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한국통사] 일본열도 백제와 대륙백제, 반도백제 이야기 1편

사진: 이덕일 역사tv ; 위나라와 백제
사진: 이덕일 역사tv ; 위나라와 백제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과거라고 생각할 때 역사만 멈춰있는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위대하고 찬란한 역사를 비좁디 좁은 반도에 묶여 살라고 만들어 낸 일제 조선총독부의 조선반도사관에 갇혀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게 나둬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강대국에 끼인 약소국의 설움을 얘기하고 그것이 진실인양 포장하며 언제나 바람 앞의 흔들리는 촛불로 빗대며 대한민국을 얘기한다. 하지만 역사를 제대로 알면 그런 생각과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현재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의 틀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가 되면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책의 원서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과거처럼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는 시대가 지났다. 찾으려면 얼마든지 정보를 찾아 습득하고 공유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 식민사관을 뿌리채 뽑아버려야 한다.

또 하나 이들 식민사관에 기반한 대학교수들 역시 대학 강단에서 서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그들이 각종 국가사업에서 배제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대륙백제에 대해서 삼국사기(1143년 고려 인종 때)의 저자 김부식은 대륙백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해 놓았다. 김부식이 서술한 백제는 하남 위례성에서 출발해서 웅진으로 천도했다가 사비성에서 망한 그 백제만 서술했다. 백제는 대륙에도 있었고 반도에도 있었고 일본 열도에도 있었던 그런 광대한 해양제국이지만 김부식은 이중에서 반도백제만 주로 기술해놓았다. 

물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반도백제만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대륙 백제’에 대한 내용도 두 군데나 나온다. 먼저 대륙백제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동성왕 서기 488년에 백제가 위나라 군사와 싸웠다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위가 침입하다.(488년 음)10년에 위나라가 침공하였으니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 대해서 식민사관 대학 교수들의 태두 이병도는 위나라 군사가 배를 타고 충청도까지 와서 싸웠을 것이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위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중국 중심부에 있어 충청도 백제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데 있다.

기마민족인 선비족 모용씨는 고구려와 서로 말이 통했다고 중국 방언이란 책에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로 고구려와 상당히 가까운 같은 민족이다. 다시 말해 우리와 같은 겨레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왕이 491년 서거하자, 효문제는 천자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애도의 정을 보였다.”고도 나온다.

중국에서는 선비족이 세운 위나라와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있어 선비족이 세운 위나라를 북위라고 하고, 조조가 세운 나라를 위나라라고 부른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나중에 낙양까지 차지해서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북위는 초기에는 하북성과 지금의 산서성 일대를 차지했다가 나중에는 허난성까지 차지하는 강국이 된다. 그런데 이 기마민족이 배를 타고 충청도까지 와서 백제와 싸웠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식민사관의 태두 이병도는 어이없게도 배타고 와서 충청도까지 와서 싸웠다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서기 392년에 중국의 남제서 기록을 보면 위나라 기병 수십만이 백제를 공격했다고 나온다. 기병이란 말을 탄 군사들이다. 이 말을 탄 군사 수십만이 배를 타고 충청도까지 오려면 그 배를 몇 만 척을 건조해야 한다. 그러니까 위나라 군사들이 배를 타고 충청도에 와서 싸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설에 가깝다.

역사는 추측과 그 당시 상식에 기반해야 한다. 지금처럼 수십만 톤의 배를 건조할 수 있는 시대라도 어려운 일을 이병도는 그렇게 주석을 달았고 식민사학자들인 대학교수들은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식민사관 학자들이 그들의 지식이 상식에 기반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 싸움의 장소는 옆 나라하고 싸우기도 바쁜 시대였다. 그런 북위가 배타고 싸웠을 리는 만무하고 싸움의 장소가 지금의 하북성 일대나 그 근처로 보는 게 타당한 해석이다.

사진: 이덕일 역사tv
사진: 이덕일 역사tv

이외에도 김부식은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보낸 편지가 나온다. 그 편지 내용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중국 공격에 대해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의 지역을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나라를 그르친 것도 요동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이다.

최치원은 고구려와 백제 군사가 100만이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 군사가 흔든 지역이 오월, 지금의 중국 남쪽의 양자강 유역하고 북쪽으로는 유연제노라는 곳이다. 유는 유주를 뜻하는데 지금의 북경이다. 연나라가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북방에 있었던 나라이고, 제나라와 노나라는 전부 다 산동반도에 있었던 나라였다. 노나라는 공자의 출생지다.

김부식은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것이다. 당나라 태사시중이란 지금의 총리에 해당한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급제했던 국제적인 지식인이다. 그런 국제적 지식인이 신라에 가서 당나라 총리에게 고구려와 백제가 한때는 군사가 100만이어서 남쪽으로는 양자강 유역을 흔들고 북쪽으로는 지금의 북경과 산동반도 지역을 흔들었다는 내용을 보냈다는 것은 과거의 일을 상기하는 내용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최치원은 당나라 총리인 태사시중에게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보낸 미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태사시중이 그런 편지를 받을 리도 없다.  게다가 그런 미친 사람의 말을 인용할 만큼 삼국사기가 허술한 책도 아니다. 최치원이 그런 편지를 썼다는 것은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도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딱 대륙 백제에 관해서는 두 군데만 썼다. 김부식이 남제서뿐 아니라 중국의 여러 기록들을 보지 않고 삼국사기를 기술할 리 없다.  하지만 김부식이 신라 중심으로 쓰기 위해서는 백제사와 고구려사에 대해서 쓰지 않은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이점에서도 김부식이 대륙백제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 딱 두 군데만 쓰고 많은 사료를 삭제하고 쓰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 고사인 삼국사기, 중국의 고대 역사책에도 대륙 신라뿐만 아니라 대륙 백제를 기술해 있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역사를 학교 교육에서 가르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식민사관으로 지배된 한국 역사학계에 의해 저질러진 정신적 폭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지금처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정보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그들에 의해 정신적으로 지배당하고 살아갈지 모른다. 더 많은 시민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식민사관에 의해서 아직까지 대학 강단에서 대학생을 가르치고, 초중고 역사서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 손을 떼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바로선다. 그래야 내가 중심이 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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