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노력과 인내로 기적을 일구다

   
▲ 1922년의 에디슨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특허를 낸 발명왕 토머스 알바 에디슨(1847~1931)은 정작 학교를 80여 일밖에 다니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평생 난청을 앓았고, 집안마저 넉넉하지 않았다. 짧은 가방끈, 장애, 빈곤가정이라는 3중고 속에서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을 이 미국의 발명가는 해낸 것이다.

정서 장애 소년의 비밀 실험실

   
▲ 오귀환 대기자

1854년, 에디슨은 7세의 나이에 미시간 주의 포트휴런 지역으로 이사한다. 하지만 에디슨은 포트휴런에서 초등학교를 거의 80여 일밖에 다니지 못했다. 소년 에디슨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꽤 심한 정서적 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에서 에디슨은 지나치게 산만하고 주의력이 떨어지는 아이로 비춰졌다. 어떤 일에 대해서든지 의문과 탐구심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아이였다. "왜요?"는 에디슨의 입에서 가장 많이, 쉼 없이 튀어나오는 단어였다. 하지만 당시 보수적인데다가 오늘날과 같은 아동 정서에 대한 지적인 정보와 의학적 지식이 없었던 학교 선생님은 그런 에디슨을 포용하지 않았다.

이에 어머니(낸시 매튜스 엘리어트)는 이러한 정황을 파악한 후 에디슨을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 홈스쿨링으로 교육하기 시작했다. 동부 보스턴의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 덕분에 에디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포트휴런에서 디트로이트로 가는 기차승객들을 대상으로 사탕과 신문을 팔았다. 틈틈이 채소도 팔아 수입을 늘렸다.

12살 정도밖에 되지 않던 소년이 기차에서 행상 비슷한 일을 한 것을 놓고 에디슨의 전기를 쓴 작가들과 에디슨 자신의 시각에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일부 작가들은 그의 집안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여서 어쩔 수 없이 그가 생활전선에 나간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낸다.

이와 달리 에디슨은 나중에 나름대로 성공을 이룬 뒤, 자기 집안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유복했으며 자신이 돈벌이를 한 이유는 전적으로 기차 칸에 몰래 마련해 놓은 자신만의 '비밀 실험실'에서 갖가지 실험을 하거나 그 재료를 모으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작가들의 주장은 에디슨의 10대 후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아버지는 완전 실업상태에 빠져 매우 곤궁하고 어려웠다는 사실과 어울려 상당히 믿을 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어린 나이부터 에디슨이 실제로 집안은 물론 철도의 방치된 기차 칸에 비밀 실험실을 만들고 실험을 해왔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에디슨의 주장을 마냥 다 부정하기도 어렵다.

소년 에디슨, 철로의 아이를 구하고 ‘전신’을 접하다

   
▲ 소년시절의 에디슨. 그는 16살 때 한 기차에 치일 뻔한 한 아기를 구한 것이 계기가 돼 당시 최첨단의 통신문명인 전신을 배우게 되고, 인생이 바뀌게 된다

에디슨은 1863년 어느 날 작은 사건을 계기로 극적인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평소와 다름없이 행상 일을 하려고 기차역에 들어서다가, 남자아기가 역 구내 철로까지 내려와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미 역 입구 쪽에서는 기차가 구내로 들어서며 기적 소리를 내고 있었고, 놀란 에디슨은 팔려던 물건을 내던지고 곧바로 달려 나가 아기를 무사히 구했다. 에디슨이 구한 3살배기 아기 지미의 아빠는 포트휴런 인근의 마운트클레멘스역 매킨지 역장이었다. 역장은 자신의 아들을 구해준 에디슨이 고마워서, 기차역에서 행상 일을 하는 에디슨을 돕고 싶었다.

“얘야, 내가 전신교환수 일을 가르쳐 줄 테니까 한번 배워보렴. 역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거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에디슨은 매킨지 역장으로부터 전신교환수 일을 배우게 된다.

전신(telegraph)은 1860년 당시로서는 최신의 커뮤니케이션 문명이었다. 무선기가 나오기 훨씬 이전 전신은 철도를 따라 깔린 유선전신망을 통해 전기신호로 점(dot)과 선(dash: 특히 수평으로 길게 그어나가는 선)을 역과 역끼리 송신하고 수신하는 방식으로 통신을 구현하고 있었다. 이 방식은 미리 약속한 점의 개수와 선의 길이로 알파벳이 표기되고 문장이 이뤄지는 구조이다.

