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샘의 교단일기

   
 

버려진 가압장, ‘윤동주 문학관’을 찾다

   
▲ 김현진 강원사대부고 교사

최근 희망 학생들을 데리고 독서기행을 계획했다. 윤동주와 김수영의 삶을 더 들여다보기 위해 두 시인의 문학관을 탐방하고자 했다. 그런데 얼토당토않은 대통령의 ‘사과문’ 발표를 보며 나는 바짝 긴장했다. 서울 4대문 안으로 차를 끌고 갔다가는 그냥 길에 서 있을 확률이 높았다. 버스 대절을 취소해야 하나? 아, 활동 자체를 취소해야 하나? 시국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등등을 생각하며 밤새 뒤척였다.

윤동주 문학관이 있는 곳은 종로구 창의문로, 위치상 딱 청와대 왼쪽 뒤편이다. 김수영 문학관은 도봉구 방학동이라 차만 밀리지 않는다면 얼추 귀가시간도 맞을 것 같았다. 계획대로 20명의 학생과 두 분의 선생님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광화문에 진입해서 본 경찰 버스와 경찰들의 행렬은 작금의 사태를 파악 못한 우둔한 지도자의 권력에 대한 미련을 보는 듯해서 나는 쓴 미소를 지었다. 윤동주 문학관에 거의 도착할 즈음, 검문소 같은 곳이 보이더니 경찰이 버스에 올라 확인을 한다. 불쾌하다. 학생 인솔이라고 앞에 쓰여 있는데도, 무슨 지은 죄가 그리 많기에 저러고 사나 싶다, 그녀가 말이다.

드디어 윤동주 문학관에 도착. 동주의 문학관은 종로구 청운수도가압장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대가 높은 이곳에 식수 공급을 위해 커다란 물탱크와 물을 퍼 올리는 가압장을 만들었는데, 문인들의 제안서를 받아 일종의 재생건축 개념으로 개조한 것이다.

동주는 연희전문 문과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과 학생 김송의 집에서 벗 정병욱과 함께 하숙했고, 가끔 그 두 벗은 인왕산에 올라 산책을 하며 詩心(시심)을 다듬었으리라. 동주의 대표작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은 모두 이 시절에 쓴 작품이다.

억압 속 ‘사상의 자유’와 ‘양심’ 지킨 동주
동주의 시와 일생을 다시 한 번 들으며, ‘자유’를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독립운동가들이나 저항 시인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까지 바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요즘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는 것이 다소 모순되지 않는가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 뭘까? 목숨까지 바치며 지키려 했던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엔 ‘양심, 사상, 생각의 자유’이다. 그들에게 ‘양심’은 ‘나라를 빼앗기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저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는데 그냥저냥 살아가고, 또 침략자에게 부역하며 사는 것은 나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다.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지만,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주변에 쓰레기통이 없어서 그냥 아무렇게나 버렸을 때 다소 마음이 불편한 것이 양심의 아주 작은 일부분 아닌가? 그런데 나를 드러내고,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거나 지키지 못했다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행위로 옮기기까지 한 저들인 것이다.

‘양심’이란 것의 출발은 아마 사상의 자유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동주는 치안유지법 제 5조 위반으로 검거됐고, 19개월간의 수감 생활 끝에 의문의 주사를 ‘맞음을 당하며’ 감옥에 갇혀 있었고, 광복을 6개월여 앞둔 1945년 2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남긴 채 숨진다.
 

   
▲ 대림대학교 입학처 https://goo.gl/t5iQC2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 깜냥을 갖고 있어서이리라. 깜냥은 자기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기초이며,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과 약자에 대한 공감, 자신의 사유를 손과 발로 옮기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능력이다. 동주에게 그것은 우리말로 시를 쓰는 것이었고, 그 자유를 빼앗긴 동주는 자기와 싸우고 또 제국주의와 싸운 것이다.

여전히,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억압받는 중이다. 개인의 머릿속까지 짐작해 법이란 폭력으로 처벌하는, 일제의 잔재인 국가보안법이 존재한다. 사회뿐 아니다. 학교는? 자기 생각을 드러내면 교사답지 않은, 특이한 교사라는 식의 문화는 여전히 학교를 옥죄고 있다. 그렇게 길들여진 교사들은 학생들 역시 억압으로 길들인다.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 있던 동주의 문학관은 날씨만큼이나 스산했다. 동주 문학관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내내 몇 번 울컥하다가 결국 동주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영상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사망’이란 자막에 눈물을 쏟았다.

개인의 존엄성이 철저하게 짓밟히던 제국주의의 서슬 퍼런 공기 속에서 자기와 싸우며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시인 윤. 동. 주. 그가 ‘히라누마 도주’라고 창씨개명을 했던 것을 문제 삼았던 사람들에게, 동주가 창씨개명 닷새 전에 쓴 다음의 시를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
 

참 회 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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