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 표현방식으로 민족의 생애 담아내

   
▲황소 [그림 출처=이중섭미술관]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 그는 그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린이나 소, 닭, 가족, 달과 새, 물고기, 연꽃 등 그의 눈에 담긴 우리의 전통적인 소재들은 모두 작품이 됐다. 돈이 없어 종이를 살 수 없을 때에는 책의 속지, 합판, 심지어는 담뱃갑 속 은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이중섭은 ‘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당시 친일파나 귀족이 그렸던 화풍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표현방식을 보였다. 이는 그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느꼈던 민족의 아픔과, 가난했던 생애의 비참함을 고스란히 담은 것으로, 때로는 강렬하고 힘 있게, 때로는 경쾌하고 부드럽게 그려낸다. 삶이 예술이자, 예술이 곧 그의 삶 전체와 같았던 이중섭. 그의 예술혼이 담긴 그림들을 살펴보자. 

조선 미술계, ‘일본의 입맛에 맞춘’ 작품만 넘쳐
조선에서는 일제강점기 문화통치(민족 분열 통치)를 받던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선미술전람회’라는 사업을 주관해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전람회의 취지는 조선의 미술을 장려하고 발전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한국에 본적이 있는 자’, 또는 ‘전람회 개최 때까지 6개월 이상 한국에 거주한 작가’들은 출품 자격이 제한될 정도로 조선인을 억압했다. 또한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국가주의와 보수적인 면을 가진 친일본적인 인물들을 선발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작가들은 심사위원 기준에 맞는 기법과 형식, 소재까지 획일화 된 그림을 그렸다.
 

   
▲ 흰 소 [그림 출처=김달진 미술연구소]

강렬한 선묘의 ‘소’, 한민족 불굴의 의지를 내비치다!
그러나 이중섭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화법을 이어갔다. 이중섭은 어릴 때부터 커다란 눈망울을 가지고 순수한 모습의 ‘소’를 그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가 그린 ‘소’들은 일반적으로 외곽의 선을 그리고 내부에 색을 칠하는 방식이 아닌, 근육이나 뼈의 모양을 드러내 움직이고 있는 듯, 형태 자체가 대담하게 표현된다는 특징이 있다.

  * 582개 우수 생기부 사례 수록! '학생부 합격의 KEY' 출간 [배너 클릭!]  * 582개 우수 생기부 사례 수록! '학생부 합격의 KEY' 출간 [배너 클릭!]   
 

일본 예술계는 조선의 민족 정서를 대변하는 소, 특히 ‘황소’를 그리는 것을 지양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황소’, ‘흰소’, ‘싸우는 소’, ‘덤벼드는 소’ 등을 가리지 않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냈다.

그림을 뚫고 나올 듯한 소의 모습은 우리 민족의 우직함과 순수함, 그리고 일본에 지배받으며 고통 받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희망과 의지를 심어주는 힘이 돼 준다. 이중섭의 소는 우리 한민족에 대한 민족적 자각을 이뤄냄과 동시에 절망적인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 서귀포의 환상, 나무판에 유채 [그림 출처=호암미술관]

그리운 기억들을 그림에 녹여 ‘공동체 의식’을 이끌어 내다
이중섭은 격렬하면서도 섬세한 붓 터치로 시대의 아픔과 고독, 절망을 담은 그림을 그려냈지만, 가족에 대한 슬프고 애틋한 그리움을 나타낼 때는 환상적이고 아기자기한 모습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개인적으로도 비참한 삶을 보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사귀었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1945년 결혼했지만, 영원히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생활은 전쟁과 가난 속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는 원산사범학교의 미술 교사가 됐으나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고, 친구들이 반동 세력으로 몰리는 바람에 그 또한 전시를 열지 못해 돈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아내와 두 아들과 월남해 부산으로, 또 제주로 피난을 갔다.

   
▲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은 아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림은 앞에서 이중섭이 소를 끌고, 달구지에 부인과 두 아들을 태운 후 따뜻한 남쪽으로 향한다는 내용이다. [그림 출처=엘리펀트스페이스]

결국, 전쟁의 위협과, 지독한 가난에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가족을 그리는 나날을 보냈다. 그는 조선에서 홀로 머물며 키우던 닭과 농촌의 황소, 아이들, 게 등을 그렸고, 거기에 더해 자신이 어릴 적 봤던 풍경, 어린 나이에 전염병으로 죽은 큰아들 등의 기억을 그림 속 세상에서 아름답게 되살려냈다.

당시 한국에는 일본강점기 징용과 위안부, 재일교포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등으로 생이별을 겪은 가족이 많았다. 그러한 가운데 이중섭은 이미 없어진 풍경과 삶을 반복적이고 복합적인 형태의 그림으로 그려내, 전쟁이 휩쓸고 간 후 너도나도 지쳐있던 사람들에게 무의식 속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이는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며 함께 잘 살자’는 공동체 의식을 끌어낼 수 있었다.

 

*에듀진 기사 본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294

저작권자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