바로 이 전신을 통해 미국 정부의 명령, 정책을 비롯해 뉴스와 정보가 역과 역을 따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오늘날의 문명과 비교해 표현한다면, 전신은 바로 1860년대의 'www'(world wide web)이자, 스마트폰이었던 셈이다.

에디슨의 일생에서 전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에디슨이 전신을 배운 뒤 미국 전국으로 마음껏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급속도로 팽창해가는 전국 철도망과 전신망을 따라 전신교환수는 어디를 가도 무조건 취업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능력이 됐다.
■ 에디슨이 초기 발명에 나선 시기에 그의 멘토가 되거나 사업을 같이 하게 된 파트너의 대부분이 바로 전신기술자들이었다.
■ 실제로 에디슨이 초기에 등록한 미국특허의 상당수도 바로 전신 관련 특허였다. 주식시세표 작성기, 전기투표 기록기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 에디슨 자신이 전신의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결혼 뒤 태어난 첫딸의 별명을 Dot(점), 첫째 아들의 별명을 Dash(선)로 지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최초 산업실험연구소 세워 대성공 거두다
에디슨에게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그가 산업실험연구소를 최초로 세우고 운영해 대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에디슨이 처음으로 발명을 기반으로 연구 회사나 제조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구상을 현실화하게 된 계기는 바로 4중 송신 전신기의 성공 때문이다.

   
▲ 1922년 에디슨에 대한 도큐멘터리를 촬영하는 한 텔레비전 방송.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에디슨이다. [미국 PBS 방송 캡처]

에디슨은 맨 처음 이 전신기 특허를 팔면서 그렇게 큰돈을 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4중 송신 전신기가 필요했던 전신회사 웨스턴 유니언에 특허판매를 제안했을 때 잘 하면 4~5천 달러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오늘날 화폐기준으로 보면 대략 8~10만 달러쯤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웨스턴 유니언이 1만 달러(현재 약 21만 달러 정도)를 제안하자 깜짝 놀랐다. 에디슨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 제안을 수락하며 머릿속으로 놀라운 사업구상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이 정도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발명으로 승부할 만하다.
그래, 이 돈으로 발명 전문 회사를 만들자!"


에디슨은 그동안 자신만의 실험과 발명을 통해 눈여겨보아둔 전신관련기술자 등을 비롯해 여러 전문가들을 끌어 모았다. 뉴저지 멘로파크에 세워진 이 연구소 회사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나갔다. 1877년 한 신문에 공개된 에디슨 연구소의 자산과 시설은 발명과 산업기술 혁신에 모든 승부를 집중했던 이 기업의 어마어마한 의지와 노력, 엉뚱함과 탁월함을 온 세상에 또렷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 연구소에는 8천 종의 화학물질, 모든 종류의 스크루, 모든 종류의 바늘,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코드와 전선, 인간을 비롯해 말, 소, 돼지, 토끼, 염소, 밍크, 낙타 등의 모든 털들, 세상의 온갖 비단, 누에고치, 온갖 발굽, 이빨, 사슴뿔, 거북등갑 등이 모아져 있다. 나아가 온갖 종류의 코르크, 합성수지, 광택제, 오일, 타조가죽, 공작꼬리털, 흑옥, 호박(보석), 고무, 광석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품목록이 이어지고 이어진다."

이 물품들은 이후 에디슨의 이름으로 특허를 낸 발명품들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에디슨은 미국에 등록한 특허 1,093건에 자신의 이름을 단독 또는 공동으로 올렸으며, 나중에 영국 독일 프랑스에도 특허를 등록했다.

특허 중에는 축음기, 백열전구, 영사기, 4중 송신 전신기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인류문명사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발명들이 쭉 망라돼 있다. 또한 에디슨은 모두 14개의 회사를 세웠고,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제조기업인 제너럴일렉트릭도 있다. 이처럼 그의 발명과 사업의 영역은 수많은 분야에 걸쳐 퍼져 있다.

   
▲ 평택대학교 입학처 http://goo.gl/U8HF3S


전기로 빛을 발명하다

   
▲ 1879년 에디슨이 발명한
최초의 백열전구 모델

에디슨의 숱한 발명은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 가운데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끌고 유명한 발명은 바로 백열전등과 축음기라고 할 수 있다.

