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처 ‘콰이강의 다리’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처 ‘콰이강의 다리’
  • 김은빈 기자
  • 승인 2019.08.0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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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의 야욕에 희생된 태국, 그리고 조선인 청년들

일곱 계단에 걸쳐 쏟아지는 절경을 보여주는 에라완 폭포부터, 영화로 유명해진 ‘콰이강의 다리’까지. 태국 남서부에 위치한 '깐짜나부리' 지역은 태국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하지만 관광객 대부분이 모르고 지나치는 사실 하나가 있다. 미얀마 국경과 가까이 자리한 깐짜나부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인도 방면으로 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태국-미얀마 간 철도의 거점지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수많은 태국인, 그리고 머나먼 나라에서 일제에 의해 끌려와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던 우리 조선의 청년들의 눈물과 한이 고스란히 서려있다. 아름다운 깐짜나부리 곳곳에 남은 아직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흔을 둘러보자.

-이 기사는 <나침반 36.5도> 매거진 8월호 76p에 4p분량으로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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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희생자 낳은 죽음의 철도
1941년 12월,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그리고 이어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고 동아시아 자원지대를 확보하고자 했는데, 그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이 태국이었다.

일본의 공격에 결국 태국은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미얀마로 통하는 철도 건설을 허락했다. 미얀마 국경 가까이 접해있는 깐짜나부리 지역이 그 거점이 됐다.

일본의 계획은 1년 내에 약 415㎞에 해당하는 철도를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 1㎞에 가까운 속도로 침목을 놓고 레일을 부설하는 공사는 상식을 초월한 무리한 작업이었다. 철도 건설에는 수십만 명의 연합군 전쟁 포로와 동남아 출신의 민간인 부역자들이 동원됐다. 연합군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아시아 여러 국가의 민간인들도 동원됐다.

죽음의 철도 공사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민간인은 미얀마인으로, 일본군에 의해 태국으로 끌려가 수만 명이 사망했다. 그들은 현장에서 죽거나, 살아남았어도 돌아오지 못한 채 콰이강 인근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철도 부설을 위해 동원됐던 12만여 명의 전쟁포로와 9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어 이 철도를 ‘죽음의 철도’라고 부른다.

콰이강의 다리
콰이강의 다리는 죽음의 철도의 한 구간으로, 준공 당시 수많은 사망자를 냈던 곳이다. 콰이강 다리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다리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붕괴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철교는 전쟁이 끝난 뒤 아치형으로 복구됐다. 지금도 콰이강의 다리에서 운행되고 있는 열차를 타 볼 수 있다. 이 열차를 타 보면 사람이 곡괭이 하나만 가지고 아슬아슬한 바위 절벽을 깎아내고 철길을 뚫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콰이강의 다리에 서려 있는 조선 청년들의 슬픔
콰이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 조선인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철도공사에 동원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임무를 조선인에게 맡기고자 했다. 그래서 전쟁계획 총책임자인 내각총리는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에게 ‘연합군 포로를 감시해야 하므로 포로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원 3,000명을 군속으로 동원하라’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당시 일제는 수많은 조선 청년들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서 조선인으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제는 ‘정규 군인으로서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이 아닌 안전한 후방에서 가벼운 경비임무를 맡게 될 것이며, 매월 50엔씩 급료를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준다’라는 조건을 주는 척 속이기로 했다.

이윽고 조선 청년들에게 군속지원통지서가 도착했다. 조선 이름이 아닌 창씨개명 강행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말이다. 그 중에는 21세의 나이로 결혼한 지 1년 된 아내와 눈도 뜨지 못한 딸이 있는 청년처럼 나이 어린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타국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돌아와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부푼 기대를 안고 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철도 공사 현장은 처참했다. 일제가 내건 조건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총칼로 위협하는 일본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타국 포로를 감시하던 조선인들은 포로들의 원망을 사면서 일본군의 가혹행위까지 당하는 이중고의 설움을 겪었다.

일본의 패전 후 조선 청년들은 포로학대죄로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후략)

-이 기사의 전체 내용은 '나침반 36.5도' 8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나침반 36.5도> 8월호 해당 페이지 안내

*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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