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문명을 풍부하게 증폭시키다

   
 

8세기 중국의 장안, 사람들은 풍요 속에서 서역풍을 널리 즐기고 있었다. 봄놀이의 절정기에는 저마다 이란식의 모자를 쓰고, 이란식의 신을 신고, 이란식의 옷을 입은 채 온종일 꽃구경을 하며 보냈다. 석양이 질 무렵 귀족의 자제들은 백마에 올라탄 채 호희(胡姬)라 불리는 이란계 여성들을 찾아 술집으로 몰려갔다. 남색 아이섀도로 요염하게 짙은 화장을 한 호희들은 서역의 음악과 노래 그리고 춤으로 장안의 남자들을 유혹했다. 이백은 이렇게 노래했다.

"어디서 그대와 이별하면 좋을까
장안의 동문인 청기문일세
호희는 하얀 손을 내밀어 손짓하여 부르고
손님을 잡아끌며 금잔으로 취하게 하네"

(이백의 <홍배십팔도남귀숭산>(送裵十八圖南歸嵩山)에서)

   
▲ 실크로드. 동서양은 이 길을 통해 서로 문물을 주고받았다. 불교·기독교·이슬람교 등 종교는 물론 종이, 화약, 나침반도 이 길을 따라 전파됐다.[사진 출처=www.stratfor.com]

이란의 호희에 흠뻑 취했던 이백
그뿐인가. 당 태종조차 이런 정서에 깊이 빠져들었다. <책부원귀>에 따르면 태종은 서역의 고창국 원정에서 얻은 마유포도란 우수한 포도 종자를 궁궐의 뜰에 심어 재배한 뒤 스스로 8가지 포도주를 담갔다. 태종은 이 ‘황제의 포도주’를 여러 신하들에게 하사하곤 했다. 황제가 앞장서서 서역풍의 음주 문화를 유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이처럼 서양의 문물이 한껏 꽃피고 있었다. 실크로드 때문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양과 서양이 엄청난 문명과 물자를 서로 주고받으며 인류의 지평을 넓혔던 것이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인류문명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동양권과 서양권은 갖가지 형태로 교류해왔다. 고고학자들은 중국 허난성과 간쑤성 등에서 출토된 채색도기와 만리장성 지대에서 출토된 수많은 청동 제품 그리고 유라시아에 널리 흩어져 있는 옥제품 등은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이동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의 존재를 가장 먼저 기록에 남긴 역사가는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5년)이다. ‘역사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그는 명저 <역사>(Historiai)에 스키타이 교역로에 대해 기술하면서 돈강 하구로부터 볼가강과 우랄강을 건너 동북쪽으로 산재한 많은 민족을 묘사한 기록을 남겼다.

동양에서는 사마천(기원전 145~86년)이 <사기열전>의 ‘대완전’ ‘흉노전’ ‘서남이열전’ 등을 통해 중국 서쪽의 이민족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상당히 풍부하고 드라마틱하게 전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에서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각각 반대편으로 진출해 양쪽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져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실크로드는 점점 거대한 실체로서 인류의 생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시작해 만리장성을 따라 서북쪽으로 전진해 가욕관에 이른 다음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파미르 고원에 이르고, 다시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을 거쳐 소아시아에 이르는 길이 6400여km의 대장도로 완성돼갔다.

서양에서 실크로드의 완성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는 누구보다 먼저 알렉산더 대왕을 들 수 있다. 그는 기원전 334년부터 323년까지 11년 동안 벌인 동방원정을 통해 실크로드 서쪽 방면의 도로망을 사실상 완성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를 출발해 오늘날의 터키와 시리아를 거쳐 이스라엘과 이집트까지 정복한 그는 다시 페르시아를 석권한 다음 인도와 히말라야를 향해 전진한다. 원정은 멀리 동쪽의 힌두쿠시산맥과 인더스강에까지 이어진다.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따 ‘알렉산드리아’라는 첨단 도시를 건설한 그의 공로로 히말라야로부터 그리스에 이르는 서쪽 지역의 도로망이 대부분 틀을 잡는다(오늘날 아프간 사태로 유명해진 헤라트와 칸다하르 등이 다 이때 알렉산드리아로 건설된 도시들이다).

