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과 일본의 자연이 빚은 평화주의 노벨문학상 작가

   
▲ 오에 겐자부로


여인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현장을 찾아간 이유는?
1945년 8월 6일 아시아와 태평양을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게 막바지 발악적인 저항을 계속하고 있을 때, 군수물자 생산 도시 히로시마 상공에 무게 4톤의 원자폭탄 한 발이 투하된다. 미군 폭격기로부터 낙하한 폭탄은 곧 섬광과 함께 폭발하면서 직경 180m 크기에 섭씨 3만도에 이르는 거대한 불덩이로 도시를 덮쳤다.

지열은 곧바로 6,000도로 치솟고 거의 모든 구조물들은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리면서 불길에 휩싸였다. 도시 7km 지역 내 모든 것들이 완전히 무너지고 박살나 버렸다. 오렌지색 섬광에 뒤이어 곧 수많은 유리조각들이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생성된 버섯구름

유리조각의 급습을 피한 사람들의 몸으로도 10,000rad의 방사선이 덮쳤다. 도시 인구 40만 명 가운데 25%가 그날 하루 만에 죽었다. 폭발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들 가운데 5만 명도 곧 방사선 피폭으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집들은 차례로 붕괴돼 주저앉아 버리고, 시내를 오가던 전차들도 다 박살나 버렸다. 핵폭발 후 먼지와 핵분열 생성물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낙진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덮쳤다…. 도시는 불타버린 시체와 처참한 부상자로 지옥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그 무렵 시코쿠 산골에서 한 여성이 원폭 소식을 듣고 집안에서 마련할 수 있는 모든 쌀과 이웃에게 빌린 쌀까지 긁어모아 주먹밥 도시락을 가뜩 만들어 싼 채 400km 떨어진 히로시마를 향해 떠나고 있었다. 혼슈까지 간신히 연락선을 타고 가 바다를 건넌 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기차 칸에 올라타 5시간을 달려 히로시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10여만 명이 이미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도 갑자기 머리털이 모조리 빠져버리는 이 시간, 이 방사능의 도시 히로시마…. 모든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도망치거나 멀리하려는 이 도시에 거꾸로 이 여인이 힘겹게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 여인의 여학교 동창 5명이 이곳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원폭으로 고통 받고 죽어갈지도 모를 벗들을 돕기 위해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해 찾아간 것이다. 여인은 사흘 동안 처절하게 친구들을 찾았으나 끝내 모두 죽었다는 소식만 확인할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뒤에는 양심과 저항을 가르친 어머니가 있었다

   
▲ 오에 겐자부로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그로부터 49년 뒤 1994년 노벨상위원회는 일본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바로 피폭 도시 히로시마로 주먹밥을 싸들고 찾아갔던 여인의 4남3녀 자녀 가운데 다섯째 자식이었다. 어머니가 히로시마로 찾아갈 때 오에는 9살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히로시마 이야기를 하나도 잊지 않았다.

노벨상위원회는 그의 수상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시적인 언어를 구사해 현실과 신화가 뒤섞인 채 소통하는 신세계를 창조해냄으로써 위기에 몰린 현대인의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펼쳐 보이며 독자들을 당혹 속으로 이끌어갔다.”

노벨상위원회는 세계적인 작가와 그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도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오에 가문의 여성들은 오랫동안 이야기꾼(교육자, 가치전달자로서의)의 역할을 맡아왔고, 실제로 메이지유신 전후 시기에 시코쿠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봉기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본성상 이 여성들은 자기 땅에서 벌어진 일을 (국가라는 틀에 사로잡힌) 역사라기보다는 전설의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오에의 할머니는, 유머러스한 전달방식으로, 촌락공동체의 문화를 옹호하면서 군국주의 일본의 국가관에 때때로 도전하곤 했다. 그들은 비판적인 이야기꾼이었다….”

아시아 작가로는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3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 이처럼 독특한 집안에서 독특한 가치관을 접하면서 자라왔다.

어느 의미에서 그는 근현대 역사 거의 전 기간 동안 일본의 주류를 차지해온 일본 국가주의에 맞서, 문학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해온 저항의 지식인, 양심의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저항과 양심의 바탕에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실천하려던 어머니라는 ‘숲’이 있었다.

군국주의 교육을 부끄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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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일본을 이루고 있는 4개의 큰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의 산골마을에서 옛 사무라이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숲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원래 사무라이 가문이었다지만, 오에의 소설이나 전하는 이야기 등을 종합해보면 도쿠가와 막부의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 사무라이 가문으로 추정된다.

오에 가문이 수백 년 전 시코쿠로 들어와 아버지 때까지 몇 대째 삼지닥나무 재배로 생활을 유지해왔다는 이야기라든가, 오에의 할머니가 메이지유신 전후의 봉기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오에 가문이 길러서 생산하던 삼지닥나무를 더 이상 지폐의 원료로 쓰지 않게 되면서 가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어서 아버지도 돌아간다. 그래도 오에 가문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자연주의적이고도 인간주의적인 가치관을 지켜나가려 애썼다.

어머니는 어린 오에에게 예능과 구술능력을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계속했다. 이와 함께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든가 스웨덴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의 <닐스 홀게르손의 이상한 모험>을 사줬다.

오에는 1941년 초등학교에 갔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막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침략과 전쟁을 강행하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교육은 오에에게 매우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일본의 아이들은 모두 군국주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오에의 기억으로, 소학교 선생은 매일 같이 그에게 “천황은 살아 있는 신”이라고 가르쳤다. 나아가 매일 아침 학생들에게 다그쳤다.

“만일 천황 폐하께서 너에게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겠는가?” 오에는 그 자신도 다른 아이들처럼 대답했다고 밝힌다. “예, 제 배를 가르고 죽겠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그러나 잠자리에 누우면 죽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그리곤 자기가 거짓을 말했다는 점 때문에 부끄러워한다.


“바로 인간 자체가 평화입니다”
전쟁의 종식, 정확히 말하면 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 군국주의의 패전을 보며 오에는 배신감과 함께 해방감을 느꼈다. 이제까지 군국주의가 가르쳐준 것은 거짓이었다.

그 대신 그는 새로운 교육에서 자유를, 그리고 평화를 느꼈다. 민주주의는 그에게 마치 아버지가 수백 종류 새소리를 일일이 가르쳐주며 자연과 교감하는 것을 깨우쳐주듯 자유롭고도 풍요로운 것이었다.

1947년 중학생일 때 그는 천황 대신 민주주의와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지향하는 평화헌법이 제정되자 처음으로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느낀다. 더 큰 세상에서 더 넓은 민주주의와 인간 그리고 더 깊은 평화의 가능성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오에 가문의 후손 오에 겐자부로는 시코쿠섬 숲을 떠나 인간군상의 도시 도쿄로 가기로 결심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최고의 명문 도쿄대의 불문학과에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의 고전작가들을 비롯해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까뮈 등 실존주의 작가들의 책을 파고들었다. 영어와 불어로 명작들을 모조리 읽어나갔다.

그리고 대학 2학년 23세의 나이에 <사육>이라는 단편소설로 일본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아쿠다가와문학상을 받았다. 그 뒤 그는 50여 년 동안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어머니로부터 배운 인간과 평화의 가치를 변함없이 거침없이 밀고나가며 발언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인간 자체가 평화입니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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