에디슨이 전기를 통해 빛을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을 발명하겠다는 꿈을 안고 본격적인 백열전구 연구를 시작한 것은 1879년부터다. 초기에 그는 가스나 오일을 써서 빛을 낼 수 있다고 큰 기대를 걸었다. 연구의 관건은 발광체가 오랫동안 빛을 내는 면서도 실내에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백열등의 초기 구상은 1800년 전선의 팽창방식을 응용한 알레산드로 볼타의 시연을 비롯해 매우 많은 사람들의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초기 전기발광 밸브들은 거의 다 지나치게 수명이 짧거나 생산비가 너무 많이 들어 상업적으로 타산성을 증명한 경우는 아직 없었다. 

에디슨은 전구를 만들기 위해 전류가 흐르는 구리선의 두께를 적정수준까지 가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렇게 하면 램프가 적은 양의 전류로도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램프는 초 저항이어야 하고, 적어도 110볼트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전압에서도 제대로 작동해야만 했다.

결국 수많은 실험을 거쳐 1879년 11월, 에디슨은 카본 필라멘트의 저항을 이용해 전기를 빛으로 변환시키는 최초의 백열전등을 세상에 등장시킨다. 인류 최초의 상업생산 목적에 부응하는 이 전등은 13시간 30분 동안 빛을 밝힐 수 있었다.

에디슨 팀은 이 연구를 더욱 개선해 미국특허를 신청했고, 신청 두 달 만인 1880년 1월에 백열전등의 특허가 정식으로 미국에 등록됐다. 다시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에디슨 팀은 카본을 강화한 대나무 필라멘트로 발광시간을 1,200시간으로 늘린 획기적인 제품도 내놓았다.

에디슨은 곧바로 이 특허를 바탕으로 백열전구를 대량생산하기 위해 뉴욕에 '에디슨전기조명회사'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금융업으로 엄청난 부를 일군 미국 최대의 갑부 J.P. 모건을 비롯해 스펜서 트래스크, 반더빌트 가문 등 부호가문들이 일제히 이 회사에 투자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가

   
▲ 중학생을 위한 '기적의 스마트 워크북'
https://goo.gl/N6jVEY

그런데 에디슨에게 발명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한 계기는 백열전구보다 2년 전 발명한 축음기였다. 그는 소리를 진동판의 떨림으로 변환시키고 그 떨림을 바늘의 움직임으로 평면의 판에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기록된 떨림을 바늘을 통해 다시 재현하면 거꾸로 원래의 소리를 재생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해냈다.

마침내 에디슨 팀은 손으로 돌리는 회전실린더 위에 호일시트를 붙인 한 기구 앞에 몰려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구는 에디슨이 부른 '매리에겐 작은 양 한마리가 있었네'라는 노래를 다시 재생해냈다. 에디슨은 발명품에 '소리의 기록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따온 '포노그래프'(축음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사람들은 인류 존재 이후 인류가 단 한 번도 붙잡아 놓지 못했던 소리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축음기의 등장에 놀라고 열광했다. 특히 소리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이 발명에서 가장 중대한 기여를 하고 그 발명의 전 과정을 지휘한 에디슨이 정작 창밖의 새소리조차 또렷하게 듣지 못하는 극심한 난청의 청각장애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은 감동을 받았다.

   
▲ 1931년 에디슨이 죽자 모여든 조문객들.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그의 백열전구 발명을 기리기 위해 전 국민에게 추모를 위해 모두 일시적으로 전등불을 끄자고 제안했다. [미국 PBS방송 캡처]

에디슨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실패한 적이 없다.
다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수천 가지 방식을 찾아냈을 뿐이다."

그는 제대로 된 성공을 향해 그토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또 그의 연구소에는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유명한 경구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편하려고 하지 말라.
임시방편이라는 것조차도 진정한 두뇌노동을 통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다."

19세기 말 대다수 미국인들이 유럽인들에 대해 여러 분야에서 보이지 않는 열등감에 물들어 있을 때, 에디슨의 놀라운 발명들은 미국인들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에디슨의 백열전구로 세상이 밝혀지고, 그의 축음기에 녹음된 소리가 공간과 시간을 넘어 전파 및 재생되고, 그가 만든 영사기에서 재생되는 영화가 유럽을 휩쓰는 모습에 감격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발명가들의 나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이 발명의 천재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은 별명을 선물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가: 토머스 알바 에디슨'

그의 발명은 그 뒤 미국을 넘어 인류에게 빛으로, 다시 찾은 소리로 엄청난 행복과 희망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919
 

   
▲ <나침반36.5도> 정기구독 http://goo.gl/bdBmXf
저작권자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