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문학, ‘서동요’의 진실을 밝혀라!

여러분은 어떤 노래를 좋아하나요? 신나는 힙합, 감성 가득한 발라드, 멋진 안무에 흥이 절로 나는 댄스음악까지 음악의 장르는 매우 다양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넘어서 우리가 즐겨듣는 음악 대부분은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만큼 많은 사람들을 웃게 하거나 울릴 수 있는 감정도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아주 오랜 옛날,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사랑 노래를 불렀을까요? 오늘은 신라 시대 사람들이 부르던 사랑 노래, ‘서동요’를 알아보고, 서동요에 얽힌 이야기와 진실을 파헤쳐봅시다.

사랑을 이뤄준 노래, 서동요
고려의 ‘일연’이라는 스님이 쓴 <삼국유사>라는 책 속에는 ‘서동요’라는 사랑 노래와 함께 백제에서 마를 캐어 팔던 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주와 결혼하는 법? ‘노래’를 퍼트려라!
삼국시대에 백제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를 캐 내다 팔며 생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서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서동은 옆 나라 신라의 셋째 공주인 선화공주가 천하의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선화공주에게 장가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떠났지요.

하지만 미천한 신분이었던 서동은 고귀한 신분인 선화공주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서동은 한 가지 꾀를 내어 골목에서 아이들을 모아 자신이 캐온 마를 나눠주며 노래 한 곡을 가르쳐주었는데요. 그 노래가 바로 ‘서동요’입니다. 서동이 가르쳐준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순식간에 서라벌 전체로 퍼져나갔고, 신라 사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도대체 무슨 노래이길래 그럴까요?

   
▲<사진: 톡톡 9월호 캡쳐>

 


선화공주님은 善化公主主隱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他密只嫁良置古
맛동(서동) 도련님을 薯童房乙
밤에 몰래 안고 간다 夜矣卯乙抱遣去如

 

 

온 나라에 퍼진 노래, 궁에서 쫓겨난 공주
왕실에 사는 고귀한 공주님이 남몰래 시집을 갔다니, 이 엄청난 내용에 신라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가히 ‘서라벌 최대의 스캔들’이라고도 할 수 있었죠. 어른들은 이 엄청난 내용의 노래를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어 쉬쉬했지만, 눈치 없는 아이들은 더욱 노래를 퍼뜨리기 시작했어요. 결국 온 나라가 선화공주와 서동의 이야기로 수군거리게 되자, 진평왕은 크게 노하여 선화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고 맙니다.

서동의 꿈, 노래 가사처럼 이뤄지다!

   
▲ <사진: 톡톡 9월호 캡쳐>

눈물을 흘리며 떠난 선화공주 앞에 서동이 나타나 위로를 해주고, 든든한 벗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합니다. 선화공주는 서동이 노래를 퍼뜨린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서동의 늠름한 모습에 마음을 열어 서서히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부부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서동은 선화공주에게 자신이 백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공주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함께 살자고 청했습니다. 공주는 흔쾌히 이를 수락해 둘은 다시 백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먼 훗날, 서동은 선화공주의 도움으로 담대한 성격과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여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바로 백제의 30대 무왕입니다.

하루는 왕과 왕비가 용화산 아래의 큰 연못가를 지나는데 미륵 부처님 세 명이 연못에서 스르르 솟아 올랐습니다. 이에 왕비가 “이 자리에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 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해 정성을 다해 화려한 절을 지었지요. 이 절이 바로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미륵사’라고 합니다.

‘서동요’ 이야기, 진짜일까?
노래를 지어 퍼뜨려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백제 무왕의 일화. 그러나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이유인지 함께 알아볼까요?

선화공주는 사람들이 꾸며낸 인물이다?
2009년,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터의 석탑 안에서 ‘금제 사리봉안기’라는 유물이 발견됐습니다. 이 유물은 금으로 만든 판의 양면을 이용해 글자를 새겨 넣은 기록이 있었는데요. 기록은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이는 ‘미륵사’를 세운 것이 선화공주의 발원이 아니라, 백제의 고위급 관직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 출신인 백제인 왕비의 발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왕 때 왕비의 발원으로 절이 지어진 것은 맞지만,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서동요’에 얽힌 사랑 이야기를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고 해석했습니다. 진짜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적덕의 딸인 사람이었고, 선화공주와 서동의 이야기는 후대에 와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또 다른 학자들은 “사택덕적의 딸과 왕비가 함께 발원했다.”라고 해석하거나 선화공주가 무왕의 또 다른 왕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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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 진실’ 가려낼 열쇠 발견!

   
▲ <사진: 톡톡 9월호 발췌>

그렇다면 정말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까요? 이에 대해 시원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가 발견됐습니다. 바로 익산에 위치한 쌍릉 대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졌기 때문이지요.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의 무덤인 익산 쌍릉은 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중 무덤의 봉분과 크기가 큰 것은 ‘대왕릉’, 작은 것은 ‘소왕릉’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이 무덤은 후대 학자들이 조사도 하기 전 이미 도굴돼 유물이 남아있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근처에 미륵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륵사를 처음으로 만든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이죠.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것이 누구의 무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2년 전, 2016년에는 국립전주박물관이 무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던 대왕릉에서 수습된 유물을 정리하면서 찾은 치아가 ‘여성’의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또다시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대왕릉 내부에서 발견된 인골함과 인골을 조사한 결과, 학계를 발칵 뒤집을 만한 결과가 공개됐습니다.

 

   
▲ <사진 출처=SBS뉴스>

“대왕릉의 주인은 무왕이 확실하다!”

대왕릉에서 발견된 102개의 인골은 겹치는 부분이 없어 한 사람의 뼈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이 뼈의 주인이 키는 최대 170cm 정도이며, 60대 전후의 남성 노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사망 시점은 620년에서 650년 사이로 추정됐습니다. 바로 이런 정황에 딱 맞는 당대 백제 왕은 600년에 즉위해 641년 60~70대의 나이로 사망한 무왕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백제의 무왕이 확실하다. 익산 쌍릉의 주인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상 일단락 됐다고 보면 된다.”고 확신을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2년전 국립전주박물관은 왜 대왕릉에서 발견한 치아를 ‘여성’의 것이라고 발표했을까요? 이에 대해 이번 조사를 담당한 응용해부연구소는 “치아만으로는 성별과 연령을 파악하기 힘들다. 이번 조사를 통해 대왕릉에서 발견한 뼈의 크기와 너비를 종합적으로 확인한 결과 남성일 확률이 높다.”라고 설명했습니다.

 

   
▲ <사진 출처=doopedia>

소왕릉의 주인, 과연 선화공주일까?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소왕릉으로 넘어갔습니다. 소왕릉의 주인이 선화공주라고 밝혀지는 순간, 삼국시대 노래로 이어진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진실’이 되는 것이지요. 조사단은 도굴로 인골이 교란됐을 가능성도 있는 만큼, 앞으로 더 철저한 조사 작업을 통해 소왕릉의 주인까지도 명확하게 가려내겠다고 밝혔습니다. 과연 소왕릉의 주인은 선화공주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요? 이 흥미로운 진실공방이 가려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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