알렉산더는 나아가 많은 그리스계의 식민을 단행해 실크로드의 비약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인도 불교미술에 큰 획을 긋는 간다라 미술에서 섬세한 불상과 화려한 사찰의 신전이 등장한 것도 이 그리스계 식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 나침이 설치된 방위기계 이런 나침판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에 전해졌다.
<사진 출처=한겨레21>

진나라와 한나라의 지속적인 서역 경영
동양에서는 진나라와 한나라라는 통일왕조의 지속적인 서역 경영이 실크로드의 활성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역로를 직접 여행하고 기록을 남긴 장건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해 중국판 실크로드 네트워크를 이룩한 반초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자원해서 흉노의 후방에 있는 유목민족 대월지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초원으로 진입한다. 한나라와 적대하고 있던 흉노를 치기 위한 외교전략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흉노에 두 차례나 체포돼 장기간 억류되는 고초를 겪은 뒤 13년 만에야 흉노인 아내와 함께 중국의 장안으로 돌아온다.

그의 서역 국가에 대한 보고를 기초로 한나라는 서역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 결국 흉노 세력을 간쑤성 일대에서 몰아내고 하서4군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특히 서역의 명마에 심취한 한무제의 명령으로 한나라의 사자들은 좋은 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으로 파견됐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절단은 길에서 서로 마주칠 정도로 빈번하게 오갔다. 사절단의 규모가 큰 것은 수백명, 작은 것은 백여명이었다. …사절단이 많을 때는 해마다 수십회, 적을 때도 5~6회씩 파견됐다."
 

   
▲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가욕관. 여기서부터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돌입한다. [사진 출처=http://kr.travelchina.gov.cn/art/2015/9/13/art_12_1635.html]

서방의 상인들도 계속 장안으로 몰려들었다. 빛나는 보석류와 향료, 약품, 동물 등이 명마와 함께 장안성에 넘쳤다. 서방 상인들은 비단과 칠기, 금 등 중국의 특산품을 서방으로 가지고 갔다. 물자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학문과 지식, 이국적인 예술과 생활양식, 심지어 갖가지 동식물까지도 활발하게 교류됐다. 유사 이래 가장 다양한 문명과 물자가 광범위하게 뒤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실크로드는 그 뒤 역대 왕조의 성쇠에 따라 발전하거나 쇠퇴하는 등 부침을 자주 겪는다. 그러다가 당나라가 세계제국을 건설하면서 크게 융성하게 된다. 당이 타림분지에까지 안서도호부를 설치하고 물자와 사람의 교류를 적극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과 서방 양쪽에서 정세가 크게 변하면서 또다시 활기를 잃는다.
 

   
▲ 안양대학교 입학처 https://goo.gl/BVZI0W


소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 세력이 점차 영토를 잃고 대신 아랍인 세력이 커지면서 유럽과 중국의 적극적인 교역로가 막히게 된 것이다. 동쪽에서도 당이 안녹산의 난 등으로 큰 혼란을 겪어 실크로드에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됐다. 이런 교착 상태는 서기 13~14세기 몽고의 융성에 따라 해소되기도 했으나,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 때까지 대체로 이어진다.

인류 전체의 생존역량을 높이다
실크로드의 역사적인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동서양 문명의 상호 발전에 영향 : 동서양 문명은 2천년 이상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하면서 서로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명이 뒤섞여 더 탄력적이고 유용한 문명양식으로의 진화가 가능했다. 나아가 부분적이나마 식량 등 각 문명권 지역의 의식주상의 결핍을 실크로드의 교역을 통해 상호 보완했다고도 할 수 있다.

2) 인류의 생활양식에 결정적인 요소의 나눔: 무엇보다 제지술이 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 서양으로 전래돼 인류의 지적문화 재산의 대폭발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와 함께 문자와 십진법, 화약, 나침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주요한 문물을 주고받았다.

