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추천도서 100선]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서울대 추천도서 100선]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 김은빈 기자
  • 승인 2020.02.18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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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순종하게 만드는 '규율'
-얼굴없는 감시 '파놉티콘'
-보이지 않는 거애 감옥에 갇힌 현대인
▲ 필라델피아 월넛 스트리트 감옥 [사진 출처=digital.librarycompany.org]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었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이거나 광인처럼 보이겠지만, 그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이다. 그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감옥에 수감되어 감시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거대한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감옥의 역사’를 연구하고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감옥의 역사를 짚어 나가고 있지만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 책은 아니다. 또한 감옥의 역사를 근거로 현대 사회의 현실을 해석하는 책도 아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현재의 상황에 대해 진단하고, 감옥의 존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푸코는 우리 스스로가 감옥의 정체를 폭로하고, 거대한 감옥을 폭파할 수 있는 폭탄이 되기를 원했다. 대체 그가 말하는 감옥은 무엇이며, 또 어떤 감시를 받는다는 것일까?

-이 기사는 <나침반> 2월호 '인문 다이제스트'에 8p분량으로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나침반 3월호 특별판 [사전예약]
나침반 3월호 특별판 

화려한 ‘공개 처형’

사형수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처럼 비명을 질러댔는데, 고문을 당할 때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하고 외치는 그의 모습은 달리 더 묘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 말들은 제각기 수형자의 사지를 똑바로 힘껏 끌어당겼다.                -A. L. Zevaes, <국왕 살해자 다미엥>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다미엥(Robert-Francois Damiens)의 처형 장면을 묘사한 글이다. 이와 같이 근대 이전의 형벌은 마치 연극을 하듯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사형은 모든 민중이 구경할 수 있게끔 공개적인 장소에서 행해졌다. 죄인이 사형대에 오르면 스스로 유죄를 선고하며 공개 사과를 했다.

죄인에게 내려진 형벌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징적으로 활용됐는데, 살인자의 경우 손목을 절단하고, 불륜 행위를 저지른 자는 화형을 했다. 민중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도록 사형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절규를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집행이 마무리됐다.

이렇듯 신체형이 화려하게 집행된 이유에 대해 18세기 사람들은 재발 방지 측면의 경제성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미셸 푸코는 범죄자의 처형당하는 신체를 통해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화려한 의식으로 과시됐다고 보았다. 당시 법을 위반하는 것은 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편리한 사형 도구 ‘단두대’의 등장
그러나 신체형은 집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있었다. 먼저, 처형 과정에서 폭력이 재연되기 때문에 사형수 뿐 아니라 사형집행인 또한 그리 명예롭지 못했다. 또한 사형집행인의 기술이 미흡해 사형에 실패한 적도 있었다. 지위에 따라 같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형벌의 내용이 달라지는 관행도 있었다.

▲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로 참수 당하는 그림 [사진 출처=wikipedia]

이러한 맥락에서 단두대의 등장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단두대는 프랑스에서 발명된 사형 도구로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박사가 사형수의 인권을 보장하자며 설치를 주장한 바 있다. 사형수와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단시간에 끝나기 때문에 무엇보다 집행 과정이 편리해졌다.

또한 단두대는 지위에 따라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에게 평등한 사형 도구였다. 이후 1836년에는 사형수의 얼굴에 검은 베일이 씌워지기도 했다. 단두대의 등장은 여러 의미로 상징적이었다. 신체형 집행에 관해 인간성 혹은 경제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신체형’의 소멸
18세기 후반 ‘신체형’은 소멸됐다. 여기에는 민중의 역할도 컸는데, 신체형 집행에 있어 민중은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민중은 관객으로서, 처벌의 보증인으로서의 역할이 부여됐다. 그런데 이렇게 동원된 민중이 신체형 의식을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일들이 생겨난 것이다.

특히 폭동에 의한 제재로 사형선고가 내려졌을 때, 민중은 형벌받는 사람과 더욱 가깝게 느껴졌고 위협받는다 여겼기 때문에 폭동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8세기 개혁자들은 공개 처형이 민중 위협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처형 제도 폐지를 주장했다.

