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사실도 거부하는 식민사학자 국가기관에서 배제해야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뇌피셜로 주장하는 식민사학자 연구비 활동에서 배제해야

사진;이덕일역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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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는 수수께끼의 역사처럼 보인다. 진짜 수수께끼가 아니라 남한, 북한, 일본, 중국 특히 그중에서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역사적 사료와 유물도 인정을 안 하니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 수수께끼의 핵심은 이들 나라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 시작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역사적 사료를 보면 우리나라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사료들에서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 백제, 가야 이런 나라들도 다 출발은 대륙에서 한 것이라는 것은 종합적사고력만 있다면 누구나 유추가 가능하다.

그런데 소위 일본 식민사관을 따르는 대다수 대학교수들은 전부 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반도사관에 파묻혀서 신라, 백제, 가야가 한반도 밖에서 있었다고 말하면 죽이려고 달려든다.

그러면서 새롭게 만든 논리가 “고대사를 찬란하게 한다고 우리나라가 그렇게 되는 것이냐”는 논리를 만들어 설파하고 있다.

실제로 역사적 사료에는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나 백제도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다. ‘없던 사료를 조작해서 대륙에 있었다’라고 하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있는 사료만으로도 충분히 신라와 백제도 대륙에도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한데 그것조차도 거부하는 것은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어떤 학문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민족사학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민족사학자들은 이런 사료들을 제대로 분석해서 "우리 고대사의 상, 진짜 상이 무엇인지를 다시 만들어보자"고 한결같이 요구하고 있지만 식민사관의 맥을 잇는 대학교수들은 거부하고 민족사학자들을 그들이 잘 이용하는 언론에 대고 비판하기 바쁘다. 식민사학자들이 절대다수인 대학교수들은 이 사람들은 아직도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우리 역사를 반도사관의 틀에 넣어서 왜곡하기 때문이다.

신라가 처음에 경주에서 출발해서 그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중국 사료들이 많은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중국에서 신라왕에게 어떤 직위를 내려 줄 때 가장 많이 내려주는 것이 ‘낙랑군공신라왕’이라는 작위이다. 여기에 느닷없이 낙랑이 들어간다. 우리는 이렇게 들어간 이유를 유추하고 관련 자료를 분석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낙랑, 한사군의 낙랑이 대륙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북한학계는 낙랑이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보고, 남한의 민족사학계는 화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보고, 식민사학계는 낙랑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본다.

설사 낙랑을 식민사학계들인 대학교수들이 말하는 평양이라고 할지라도(유추, 분석, 종합적사고, 비판적사고) 경상도에 있는 신라왕에게 낙랑군공이라는 직위를 내려줬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중국에 북사나 북제서가 수서, 구당서 이런 여러 책에는 신라의 위치에 대해서 “신라는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 때 낙랑 땅에 신라가 있었다.”고 써있다. 구당서에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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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식민사학의 입장대로 낙랑을 평양이라고 할지라도 신라가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신라의 주요 유적이 경상도 경주에 있지 평양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대다수의 식민사학 대학교수들은 상식에 반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 중국에 한 개의 사료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중국 역사서 여러 곳에 북사, 북제서, 수서, 구당사 등 이런 정사들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 때 낙랑군에 있던 곳에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면 낙랑은 대륙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실제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가 초기 박혁거세 때부터 낙랑과 갈등을 겪는 기사들이 여러 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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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 있었던 낙랑과 경상도 지역에 있던 신라가 갈등을 겪을 이유가 없다. 또한 경주에서 발굴되는 AD 1세기의 유물을 생각해보면 신라도 대륙과 경주 양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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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남한학계 일부가 대륙 신라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도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반도에는 있지 않고 대륙에만 있었다고 주장하니까 앞뒤가 맞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그들 주장이 맞다면 신라의 많은 유적들이 경주에서 나오는데 특히 AD 1세기 무렵의 유적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 유적 유물을 설명하기가 어렵게 된다.

