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렬한 사운드 속에 저항의 시대 전율이 울린다!

[사진 출처=클립아트코리아]
[사진 출처=클립아트코리아]

지난 겨울, 추위를 잊게 만들 정도로 대한민국이 열광한 음악 영화가 있다. 바로 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퀸’의 음악 세계를 다룬 <보헤미안 랩소디>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들의 전성기를 경험한 세대부터 그들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10대 청소년들까지 모두를 아우르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단지 음악이 좋아서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음악은 시대를 대변한다는 말이 있다. 특히 60~70년대는 치열했던 세계사 속에서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기도 했던 뜨거운 ‘록 음악’의 역사가 깃든 시대이기도 하다. 불타는 청년들의 혼을 담았던 록 음악, 그 역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 이 기사는 <나침반 36.5도> 매거진 1월호 p.88에 6p 분량으로 수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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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사회, 흑인 음악에 빠진 백인 10대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로 경직된 미국 사회 속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기성세대의 억압에 젊은이들은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천대받던 흑인음악 ‘리듬 앤 블루스(Rhythm&Blues)’로 눈을 돌린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당시 백인 중산층은 부드러운 멜로디 위주의 스탠다드 팝을 주로 들었는데, 기존의 블루스 음악에 빠른 리듬과 격렬한 비트가 돋보이는 흑인 음악이었던 리듬 앤 블루스는 백인 기성세대에게는 멸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만의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특히 이 음악에 심취한 백인 10대 청소년들은 보수적인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저항의 의미로 받아들이며 빠르게 흡수했다.

한편 이 무렵 음반 제작자들 사이에서는 ‘흑인의 음색을 낼 수 있는 백인을 찾는다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할 수 있는 백인 가수를 찾는데 혈안돼 있었다. 일부 백인 가수들은 리듬 앤 블루스에 백인들의 취향을 섞은 곡을 발표하며 히트를 치기도 했다.

이렇게 흑인 음악 리듬 앤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 음악이 섞이며 탄생한 것이 바로 ‘로큰롤(Rock and Roll)’이다. 로큰롤은 약 반세기 동안 대중음악의 모든 것을 바꿔놓은 ‘록’ 음악의 효시가 됐다.

로큰롤의 탄생, 새로운 대중음악의 시작을 알리다
1950년대를 풍미한 로큰롤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은 이 음악을 한 때의 유행으로 받아들이며 무시하거나 비난했다. 그러나 기성세대에 지친 백인 청소년과 젊은 세대에게 로큰롤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로큰롤에서 척 베리(Chuck Berry), 버디 홀리(Buddy Holly),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등 많은 가수가 배출됐지만, 특히 ‘로큰롤의 황제’라 불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에 의해 엄청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당시 노래를 부르며 엉덩이와 하반신을 흥겹게 흔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춤은 지금 보기에는 흥겹기만 하지만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로큰롤은 수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음악 형식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고, 1960년대에 들어서는 블루스에서 벗어나 ‘록 음악’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사회의 현실과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전성기를 누리게 됐다.

1960년대, 격동의 역사를 온전히 투사한 록 음악
비틀즈를 모른다면 ‘록’을 논하지 말라

록 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비틀즈(The Beatles)’다. 50년대 미국은 로큰롤 스타들이 불미스럽게 은퇴하거나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며 잇따라 몰락하는 음악 침체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책과 흑인을 위한 인권운동으로 사랑받던 존.F.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사건이 발생하면서 전 미국이 충격과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

암울한 시기에 한 줄기 햇살처럼 등장한 발랄한 네 명의 영국 청년은 그들만의 개성있는 음악으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1964년 <에드 설리번 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영국 그룹 비틀즈는 미국 전역에 엄청난 열풍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미국 음반 차트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렇게 비틀즈가 미국의 음악계에 새로운 돌풍을 일으킨 사건을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한다.

이 영국 청년들이 미국인을 열광시킨 록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영국으로 들어온 미군들은 로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를 영국으로 전파했다. 이를 받아들인 영국의 음악계는 발전을 거듭하며 마침내 비틀즈와 같은 뮤지션을 탄생시켰다.

▲ 비틀즈 [사진 출처=billboard.com]


베트남 전쟁에 대한 회의가 낳은 포크 록과 사이키델릭 록
한편 이 시기 발생한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참여하면서 반전 구호를 외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록 음악의 새로운 장르들이 줄줄이 탄생했다. 그 중 하나는 밥 딜런(Bob Dylan)으로 대표되는 ‘포크 록(folk rock)’으로, 기존 어쿠스틱에 의존하던 포크 음악에 일렉트릭 사운드를 가미해 대중성을 폭발시켰다.

▲ 1960년대의 히피족 [사진 출처=homesecurity.press]

또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베트남 전쟁과 수많은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회의감을 느낀 청년들 사이에서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후 마약을 하고 환각을 탐미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향을 추구하는 ‘히피 문화’로 번져갔다. 이에 따라 록 음악의 새로운 장르,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이 탄생했다.

약물이 주는 환상의 세계를 언급하며 실험적이고 과장되고 자유분망한 스타일의 사이키델릭은 현실 도피적인 음악을 추구하며 록 음악에 ‘예술성’을 한층 올려놓는 성과를 거둔다. 거리는 꽃과 청바지, 장발의 사람들로 가득찼고 청년들은 자유와 평화, 사랑을 외치며 활보했다.