   
▲ 실크로드의 서쪽 아시아 끝인 이스탄불 [사진 출처=]

3) 세계종교의 전파: 불교를 비롯해 기독교·이슬람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 등이 모두 이 길을 따라 동양과 서양으로 퍼져갔다. 인류의 정신문명은 이 길을 통한 각 종교의 전파와 교류를 통해 더 풍부해지고 탄력적으로 변모해갔다고 할 수 있다.

4) 의학적 관점에서 인류 전체의 생존 역량을 강화함: 오랜 시간에 걸쳐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가 교류하면서 인류의 상호 면역력이 증대됐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더 다양하고 새로운 종족과의 결혼 가능성을 크게 높여 치명적인 유전병 인자들의 발생 빈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결국 인류의 총체적인 생존 역량을 장시간에 걸쳐 비약적으로 높인 셈이다.

활발한 ‘21세기판 실크로드’구상
현재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바다와 하늘에 빼앗긴 실크로드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다양한 계획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중국의 신장웨이우얼과 파키스탄을 고속도로로 연결하려는 판아시안하이웨이 계획을 비롯해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를 남북한과 중국에 연결하려는 계획 등은 모두 이같은 ‘21세기판 실크로드’ 구상이다.

과연 실크로드는 21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과 관련해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교훈이 있다. 실크로드는 서로 반대편 지역이 혜택을 공유하는 호혜평등의 원칙을 지킬 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그 원칙이 깨질 때, 양쪽의 힘의 균형이 깨질 때 실크로드는 평화와 번영의 길이 아니라 전쟁과 학살의 길로 돌변했다.

미국이 실크로드에 들어선 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이 터진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 '비단길'인가
 

   
▲ 비단옷을 입은 그리스 신화의 무녀 메나드 그림. 비단의 제조방법이 그리스에 전달된 것은 6세기 이후이므로 이 무녀도의 비단옷은 중국산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사진 출처=한겨레21>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교역로를 통해 오고 간 수많은 물자 가운데 특히 비단의 이름을 따서 이 길의 이름을 붙인 사람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레디난트 파울 리히트호펜이다. 그는 독일어로 비단길인 ‘자이덴 슈트라센’(Seidenstrassen)이라는 조어를 만들었고, 이는 곧 세계에 널리 전파됐다. 실크로드는 이 독일어 표현에서 비롯된 영어식 표현이다.

이처럼 서양인에게 실크, 비단은 가장 중요한 교역품이자 최고의 명품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비단은 기록에 남은 동서양 사이의 최초의 교역상품이기도 하다. 비단의 인기는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비단 열풍은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세네카의 <행복론>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비단옷은 신체를 보호할 수가 없으며, 부끄러움마저 가릴 수 없다. 그 옷을 한번이라도 입어본 여성이라면 마치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이 천이, 침실에서조차 남편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기를 꺼려 하는 부인네들이 공공연하게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상인을 부추겨 먼 미지의 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로마인들은 이 비단을 '세리카'(serica), 중국인을 ‘세르인’이라고 불렀다. 한자 ‘사’(絲)의 중국식 발음 ‘시’가 동양과 서양의 숱한 중계상을 거쳐 로마에 전해지면서 세리카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비단은 처음 서쪽으로 향하며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흉노 등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거래하며 중국인은 유목민의 좋은 말 한필에 비단 40필로 계산했다. 여기에 먼 거리를 수송하며 위험 경비와 관세가 계속 덧붙고 중간상인들의 폭리까지 겹쳐 가격이 폭등했다. 특히 로마에서의 폭발적인 비단 열풍 때문에 값은 더 뛰었다.

로마인들은 비단 수입에 따른 재정 적자를 우려하는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 풍조를 멈추지 않았다. 한편 실크로드의 서쪽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파르티아인들은 비단에 대한 중계무역의 권리를 독점하기 위해 비단에 관한 정보를 계속 비밀에 붙이고 그 대신 비단과 중국에 대해 신비화하는 설화 등을 만들어 서양에 유포하곤 했다. 바로 이런 흐름이 중국과 동양에 대한 서양의 신비주의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에듀진 기사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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