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탄생한 명작

본 기사는 청소년 진로 학습 인문 시사 매거진 <나침반36.5도> 6월호에 수록됐습니다.


이상의 문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그 난해한 문장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실제로 이상의 문학은 논리적인 전개에 의거하기 보다는 작가나 화자의 ‘의식의 흐름’에 더 의지하며 흘러간다. 따라서 사건 자체도 뚜렷하지 않고 사건 사이의 잘 짜인 연계성을 찾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작가가 가진 자아의 의식을 그대로 투영하며 당대의 시대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의식과 감정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한다. 화자의 의식과 심리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이상의 문학이 가진 힘은 그가 문학사에서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차지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 힘을 이상의 대표작 <날개>를 통해 확인해보자.

 

   
 ▲ 작가 이상이 직접 그린 ‘날개’의 잡지 삽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탄생한 명작, <날개>
작가 이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편소설 <날개>는 1936년 9월, 잡지 <조광> 11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가 가진 의식의 흐름을 따라 기술한 실험적인 심리소설이다. 이상은 이런 독특한 기법을 통해 사회와 역사의 절망 속에 살아가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방’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나’와 ‘아내’이다. 주인공은 변변한 직업도 없이 매춘 일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무기력한 인물인 반면, 아내는 ‘나’에 비해 적극적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이다. 두 인물의 성격은 각자가 생활하는 ‘방’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주인공이 살아가는 공간은 햇빛이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침침한 방 안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마치 ‘제 몸과 마음에 잘 맞는 옷’처럼 이 방 안을 뒹굴면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삶을 살아간다. 아내의 방은 볕이 드는 방이다. 화장대 위에 늘어선 화장품과 방 벽을 빙 두르고 있는 각양각색의 옷가지들이 아내의 방을 더욱 화려하고, 향기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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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아내가 외출한 시간, 아내의 방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아내가 자신의 방에 ‘내객’을 맞이하는 날이면 주인공은 꼼짝없이 자신의 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 이런 주인공의 일상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아내가 준 은화를 모아 외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외출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반드시 자정이 넘은 후에 돌아올 것. 왜냐하면 주인공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면 아내의 방을 지나가야 하는데, 자정 전 아내의 방에는 내객이 있는 날이 잦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몇 번의 외출 끝에 아내의 매춘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서 자발적인 ‘탈출’과 같은 외출을 감행하며 자신의 안에 꿈틀거리던 날개를 발견하게 된다.
 

 

나의 ‘외출’ 따라가며 읽는 <날개>

첫 번째 외출
돈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다


나는 아내의 밤 외출 틈을 타서 밖으로 나왔다. 나는 거리에서 잊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나온 은화를 지폐로 바꾼다. 오 원이나 된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목적지를 잃어버리기 위하여 얼마든지 거리를 쏘다녔다. 오래간만에 보는 거리는 거의 경이에 가까울 만큼 내 신경을 흥분시키지 않고는 마지 않았다. 나는 금시에 피곤하여 버렸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그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까닭을 잃어버린 채 이 거리 저 거리로 지향없이 헤매었다. 돈은 물론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을 쓸 아무 엄두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두 번째 외출
아내의 방에서 자기 위해 외출하다


나는 그 단벌 다 떨어진 골덴 양복을 걸치고 배고픈 것도 주제 사나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활갯짓을 하면서 또 거리로 나섰다. 나서면서 나는 제발 시간이 화살 단듯해서 자정 이 어서 홱 지나 버렸으면 하고 조바심을 태웠다. 아내에게 돈을 주고 아내 방에서 자 보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좋았지만 만일 잘못해서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갔다가 아내의 눈총을 맞는 것 은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저물도록 길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하면서 또 지향없이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좀처럼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좀 너무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아서 안타까웠다.

세 번째 외출
아내에게 등 떠밀려 나와 티룸을 가다


‘옛소’하고 내 머리맡에 내려뜨리는 것은 그 가뿐한 음향으로 보아 지폐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 귀에다 대고 오늘을랑 어제보다도 늦게 돌아와도 좋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 그 돈이 무엇보다도 고맙고 반가웠다.

어쨌든 나섰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경성역 일 이등 대합실 한곁 티이루움에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네 번째 외출
아내가 준 약이 수면제라는 충격에 휩싸여 뛰쳐나가다


나는 아스피린으로 알고 그럼 한 달 동안을 두고 아달린을 먹 어 온 것이다. 이것은 좀 너무 심하다. 별안간 아뜩하더니 하마터면 나는 까무러칠 뻔하였다. 그 아달린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산을 찾아 올라갔다.

