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반대 의견도 막지 못한 세종의 ‘백성사랑’

   
 

친구들은 10월 9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나요? 맞아요! 바로 ‘한글날’입니다. 그런데 한글날은 어떤 날일까요? 한글을 처음으로 만든 날? 아니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날?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한글날의 정확한 의미와 우리에게 소중한 한글을 선물해주신 세종대왕에 대해 함께 알아봅시다!


조선의 가장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

   
▲ 세종대왕 [사진 출처=kor.theasian.asia]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글을 만든 위대한 왕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여러분도 아주 잘 알고 있듯 바로 ‘세종대왕’이지요.

세종대왕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으로, 조선의 세 번째 임금이었던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사이에 태어난 셋째 아들입니다.

원래는 세종대왕이 아니라 그의 형인 양녕대군이 태종을 이어 왕이 될 세자였습니다. 그러나 말을 타거나 사냥을 하며 놀기만 좋아하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양녕대군에게 크게 실망한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아 병이 날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던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그가 훗날 바로 세종대왕이 되었지요.


“죽을 때까지 나라를 위해 일하라!” 세종이 황희에게 내린 벌?
세종대왕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에는 뛰어난 인재들도 대거 등장했습니다. 조선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장영실, 음악에 박연, 북방 개척에 김종서, 문학에 변계량과 정인지, 집현전의 학자들까지 뛰어난 인재들이 넘쳐났죠.

특히 세종대왕 시대의 인재라면 18년 동안 영의정 자리에 있었던 황희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황희는 청렴하고 검소한 정승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요.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황희의 별명은 ‘황금 대사헌’이라고 하는데요. 대사헌이라는 높은 벼슬에 있을 때 승려들로부터 황금을 뇌물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사위가 사람을 죽인 일을 숨겨주려다 들통이 나기도 했죠.

그러나 세종은 황희를 처벌하는 대신 그를 계속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황희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해도 “그러면 내 가마를 보낼 테니 앞으로는 그것을 타고 출근하시오.”하고 사직을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황희는 무려 80세가 넘은 나이까지 나라를 위해 일을 하다가, 세종이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에서야 비로소 모든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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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13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세종 14년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 세종 14년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세종 17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 세종 18년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 세종 20년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 세종 21년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 세종 21년 6월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 세종 22년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 세종 25년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인재’ 풍요의 시대, 토론 좋아하는 세종대왕 덕분!

   
▲ 경복궁 수정전. 세종 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
[사진 출처=위키백과]

세종대왕은 자신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왕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신하들과 토론을 하고, 의견을 나누며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 날, 오늘날의 비서실장같은 도승지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랏일을 잘 알지 못하니 대신들을 불러주시오.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정하고 싶은 일이 있소.”

이처럼 왕이라면 뭐든지 뜻대로 할 수 있고, 특히 세종대왕처럼 책도 많이 읽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지혜로도 척척 풀어나갈 수 있는 일이라도 항상 신하들과 머리를 모아 나랏일을 처리해갔습니다.

이밖에도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을 모아 옛 왕의 기록과 고전서를 공부하고 문제를 푸는 ‘경연’이라는 회의를 가졌는데요.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은 재위하는 동안 경연을 네 번밖에 하지 않았지만, 세종대왕은 무려 1,989회나 열었다고 합니다. 또 직위가 낮은 신하라도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하고, 의견을 내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 훨씬 더 많은 인재가 등장할 수 있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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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청소년 진로 학습 인문 시사 매거진 <톡톡> 10월호에 수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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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왕, 세종의 “이것만은 양보 못 해!”
그런데 이렇게 토론도 잘하고, 신하들의 의견도 잘 경청하던 세종대왕이 수많은 반대와 상소에도 불구하고 강경하게 펼쳤던 정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글 반포’입니다. 한글 창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완성됐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종대왕과 많은 학자들이 우리 말을 발음할 때 혀의 모양과 우리 소리를 끊임없이 연구해 탄생시킨 세계적인 언어입니다. 창제 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비밀 프로젝트’였을 지도 모르죠.

   
▲ 최만리 등의 한글 반포 반대 상소문
[사진 출처=kang.chungbuk.ac.kr]

세종은 1446년, 갑작스럽게 한글의 제작 사실을 대신들에게 알리고 한글을 반포하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이때 조정의 신하 대부분이 한글 창제와 반포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최만리와 정창손의 반대 상소가 대표적이지요. 최만리는 “고유 문자를 제작하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며, 특히 중국을 사대하는 국가 방침에 어긋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한글은 백성들을 편안한 삶을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이다.”라고 한글 창제와 반포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지요. 그리고 마침내 한글을 반포하고 한글의 편리한 사용을 위해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동국정운 등의 책까지 완성합니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향한 사랑, 애민정신
이처럼 백성을 향한 세종대왕의 사랑은 자식을 향한 어버이의 사랑 만큼이나 컸습니다. ‘훈민정음’의 뜻이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것만 보아도 이를 느낄 수 있지요. 이처럼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한글은 전 세계의 언어 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어떤 소리도 표현해낼 수 있는 뛰어난 언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읽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물론 다른 사람의 의견과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 생각만 고집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귀를 닫는다면 여러분은 아주 좁은 생각밖에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귀와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한다면 여러분은 훨씬 더 넓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세종대왕도 자신이 매우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나의 신념이 확실하게 선 일에는 주변의 반대나 우려의 목소리도 극복해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에는 과감히 도전해보세요. 그것이 진정 옳은 일이라면 여러분과 그 주변까지도 아주 멋지게 변화시킬 테니까요!

■ <톡톡> 10월호 '인자한 세종대왕이 막무가내로 펼친 정책은?'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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