인간적인 형벌 vs 경제적인 형벌
개혁자들이 주장한 신체형의 폐지는 얼핏 보면 야만적이고 잔인한 형벌에서 인간적인 형벌로 가혹성이 완화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개혁자들은 아무리 흉악한 살인자라도 처벌할 때만큼은 ‘인간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푸코는 개혁자들의 주장에 대해 계몽시대에 나타난 진보적 현상의 반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형벌의 완화가 탄생한 배경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18세기 후반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됐다. 생활수준의 상승, 급격한 인구 증가, 부와 재산의 다양화와 더불어 범죄의 내용 또한 바뀌었다. 유혈의 범죄보다 사기 범죄가 급증했다. 또한 극빈자들의 생계를 보장해주던 권리가 새로운 법에 의해서 재산에 대한 위법 행위로 바뀌는 일이 늘어났다.

그로 인해 부르주아들의 소유권 문제가 중요해지면서 치안상의 감시가 더욱 강화됐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발전이 활성화된 지역일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는 위법행위의 구분이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재구성됐음을 보여준다.

처벌의 목표, ‘신체’에서 ‘정신’으로
푸코는 사회적인 맥락을 통해 형벌이 완화됐다기보다는 ‘처벌 목표’가 변경됐음을 포착한다. 바로 형벌이 가해지는 대상이 ‘신체’에서 ‘정신’으로 전이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재판관은 범죄에 대한 재판 외에 ‘범죄의 원인’을 파헤치게 됐다. 재판관은 범죄자의 환경, 사회 부적응의 요인, 유전 등 범죄자의 배경에 집중했다. 또한 범죄자의 범죄 욕망에 대해 재판함으로써, 범죄의 처벌보다 교정의 가능성을 중요시했다.

이에 따라 형벌은 ‘경제적 처벌’에 초점이 맞춰졌다. 형벌제도는 범죄의 내용에 따라 형을 더 무겁게 내리는 등 세밀하게 짜여졌다. 또한 범죄와 처벌 사이의 관계가 최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도록 구성됐다. 예를 들어, 누군가 범죄를 저지를 때 형벌을 머릿속에 떠올리도록 만들고, 범죄의 유혹을 떨칠 만큼 형벌이 두려운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신체형의 빈자리에 새로운 형벌을 제안했다. 바로 ‘공공 토목 사업’이다. 수형자들이 공공 토목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노동에 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수형자가 노동하는 것을 보며 시민들은 교육을 받게 된다. 과거 국왕의 소유였던 수형자의 신체는 점차 사회적이고 집단적이며, 사회의 유익한 소유물로서의 의미로 전이됐다.

‘지식의 도구’로서 감옥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징벌의 형태인 ‘감옥’은 당시 형벌제도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었다. 개혁자들은 형벌로서의 구금형에 대한 발상을 비판했는데, 공공 토목 사업처럼 일반 대중에 대한 효과가 결여돼 있고, 비용도 들며, 사회에도 무익하다는 이유다. 또한 여러 가지 범죄의 개별성에 대응되지 않고, 수형자들을 나태한 상태로 지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년도 되지 않아 구금형이 징벌의 본질적인 형태가 되었다. 이는 고전주의 시대에 이미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등에서 모범사례로 평가되는 ‘교정 시설’ 같은 감옥 모델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과 같은 처벌 기관의 기본적 지침은 수감자의 신체와 정신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이었다.

▲ 네덜란드 라스푸이 감옥의 수형자들이 노동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wikipedia]

엄격한 일과시간, 체계적인 의무조항, 빈틈없는 감시 등이 수형자의 일상을 규제했다. 또한 수형자들은 공동 작업 노동을 의무적으로 수행하며 교육적으로 ‘개조’ 받아야 했다.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형태의 징벌이 아닌 수감자들에게 ‘훈련’을 시키는 형태의 징벌이 등장한 것이다.

많은 감옥들 중 미국 필라델피아의 월넛 스트리트 감옥에는 이곳만의 차별화된 특징이 있었다. 감독관(도시에서 지정된 12명의 저명인사)들은 수감자가 감옥에 들어오면 감옥의 규칙을 읽어주며 도덕적 의무를 주입시키려 노력하고 매주 감옥을 방문하며 수감자의 품행을 평가했다.

