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노예 해방을 위해 봉기한 스파르타쿠스, 로마를 떨게 하다

   
▲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의 전투장면[사진 출처=scrapsfromtheloft.com]

기원전 73년 여름, 당시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부와 영광으로 흥청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검투 노예들이 로마검투 노예의 중심지인 중부 카푸아에서 탈출해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70여 명에 의해 시작된 노예들의 봉기는 곧 많은 노예가 가세하면서 순식간에 수만 명 규모로 커진다.

그들은 중부에서 북부의 알프스까지 치고 올라가서 다시 남부의 땅 끝 항구 레기움까지 전진하는 등 2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그들의 분노 앞에 로마는 연전연패하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고대 세계를 뒤흔든 이 검투 노예들의 투쟁은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 ‘스파르타쿠스 노예전쟁(The Spartacus Slave War)’이라고 기록된다.

   
▲ 로마 검투경기를 묘사한 2세기 무렵의 모자이크[사진 출처=cam.ac.kr]

스파르타쿠스,노예 전쟁의 주인공이 되다
탈주한 검투 노예는 주로 갈리아인과 트라키아인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이들은 다른 검투 노예 양성소로 무기를 싣고 가던 마차 행렬을 털고 무장한 뒤 산속에 거점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세 명 가운데에는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체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지적이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스파르타쿠스(Spartacus, B.C. ?~B.C. 71)가 있었다.

검투 노예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는 행정관인 클로디우스를 병력 3천 명과 함께 진압군으로 파견한다. 클로디우스는 노예들이 진을 치고 있는 험준한 산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길목에 전진 기지를 세웠는데, 스파르타쿠스는 산에 자생하는 식물의 넝쿨을 이어 튼튼한 밧줄 사다리를 만들어 병력을 비밀리에 내려 보낸 다음 로마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둔다.

   
▲ 청소년 매거진 <톡톡> 정기구독
https://goo.gl/ug8hyx

이 승리를 계기로 주변에 있던 목축 노예들과 농업 노예들이 대거 노예군으로 합류한다.로마는 이번에 행정관인 프블리우스 바리니우스를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견한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바리니우스의 부관으로 2천 병력을 이끄는 푸리우스와 격돌해 그들을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로마진압군의 진지까지 유린해버린다.

스파르타쿠스는 전투에서 바리니우스의 부관인 코시니우스를 죽이고 그의 말을 빼앗은 것을 계기로, 로마 전역에 이름이 알려져 로마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불어나는 노예군과 로마 원로원의 진압
스파르타쿠스는 몇 번의 전투를 통해 노예군은 결국 전쟁의 마지막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쟁을 이어나가지 않고 갈리아와 트라키아, 게르마니아 등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다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프스로 향하는 그를 저지하려는 로마 키살핀 총독 카시우스와 싸우게 된다.

그런데 그는 카시우스의 1만 병력을 패퇴(敗退)시켰는데도 알프스를 넘지 못한다. 노예군 진영에 가담한 엄청난 수의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져 약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로마 원로원은 이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예들의 봉기를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집정관을 두 명이나 파견한다.

그가운데 한명인 겔리우스 프블리콜라는 스파르타쿠스 주력군에서 이탈한 게르만 노예군을 기습한다. 자신감에 가득 차 스파르타쿠스의 통제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던 게르만 노예군은 대패하고 살육된다.

   
▲ <고1 학부모가 알아야 할 대입 노하우> 개정판
http://bitly.kr/6Y4

스파르타쿠스의 연승, 역사에 한 획을 긋다
게르만 노예군을 잃었어도 여전히 스파르타쿠스는 건재했다. 또 다른 집정관인 렌툴루스가 대규모 야전군으로 포위하자 스파르타쿠스는 반격에 나서 렌툴루스를 향해 돌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스파르타쿠스군은 로마군을 물리치고 막대한 병참 물자를 노획한다. 로마 원로원은 이 패전 소식에 분격해 두 집정관에게 작전을 중단하라고명령하고, 크라수스를 노예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많은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 수칙에 따라 크라수스의 진압군에 가담했다. 크라수스는 일단 로마 방어에 주력하는 한편, 스파르타쿠스 후방에 있는 무미우스에게 2개 군단을 둥글게 배치해 스파르타쿠스를 지속적으로 포위하는 진형만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미우스는 이 명령을 어기고 스파르타쿠스와의 전투에 돌입해 대패하고 만다.

   
▲ 서기 1세기 무렵 로마 폼페이에 있던 검투 노예 양성소 막사. 마당은 훈련장이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역사에 남은 스파르타쿠스의 메시지, ‘인간해방’
로마 시대에 벌어진 대규모 노예 해방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이후에도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팔며 재산처럼 취급하던 죽음과 죄악의 시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러한 억압 가운데 노예가 된 인간들은 ‘인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궐기했고, 바로 그 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죽었다. 그러나 인간해방을 위해 무장봉기한 그의 이름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966

   
▲ <나침반36.5도> 정기구독 http://goo.gl/bdBmXf

 

 

 

 

 

저작권자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