인간 세상의 아무 것도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걸으면서 나는 아무쪼록 아내에게 관계되는 일은 일 체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길에서 까무러치기 쉬우니까다.

다섯 번째 외출
세상 밖으로 ‘의식의 한 발’을 내딛다.


내 바지 포켓 속에 남은 돈 몇원 몇십전을 가만히 꺼내서는 몰래 미닫이를 열고 살며시 문 지방 밑에다 놓고 나서는, 나는 그냥 줄달음박질을 쳐서 나와 버렸다.
(중략)
나는 내가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 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중략)
나는 불현 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일제강점기 속, ‘자신의 모습’을 잃은 사람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1930년대 서울은 근대화가 상당히 진행됐던 시기였다. 미쓰코시, 조지아 등 일본계 백화점, 그리고 화신 백화점과 같은 조선계 백화점이 들어섰고, 공원과 영화관, 카페까지도 즐비한 상태였다. 이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경성역 대합실의 ‘티룸’, 미쓰코시 백화점도 실제로 1930년대 경성에 존재했던 곳이다. 그러나 도시화된 서울의 모습과 달리, 그 속에 존재하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비윤리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내는 남편이 있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매춘을 하며 돈을 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부도덕한 방법으로 버는 돈인 줄 알면서도 아내가 주는 돈을 받아 생활한다. 이처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윤리적인 모습에는 정상적인 사고로 살 수 없는 당대 현실 속의 여러 결함과 그 상황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행복도 불행도 느끼지 못하는 ‘박제’된 인간
박제는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썩지 않도록 솜이나 대팻밥 등을 넣어 살아있을 때와 같은 모양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장식품이다. 이상은 당대 지식인들의 모습을 이 ‘박제’에 비유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작품 속 1인칭 화자인 ‘나’가 스스로를 ‘박제된 천재’와 같은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화자가 곧 작가 이상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잠재된 능력을 가진 천재, 지식인이지만 주체적인 의지가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박제가 돼버린 지식인들의 모습은 소설 곳곳에서 등장한다. 특히 ‘방’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주인공은 아내의 방과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볕도 들지 않는 방에서 살고 있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절대적인 상태’로 인식한다. 행복이나 불행 따위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이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무 불평이 없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어떤 꿈이나 희망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인간으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지식과 능력마저 사장돼 버렸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깨어나는 천재에게 ‘이상’적인 날개가 돋다

한편 주인공은 거듭되는 외출과 외출을 통해 벌어지는 아내와의 사건들을 통해 점차 ‘박제’된 모습에서 벗어나간다. 처음 주인공이 외출을 했던 것은 그저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단지 아내가 번 돈을 써 보기 위한 외출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돈을 쓰는 기능’조차 상실한 인간임을 깨닫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외출 역시 자발적인 외출이라기보다는 아내 탓이 컸다. 아내의 방에서 잠을 자기 위해, 그리고 외출을 등 떠미는 아내에 의해 밖으로 향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감기에 걸리고, 아내가 준 약이 감기약이 아니라 사실 수면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은 점차 다른 성격의 외출을 하게 된다. 마침내 미쓰코시 옥상에 오른 그는 꿈에서 깨어나듯 자신의 의식이 깨어남을 ‘날개’를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개가 돋기를 염원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대개 문학작품 속 ‘날개’는 자유와 이상을 상징한다. 이 소설에서 날개가 의미하는 것 역시 ‘자유롭고 이상적인 삶을 향하는 몸짓’이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왜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고 그 의미를 되새겨가며 살아가기를 꿈꾸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날개>는 1930년대 숨죽이며 살아가던 지식인들이 억압된 현실을 벗어나 자아를 찾고, 생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간절한 바람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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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이상(李箱, 1910~1937)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 고보, 경성 고공 건축과를 졸업했다. 1930년 <조선>에 <12월 12일>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조선중앙일보>에 난해시 <오감도>를 발표해 당시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1937년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어 구금됐다가, 앓고 있던 폐결핵이 심해져 석방됐다. 그러나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동경 제대 부속 병원에서 사망했다. 작품으로는 <날개>, <동해(東骸)>, <지주회시>, <종생기>, <실락원> 등이 있다. 
 


*사진 출처: 서울신문, wikipedia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626
 

   
▲ 가천대학교 입학처 https://goo.gl/OAt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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