주목할 점은 수감자가 저지른 범죄는 참고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이 숨기고 있거나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잠재적 위험에 주시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푸코는 감옥이 지식의 도구로서 작용한다고 보았다. 단두대처럼 단순한 형벌 기구로서의 도구가 아닌, 수감자의 행동을 살피며 생산한 지식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개조한다는 점에 집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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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순종하게 만드는 '규율'
사회에서 감옥이 죄인을 교정하는 중심적인 처벌 기관으로 자리 잡고, 구금형이 일반화됨으로써 이제 형벌의 적용 지점은 신체와 정신이 됐다. 18세기 갑자기 늘어난 인구 탓에 사회는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대규모 공장들은 최대 이익을 내기 위해 생산력에 집중했고, 이를 위해 신체를 통제하는 방법인 ‘규율’이 필요했다. 그렇게 규율은 서열 나누기, 시간표, 시험, 상벌제도 등과 같은 기술을 통해 개개인을 규범화시켰다.

규율 기술의 목적은 반항적인 신체를 복종하는 신체로, 비효율적 신체를 효율적 신체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개인의 신체는 순종되고, 복종되고, 순응하고, 만들어진다. 신체의 효용성을 강제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규율의 기술이 권력 지배의 일반적인 방식이 됐다고 말한다.

얼굴 없는 감시 ‘파놉티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은 급증하는 인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감옥 원리를 고안했다. 그 결실이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감옥 건축 양식이다. ‘모두’를 뜻하는 그리스어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것으로, 단 하나의 시선만으로 모든 것을 영구히 볼 수 있는 ‘감시 장치’라는 뜻이다.

벤담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경제적인 감시 체계에 대해 고민했다. 이를 위해 감시자가 1명 혹은 0명일지라도 수백 명의 죄수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파놉티콘을 만든 것이다.

▲ 파놉티콘 설계도 [사진 출처=wikipedia]

파놉티콘은 이중 원형 건물이다. 원형 감옥의 중심에는 높은 원형의 감시탑이 있고, 다른 원 둘레에는 한 사람씩 감금된 독방들이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감시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감시받는 사람들은 감시자를 전혀 볼 수 없도록 건축됐다는 점이다.

죄수는 감시자를 볼 때 역광에 의해 언제나 중앙 탑을 환하게만 보도록 되어있다. 대신 1명의 감시자는 앉아서 수백 명을 감시할 수 있다.

파놉티콘 구조에서 수감자는 중앙 탑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감시자가 보이지는 않는다. ‘바라봄’과 ‘보임’의 결합이 분리된 것이다. 이로써 수감자는 자신이 언제 누구에게 감시를 당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디서 나를 지켜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수감자는 스스로 규율을 따르고 권력관계를 내면화시키게 된다.

이를 통해 더 이상 군대도, 물리적 폭력이나 물질적 제약도 필요 없어졌다. 파놉티콘은 감시자 없이도 권력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감시 장치로서의 건축물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 감옥에 갇힌 현대인
푸코는 현대의 권력이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 구조와 닮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늘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규율에 맞게 행동을 제어한다. 푸코는 이를 ‘미시 물리학(microphysique)’이라고 명명한다.

미시 물리학이란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발생해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사소한 모든 행동에는 권력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려다가 주머니에 넣는 행동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쓰레기를 버릴 때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본다면, 자신을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할까 봐 행동을 통제하게 된다. 이와 같이 누군가 나를 지켜볼 수 있다는 의식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벤담의 파놉티콘 체제는 중앙의 감시탑이 고정돼 있는 반면, 현대 사회의 전자 감시체계는 중앙이 분산되어 있고 이동한다. 특히 CCTV나 스마트폰은 매일 나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누군가에게 전송한다.

푸코는 “현대 사회의 권력은 감시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형벌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범죄자의 죄에 대한 보복으로 신체를 처벌했다면 현대의 형벌은 나의 의식과 영혼까지도 조정한다. 마치 우리가 거대한 감옥 속에서 감시를 받는 데도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 <나침반> 2월호 해당 페이지 안내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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