‘히피문화’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는 도어스(Doors)의 짐 모리슨(James Douglas Morrison)과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있다. 짐 모리슨은 공포와 폭력,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무절제와 광기, 환각, 초현실주의 등을 음악에 녹여냈고, 지미 헨드릭스는 신이 들린 듯한 기타 연주로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에 대한 분노를 폭발적으로 분출시켰다.

격동의 60년대 말을 장식한 ‘우드스톡 페스티벌’
격동의 역사가 소용돌이 친 60년대의 끝을 앞둔 1969년 8월 15일. 미국 뉴욕주의 베델 평원에서 ‘3Days of Pease&Music’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3일간의 음악 페스티벌이 막을 올렸다. 이 페스티벌에는 무려 30만 명 이상 참여해 입구가 부서질 만큼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몰려든 인파로 음식, 물은 물론 화장실조차 부족한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쏟아져 거대한 진흙뻘처럼 변해버린 열악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마치 놀이터를 찾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마냥 열광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록 음악의 총 집결지이자, 히피족들의 지상낙원이었기 때문이다. 
 

▲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몰려든 인파 [사진 출처=morrisonhotelgallery.com]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린 사흘 동안 사람들은 공연과 마약을 즐기며 고달픈 현실과 복잡하게 얽힌 사회문제로부터 도망쳐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총 32팀의 밴드가 무대에 올랐던 이 축제는 60년대 자유분방함과 시대정신을 지닌 록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음악사에 기록됐다. 또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거대 규모 페스티벌의 상업적 성공 전례가 되며 오늘날 록 페스티벌의 시초가 됐다.

▲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참가한 지미 헨드릭스 [사진 출처=demilked.com]


격동의 시대를 넘어, 흥(興), 망(亡)이 요동치는 록의 역사
1970년대, 하드 록과 펑크의 등장

1970년대에 들어서며 미국 사회는 서서히 안정을 원하기 시작했다. 격동했던 60년대의 역사에 지친 사람들은 록 음악에서도 서서히 사회성을 벗겨내며 음악 자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시기 록 음악은 사운드의 풍요를 맞이하며 형식미를 갖추게 된다.

70년대 록은 다양한 장르로 퍼져나갔다. 지금까지 시기와 지역적 구분으로 크게 나누던 록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특징으로 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하드록(Hard rock)’이다.

하드록은 60년대 록 음악의 파괴와 분노적인 성격이 더욱 극단적으로 치달은 형태였다. 이후 ‘헤비메탈’이라는 단어로 불리기 시작한 이 록은 지미 헨드릭스가 보여준 격렬한 기타 연주와 함께 둔중한 베이스, 현란한 드럼을 결합해 극도의 폭력과 일탈을 표현했다.

그러나 사회와 정치, 체제에 반항하는 분노가 담겼던 60년대 록 음악과 달리 이들은 분노하는 형태와 공격적인 사운드만 취할 뿐 이전의 사회성이나 정치성을 띤 메시지는 퇴색됐다. 따라서 노랫말의 의미보다는 소리로서의 보컬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하드 록의 선두주자는 영국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딥 퍼플(Deep Purple)이 있었다.

▲ 딥 퍼플 [사진 출처=mitrofm.com]
▲ 레드 제플린 [사진 출처=time.com]

한편 1977년, 영국에서 또 한번 록의 혁명이 일어났다. 바로 ‘펑크’의 바람이 분 것이다. 그들은 영국 왕실을 비꼬며 무정부주의를 지향하고, 인종주의에 맞서는 노래를 세상에 선보였다. 당시 영국은 비효율적인 경제구조로 병들어 있었다. 자본가들의 게으른 혁신과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 조건에 불만을 품고 끝없이 파업하는 노동자가 팽팽하게 대치했으며 정부의 정책은 내는 족족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영국은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까지 받는 형편이 됐다. 당시 뮤지션의 인터뷰는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려주고 있다.

당시에는 엄청났어요. 매일같이 신문과 뉴스에는 파업 소식이 들려왔고, 환경미화원들이 파업해서 길거리에 사람 키보다 높이 쓰레기가 쌓이기도 했고, 무덤 파는 인부들이 파업을 해서 시체가 줄줄이 쌓여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실업수당으로 살아갔죠.

-영화 The filth and the fury 中, 스티브 존스, 섹스 피스톨즈 기타리스트


80년대 록의 쇠퇴, 그리고 새로운 시작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24시간 내내 뮤직 비디오를 방송하는 채널 MTV의 등장은 록 음악에 위기를 가져왔다. 현장의 열기와 사운드를 중요시하는 락 음악보다 춤과 시각적인 요소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팝 음악이 득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 등 전설적인 팝스타의 등장은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는데 충분했다.

그러나 잠시 주춤하던 록에 한줄기 빛이 80년대 미국의 작은 도시 시애틀에서 번쩍였다. ‘시애틀 록’으로 불리던 이 작은 부류는 70년대의 하드록과 펑크를 결합한 듯한 특이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60년대 사이키델릭의 사운드까지 가미하며 그들만의 개성을 표출한 것이다. 특히 너바나(Nirvana)의 앨범 <Nevermind>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자 이 도시의 록에 대한 관심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전역에서는 ‘시애틀 록’과 비슷한 음악들이 퍼져갔다. 이에 음악 평론가들은 이 음악을 ‘미래의 록을 이끌 대안 세력’으로 보고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록 음악 감상해 보기♪

Bob Dylan - Like a Rolling Stone
Jimi Hendrix - Are You Experienced?
Led Zepplin - Stairway To Heaven
Nirvana <Nevermind>

 

'나침반 36.5도' 1월호 p.88~p.93
'나침반 36.5도' 1월호 p.88~p.93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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