 봇물을 이룬다. 찰스를 비롯해 앤 공주, 앤드루 왕자가 줄줄이 이혼한 것이다.

1936년 에드워드 8세의 퇴위를 앞두고 당시 스탠리 볼드윈 총리가 “이혼녀와의 결혼은 군주제의 고결함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발언한 사실을 상기하면 놀랍기 짝이 없는 사태 진전이다.

이와 함께 매스컴의 발달과 대중 정치권력의 확산으로 왕실은 비밀주의 등 전통적 보호막을 사실상 제거당해 위험에 훨씬 쉽게 노출됐다. 전통적인 왕실 기능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축소되거나 후퇴한 반면 오히려 왕실은 현대의 ‘인기인’으로서 자리매김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에 따라 인기인의 인기순위처럼 국민의 왕실 지지도가 사소한 사건에 따라 춤을 추고, 군주제라는 시스템의 존립 여부가 크게 위협받는다. 2002년 영국의 여론조사기관 모리(MORI)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가 영국의 미래를 위해 군주제와 여왕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찰스 왕세자의 이혼, 다이애나비의 죽음 등 충격적인 사건의 영향을 많이 받던 시기인 2000년 6월의 여론조사에서는 왕실 지지도가 사상 최저인 44%까지 떨어졌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국 왕실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자랑하던 제국의 영광을 지키는 상징으로서 굳건히 헤쳐나가고 있다. 나아가 유럽에 있는 다른 10개 입헌군주국가의 문화적 구심점으로서, 전세계에 존속하는 28개 군주국가의 대표주자로서 뉴스 메이커의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 중앙대학교 입학처 https://goo.gl/zMYKOj

 

■ 타협과 조화, 노블레스 오블리주 
 
   
▲ 스코틀랜드 근위대 사령관 복장 차림의 엘리자베스 2세. [사진 제공=한겨레21]
20세기는 어느 의미에서는 군주들의 무덤과도 같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 조지 5세의 재위기간인 1910년부터 1936년까지만 해도 13명의 국왕이 사라지고 18개의 왕조가 붕괴됐다. 거대제국 러시아의 차르가 볼셰비키에게 총살되고, 도처에서 왕들은 망명해야 했다.

영국 왕실이 유럽을 휩쓸던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제국주의의 전면 후퇴라는 대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왕가의 하나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대략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꼽을 수 있겠다.

1. 타협: 역사 발전에 따라 밑으로부터 거세게 솟아오르는 대중의 힘과 일찍 적절하게 타협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절대왕정을 끝까지 고집한 프랑스와 러시아의 왕실이 몰락한 것과 달리 그들은 살아남았다.

2. 유능한 지도세력: 물론 영국 왕정의 타협은 영국의 유능한 지도세력이 주도한 것이다. 귀족을 중심으로 한 이 지도세력은 국내 안정을 바탕으로 기득권의 벽 안에 교착된 구대륙 대신 바다로, 신세계로 진출했다. 왕실은 이 대세에 적절하게 타협하거나 이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

3. 노블레스 오블리주: 특권계급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데 영국 왕실은 어느 왕실보다 모범적이었다. 그런 실천을 바탕으로 국가적 위기 때 국민적 구심점의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삼촌인 켄트공은 2차대전 때 군부대를 시찰하고 돌아오다가 사망했고, 여왕의 아들 앤드루 왕자도 1980년대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 때 헬기조종사로 참전했다.

여왕 자신도 1940년 2차대전 때 14살 나이로 직접 의 위문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1945년 봄에는 직접 여성봉사부대에 들어가 소위로 복무하기도 했다.

4. 전통과 현대의 조화 노력: 영국 왕실은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시대 변화를 수용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아버지인 조지 5세는 노동당 정부의 등장을,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성 총리의 등장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여왕은 또 텔레비전의 위력을 일찍 깨닫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53년 자신의 대관식 때 의 중계 제의를 왕실이 반대했음을 알고 여왕은 즉각 허용하는 것으로 바꿨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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