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일본 향한 분노’ 안고 떠나

   
 

일본 정부에 사죄를 요구하며 투쟁했던 또 한 명의 ‘위안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났다.

여성인권운동가이자 ‘위안부’ 피해자였던 김복동 할머니가 어제 1월 28일 오후 10시 40분 경,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군복 만드는 공장으로 가야 한다’라는 말에 속아 만 14세인 1940년부터 1947년까지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무려 8년 간이나 ‘위안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김 할머니는 근근이 목숨만 이어오며 끔찍한 고초를 겪다 1948년 8월 15일 광복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김 할머니는, 이후 국내외를 오가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과 전시 성폭력 방지 및 피해 여성을 돕는 인권활동에 매진했다.

특히 지난해 9월에는 대장암으로 투병을 하는 가운데 “방에 누워 있다가 속이 상해 죽겠어서 나왔다”라며,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외교부 앞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이때 김 할머니는 곧은 목소리로 “우리가 위로금 받으려 여태 싸운 줄 아냐, 1000억을 줘도 못 받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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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김 할머니는 투병을 하는 가운데도 “아베는 사죄하고 배상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이 목소리는 그대로 녹음돼 지난해 11월 열린 수요집회에서 울려퍼졌고, 참가자들이 구호를 따라했다.

1월 29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 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는 “할머니께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워낙 기력이 없으셔서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며 “유일하게 알아들은 말은 ‘일본에 대한 분노’라는 한 마디였다”고 말했다. 이어 윤 대표는 “마지막 순간에는 평온하게 가셨다”고 말했다.

김복동 할머니가 별세한 후,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23명이 됐다.

한편, 일본군 ‘위안부’를 표기할 때 따옴표를 붙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위안부라는 단어에는 ‘안식을 주고 위안을 준다’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어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오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와 여성단체가 이 명칭을 바꿔보려 했지만 이미 국제적인 이슈가 돼 이름을 바꾸기 쉽지 않았기에, 정식 명칭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정해 ‘위안부’가 일본식 표현임을 떠올리고 본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사진 설명: 2018년 9월 1일, 외교부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 1인 시위를 벌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사진 출처=YTN]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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