결국 이 부분은 어떤 정치 집단이 이주할 때는 나라 전체가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서 일부는 남고, 일부는 이주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신라가 대륙에서 출발해서 일부는 경상도쪽으로 이주를 했고, 일부는 대륙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기록에 “옛날 한나라 때 낙랑 땅에 있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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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문제가 신라의 건국시기 문제이다. 이 건국시기 문제를 따져보면 한국 역사학계는 진짜 답답한 학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신라는 BC 57년에 건국했다고 나온다. 실제로 낙동강 유역이나 경주 지역에 가보면 BC1세기 때 유적 유물이 출토가 되고 있다. 그러면 삼국사기, 삼국유사라는 문헌기록과 고고학 유적유물을 가지고 신라는 BC 1세기 때 건국했다고 해도 시비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일본인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유독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가짜라고 주장한다. 주장하는 것에 그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것이 학교 교육에도 들어가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역사학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학생들의 정신도 갉아먹고 있는 것이라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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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덕일역사tv;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도 같은 집단이다. 이러니 역사가 바로 설 수 없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라가 고대부터 강국이었으면 신라 옆 가야를 야마토왜가 369년에 점령해서 562년까지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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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그 임나라는 말이 전혀 안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가야 관련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만약 야마토왜가 369년부터 562년까지 가야를 점령하고 그 지역에 임나를 설치해서 200년 동안 다스렸다면 임나와 신라 관련 기록이 삼국사기에 반드시 실려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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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줄도 안 나오니까 일본인들이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이것은 가짜다”라고 주장하고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그것을 그대로 추종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가짜라고 몰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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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덕일역사tv;역사편찬위원회의 안드로메다급 설명

이러다 보니 신라가 언제 건국했냐고 하면 남한 식민사학자들의 아버지이자 이완용의 조카이고 지금은 사망한 이병도가 17대 내물왕 때 건국했다고 주장했다. 17대 내물왕은 재위 연대가 356년에서 402년이다. 그러니까 신라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야 건국이 돼야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BC 57년 보다 무려 400년 이상 건국시기를 늦춰 놓은  것이다. 그나마 이병도가 이렇게 주장한 것은 일본인 역사학자 쓰다소키치가 주장한 것보다는 1백여 년 끌어 올린 것이다. 쓰다소키지는 19대 늘지왕 때 신라가 건국했다고 주장했는데 눌지왕은 재위연대가 417년에서 458년까지이다. 쓰사소키치의 주장을 따르면 신라는 5세기 초중반에 건국한 게 된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논리가 역사학계에 횡횡하고 있고 한국의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2000년도 무렵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라는 게 있어서 한국학자들과 일본 학자들과 공동으로 역사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일본이 자꾸 역사왜곡을 하니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수상에게 제의해서 두 나라가 공동으로 역사연구를 해보자고 해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참석한 학자들이 신라의 건국에 대해서 쓰다소키치 학설을 따라서 눌지왕 때 건국한 것으로 다시 백년을 후퇴시켜 놓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식민사학이 안타까워 진행한 프로젝트를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에 충성하고만 오고야 만 셈이 돼 버렸다. 대통령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역사학계는 국민이 나서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셈이다.

자신들의 스승인 이병도 마저 제치고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인 쓰다소키치를 따라가 버린 게 현재의 대학교수들이다. 이들 대학교수들은 이병도는 일본제국주의 사학의 한국 지사장인데 본사 이사에게 바로 들러붙어 버린 셈이다. 둘다 고인이지만 본사에서는 아직도 받을게 남은 모양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다. 

지사장이 본사에서 눌지왕 때 건국했다는 것을 지사장이 자기마음대로 백년을 끌어올렸다고 나무란 꼴이다. 물론 이병도가 살아있었을 때는 꼼짝도 못했겠지만 이병도가 죽으니까 자신들의 스승은 이제 쓰다소키치라고 외친 셈이다.

역사학에서 어떤 것이 조작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런 주장을 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어느 왕 몇 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그럼 그것이 가짜라는 다른 사료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제시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총체적으로 다 가짜라고 주장하고 교과서에 실린다면 문제가 있어도 보통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현재까지 주류로 통용되고 있으니 대한민국이 한심해지는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이 부분은 전세계 사학계의 미스테리이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실 인류역사상 이런 근거도 없는 뇌피셜을 미래세대가 배우는 교과서에 그대로 실리고 있다면 이보다 커다란 문제는 없다. 이 소장은 "하지만 이들 대학교수들은 진보가 정권을 잡아도 보수가 정권을 잡아도 한국의 주류로 거듭난다. 워낙 많은 숫자이다 보니 그 나물에 그 나물이 되고 만다."며 한국 역사학계의 실상을 알렸다.

