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역사 이야기
-분단에 기생하는 식민사학과 언론

사진;이덕일역사tv
사진;이덕일역사tv

낙랑군과 낙랑국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구분해서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름이 같기 때문에 헷갈리는 경우도 있었으며 가끔씩 나오는 언론 기사들도 일반 시민을 헷갈리게 하는 기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낙랑이라고 하면 한나라 한사군 중심이었던 낙랑군을 생각한다. 주로 그 낙랑군을 배우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료에 의하면 한나라 군현이었던 한나라 행정구역 낙랑군(허베이성 루룽현)이 있고,  '최 리'라는 사람이 왕으로 있었던 평양에 있었던 낙랑국이 나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의 주무대이다. 최씨도 김이박 성씨처럼 많이 있는 최씨도 왕가가 되는 셈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낙랑을 둘로 나누었다. 북낙랑과 남낙랑, 북낙랑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으로써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해서 북쪽이라고 하고 남낙랑은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고 해서 남낙랑이라고 했다.

단재가 당대의 모든 역사 사료를 대부분 다 외울 정도로 천재이셨던 모양이다. 감옥에서 조선상고사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사료도 없는 감옥에서  머릿속에 외군 것 가지고 쓴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천재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해방 이후 북한이 다시 역사를 서술할 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두 사람이 이두학자이기도 하고 역사학자이기도 한 약연 김두봉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 이 두 분이라고 알려진다. 

반면 남한에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산하에 한국학진흥사업단이 있다. 1년 예산만 300억이 넘는다. 이 자리는 남한 강단사학계에서 주류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가는 자리이다. 이덕일 소장은 "바로 이 사업단장이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한국의 역사학계가 얼마나 식민사학에 물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역사학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했다. 조선총독부 일본 극우파들이 갖고 있는 단재 신채호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일반 국민들은 단재 신채호 선생은 대단히 존경하는데 역사학자들이라면 더 존경해야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식민사학자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말로는 단재 신채호 선생을 존경한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학문분야로 들어가면 단재 선생을 비난하기 바쁜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은 “이 낙랑을 이렇게 낙랑군과 낙랑국으로 분류한 것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혜안이 돋보인다”고 평가한다. 지금은 낙랑군이 요동반도가 아니라 하북성에 있었다라는 중국 사료들도 나오고 있다.

다시 낙랑이야기로 돌아가서 낙랑이야기라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 호동왕자가 낙랑왕 최리를 만난다. 낙랑왕 최리가 “그대는 북극신왕의 아들이 아니냐?”고 묻는 것으로 봐서 낙랑국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낙랑에는 북, 고각, 나팔 같은 것이 있었는데 적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울린다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자명고라고 불렀다. 적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울리기 때문에 낙랑국에서는 적의 침입을 사전에 알게 되어 대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 사귀면서 북과 호각을 가져다 없애라고 했고 사랑에 빠진 낙랑공주가 북과 고각을 없앴다. 그 후에 고구려가 쳐들어왔는데 북과 고각이 울리지 않으니까 고구려 군사가 성 아래까지 온 다음에야 낙랑왕 최리가 알게 됐다.

결국 왕은 낙랑공주를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했다는 것이 바로 자명고 이야기이고 이것이 수많은 영화나 연극이나 소설의 소재가 됐다.

사실 호동 왕자는 고구려 유리왕의 아들 3대왕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첫째 부인에게도 해우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호동보다 나이가 아주 어렸지만 적통이 아니었던 호동은 큰 공을 세우지 않고서야 왕이 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남쪽의 풍족한 나라 낙랑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에 호동은 낙랑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쯤 되면 짐작이 가지 않는가? 그렇다.

권력 투쟁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왕위에 오르고 싶었던 호동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낙랑의 공주에게 접근하여 결혼했고 자신과 사랑에 빠진 공주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편을 보자.
여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 최리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알려서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병력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아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력이 갑자기 성 밑에 도달한 연후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을 멸하려고 청혼을 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고,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병기와 기물을 부수게 하였다.”고 한다.

낙랑공주에겐 사랑을 강요하고, 호동왕자는 스스로 죽음을 강요받다.
어쨌거나 낙랑을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운 호동 왕자는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왕위는 첫째 왕비의 아들에게 돌아갔다. 왕위를 노렸던 왕자는 죽어야 하는 것이 운명이다. 호동이 태자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웠던 첫째 왕비는 왕에게 호동이 자신을 예로서 대하지 않으며 음란한 짓을 하려는 것 같다고 참소하였고 누명을 쓴 호동은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호동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왕의 손녀에게서 태어났다. 얼굴이 아름답고 고와 왕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던 까닭에 호동이라 이름을 지었다. (호동이) 대를 이을 자리를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첫째 왕비가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란한 짓을 행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아이라고 미워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왕비가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청컨대 대왕께서 몰래 살펴보시고, 만일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죽을죄를 진 것으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장차 죄를 주려고 하였다. 혹자는 호동에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하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내가 만일 해명을 하면 이는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하고, 곧 칼에 엎드려 죽었다.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그렇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낙랑군이었으면 그 낙랑군을 다스리는 사람의 지위는 낙랑태수가 돼야 한다. 삼국사기는 분명 낙랑왕 최리라고 나온다. 그리고 실제로 낙랑국 가지고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낙랑이라는 말이 같으니까 낙랑이 마치 한나라 낙랑군인 것처럼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심지어 북한에서 해방이후의 평양을 비롯한 옛날 낙랑국 지역 일대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무려 3천기 이상의 무덤을 발굴했는데 북한 역사학자 리진순은 그의 책에서 “3천기 이상의 고대 무덤을 발굴했는데 한나라 것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썼다.

사진;이덕일역사tv
사진;이덕일역사tv;이 세사람은 젊은 식민사학자들로 이름이 높으며 앞으로도 많이 거론됨. 

이것은 전부 다 만조선, 북한은 위만조선을 만조선이라고 하는데 만조선의 후예들이 남긴 우리 고조선 전통의 무덤이라고 발표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안정준(현재 서울시립대 교수)이 “북한도 3천기 이상을 발굴한 결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한다”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을 했다.

사진;이덕일역사tv
사진;이덕일역사tv

 

게다가 일본 특파원을 지냈던 한겨레21편집장인 길윤형도 단군을 엄청나게 비판하면서 권두언에 “북한 학자들도 낙랑군은 평양에 있다고 주장한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 사례에서 보여지듯 해방이후에 70년 이상 지나도록 식민사학이 유지되는 이유는 "식민사학이 주장하고 언론이 다시 주장하는 식의 ‘식민사학과 언론과의 카르텔’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식민사학은 분단사학, 남북의 분단에 기생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분단 사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덕일 소장은 "민족사학자들이 중국에 흘러나온 북한에서 저술된 책들을 보지 않았으면 일반 국민들도 북한 학자들도 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한다고 알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라고 말한다.

이 사례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분단사학은 식민사학이 거짓말하는 것을 끊임없이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일반 시민이 나서서 식민사학자들과 언론을 감시하고 분단사학을 해체시켜야 한다. 식민사학자들과 언론들의 카르텔은 진보이고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진보가 되고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보수가 되는 그들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깨어있는 시민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식민사학자들이 써 준 것을 달달 외우고 말 것인가. 깨어있는 시민이 이긴다에 한 표 건다. 한민족은 그런 더러운 것을 못보는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완성해가는 나라, 그 안에는 깨어있는 시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식민사학자들과 언론사들의 카르텔의 행태를 보면 겉으로는 민족을 내세우고 독립운동가들을 치켜세우는 듯이 하지만 실제로 내용을 들어가보면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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