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주인인 정치 ‘민주주의’ 
-4·19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요? 
-국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다!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 [사진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 19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민중이 최초로 독재 정권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4·19 혁명’일이에요. 우리 국민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러한 혁명을 했던 걸까요? 

-이 기사는 <톡톡> 4월호 'STUDY UP!'에 4p분량으로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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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주인인 정치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반장이 뽑히면, 반장은 학급 회의를 주도해 반 친구들과 함께 우리 반의 일을 정하고 이끌어 나가요. 그런데 만약 반장이 친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반장에게 불만을 갖겠죠? 우리가 이렇게 제멋대로인 반장에게 불편한 심정을 갖는 이유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돼 국민을 위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걸 말해요.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정치, 즉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바로 그것이죠. 

‘국민의 정치’는 나라의 주인이 왕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바로 국민이란 뜻이에요. ‘국민에 의한 정치’는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해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나랏일이 국민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죠. 

오늘날 민주주의를 채택한 많은 나라에선 여성과 남성,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똑같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과거 민주주의에서는 여성과 노동자, 농민 같은 사람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얻기 위해 모두가 피 흘려 싸웠죠. 

또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도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국민을 무시하고 멋대로 정치를 하는 독재국가가 될 수도 있어요. 이런 나라에서는 독재자와 독재자 주변 사람들만 특별대우를 받고, 국민들은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표현할 자유도 누리지 못하는 불평등함을 겪어요. 

4·19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요? 

| 원인 1 | 1952년, 1954년 이승만 독재 위해 ‘2번 개헌’
1950년대는 ‘6·25 전쟁(1950~1953)’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농촌은 황폐했고 도시 빈민이 급증할 때였어요. 하지만 경제가 어려워 국민의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던 이때,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의 야욕에 눈이 멀어 무려 12년 동안 독재 정치를 했답니다. 

이승만은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헌법을 2번이나 무리하게 고쳤어요. 독재 정치에 대한 불만과 어려운 생활 형편 때문에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매우 높아진 상태였어요. 이와 동시에 마음 속 혁명의 불씨가 서서히 타오르게 됐죠. 

1. 발췌개헌

*국회를 통과한 발췌개헌안에 서명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 출처=대통령기록관] 

발췌개헌은 1952년 7월 선포된 대한민국 첫 번째 개헌이에요. 사실상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목적으로 실시된 개헌이죠. 이승만은 개헌을 위해 195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력배를 동원해 강제로 야당 국회의원들을 연행, 구속하는 등 무력과 술수를 동원, 반강제적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2. 사사오입개헌
사사오입개헌은 1954년 11월 선포된 제2차 개헌이에요. ‘초대 대통령에 한한 3선 제한 철폐’ 등의 내용이 담겨있는, 독재를 위한 개헌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4년 임기 동안 1번만 중복으로 임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1, 2대 대통령을 연달아 8년간 한 이승만은 법적으로 3번째, 3대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 없었어요.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을 방해하는 이 헌법을 고치기로 마음먹고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법안을 국회에 올렸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려면 당시 국회의원 203명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했어요. 수학으로 계산해 보면 135.333…명이 나오기 때문에 135명보다는 많은 136명의 찬성표가 필요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개표 결과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고, 딱 1표가 모자라 법안이 통과되지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승만과 그가 속해있던 자유당은 독재 정치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0.33…명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넷 이하는 버리고, 다섯은 올리는 반올림’ 즉,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어이없는 논리를 적용시킨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반도 안 되는 소수점 이하 0.33…을 삭제해 찬성에 필요한 인원을 135명으로 해석하고 부결을 번복하고 개헌의 가결을 선포합니다. 

| 원인 2 | “투표함을 바꿔치기 했다고?” 1960년 3·15 부정선거 발생 
권력 욕심이 극에 달한 이승만은 선거 분위기가 안 좋게 돌아가자, 급기야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날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벌입니다. 

선거일 이전에 투표하게 하거나, 투표함을 미리 찍어 놓은 표가 있는 것으로 바꿔치기 하고, 득표수를 조작 발표하는 등 지금 보면 있을 수 없는 갖가지 방법을 사용해 불법 선거를 저질렀죠. 

이미 대통령에 대한 마음이 떠나버린 시민과 학생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분노한 국민은 ‘선거 무효’와 ‘자유당 정부는 물러가라’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월 10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약 한 달 만에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채 발견됐는데요. 그의 눈에 최루탄이 박혀있었고, 이것이 경찰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버립니다. 

학생과 시민의 격렬한 시위에 맞서 이승만 정부는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해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고문을 가했어요. 이런 과정에서 13살 초등학생도 총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위대는 정권의 무력행사에도 굽히지 않고 규모가 전국으로 번졌어요. 국민들의 맹렬한 투쟁과 저항으로 이승만은 결국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미국으로 망명해 버립니다. 

국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다! 
4·19 혁명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처음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됐으나 점차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국민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했고, 결국 국민들의 힘으로 부패한 독재 정부를 무너뜨려 민주주의를 되찾았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민주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 스스로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며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공권력을 가지고 횡포한 사람들에 맞서 국민이 승리하면서,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입증해낸 것입니다. 

이처럼 불의에 저항하는 시민정신은, 이후에 일어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국정농단 대통령하야 촛불집회로까지 이어져 올 수 있도록,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을 마련해 사회 모순 해결의 정신적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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