한편 북한은 두 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인 역사 편찬 사업을 했다. 1979년도에 조선전사란 책을 만들어 신라가 2세기 초중엽에 건국했다고 해서 일부 삼국사기 불신론을 인정했다. 그러다가 2011년에 조선단대사라는 방대한 책을 냈다.  단대사라는 것은 대수로 끊는다는 의미인데, 신라사 따로 백제사 따로 서술한 책인데, 조선단대사에는 신라가 1세기 초에 건국했다고 많이 끌어올렸다. 이것은 북한이 삼국사기를 대폭 인정하는 것으로 선회를 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혁거세 30년, 서기전 28년에 낙랑사람들이 신라를 침공하려다 하다 보니까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데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것을 보고 이런 나라를 침공하는 것이 부끄럽다라고 생각해서 그냥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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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덕일역사tv;삼국사기에 이런 식으로 기록돼 있는데도 가짜라고 우기는 식민사관 대학교수와 국가기관들

이런 기사는 사실 실체가 없는 기록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실체없는 기사들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일부 들어있다. 이런 부분들은 김부식이 신라 정통론을 주장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신라의 건국 연대를 BC 37년이라는 고구려와 BC 18년이라는 백제보다 앞에 두기 위해서 고구려와 백제 건국 연대를 일부 조정했다고 봐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이렇게 역사 해석이라는 것은 사료 자체도 엄밀하게 따지지만, 해석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하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어떤 기록을 가짜라고 말하려면 그것을 대체할만한 완벽한 다른 사료가 있을 때 가능하다.

만약 삼국사기의 신라사 관련 기록들을 가짜라고 하려면 그 사건들이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다른 사료를 제시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것은 전혀 제시하지 않으면서 그냥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당연히 이들 주장이 일제가 주장했던 것처럼 똑 같이 뇌피셜로 주장하고 있으니 대학 교수들이 식민사관을 따르는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10대 왕 내해 이사금 때가 서기 196년에서 230년 경 사이에 신라가 가야를 제외한 경상남북도 거의 전역을 차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어느 왕 몇 년에 어디를 정복하고 아주 구체적으로 써놨기 때문에 이것을 부인하려면 또 다른 구체적인 사료를 제시해야 된다. 이게 학문하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이런 삼국사기를 부인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라는 10대 내해 이사금 때는 가야를 제외한 경상남북도 거의 전역을 다 차지한 고대 강국으로 발돋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은 삼국사기를 인정하면 임나일본부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가짜로 몰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문제는 한국의 역사학과 교수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태두 한국 역사학계의 패륜아 이병도를(해방 이후 독립할 수 있었으면서 식민사학을 한국인에게 이식하는 시점) 뛰어넘어 일본 극우 역사학계에 기생하는 학문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을 대학 강단에서 퇴출시킬 수도 없다.  대학교수직은 보장받은 직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좋은 뜻으로 만들어 놓은 위원회 같은 것들을 일본이나 중국 역사학자들의 입장보다 더 일본적이고 더 중국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한국 역사 교수들의 문제는 더 이상 역사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문제는 역사학계가 풀어야 하는 문제라고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이기때문에 민족사학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힘이 부족하다. 시민들의 힘이 필요하다.

국회이든, 교육부이든 역사학에 연구비를 투자해도 모두 식민사학자들의 몫이다. 이제 그들에게 연구비가 들어가는 것을 차단해야만 한다. 이들은 국민들이 세금으로 만들어 낸 연구비로 한국사를 일본사나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사회악이 돼버렸다. 

국회의원들이 나서고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식민사관 대학교수들을 국가에서 투입하는 역사연구에서 배제시켜야 한다. 당장 한국학과 관련된 모든 정부 관련 부처에서도 이들을 배제시켜야 한다. 이들은 정상적인 집단이 아니다. 그래야 우리 역사를 찾을 수 있다.

언론사들도 마찬가지다. 알든 모르든 식민사학과 대학교수들을 언론 기사로 도배해주는 기자들도 국민들이 감시해야 한다. 그들을 인터뷰해주고 그들의 가치를 살려주는 기자라면 정상적인 기자가 아니다. 그 기자가 무지해서 했다고 해도 그는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셈이다. 그는 한국을 재식민지화시키려는 일본 극우 사사카와재단의 장학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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