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재판을 받는 갈릴레이 [사진 출처=cincinnati.com]
종교 재판을 받는 갈릴레이 [사진 출처=cincinnati.com]

여러분이 믿고 있는 사실은 과연 진실일까?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 수학자였던 갈릴레이는 당시 사람들이 진리라 굳게 믿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송두리째 깨뜨리는 혁명적인 업적을 세웠다. 

근대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이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이 기사는 <나침반> 8월호 'Sci&Tech'에 8p분량으로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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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 갈릴레이가 맥박으로 확인한 ‘진자의 등시성’ 

▲ 샹들리에를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한갈릴레이 [사진 출처=thoughtco.com]
▲ 샹들리에를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한갈릴레이 [사진 출처=thoughtco.com]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
1642)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피사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한다. 그런데, 그는 정작 의학 공부보다 다른 데에 관심이 더 많았다. 

피사 대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있던 갈릴레
이의 눈에 자꾸만 밟히는 게 있었다. 바로 바람에 의해 흔들리던 샹들리에 조명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바람이 강하든 약하든 샹들리에가 한 번 흔들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비슷해보인 것이다. 

당시엔 손목시계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시계 대신 자신의 맥박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했다. 

결국 조명의 무게와 무관하게 흔들리는 시간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추의 질량이나 진폭에 관계없이 진자의 주기가 일정하다는 ‘진자의 등시성’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갈릴레이는 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다. 

지옥의 크기를 계산하다 
대학생이던 갈릴레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수학 덕후(?)’였다. 그는 밤낮없이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책을 독파해 나갔지만, 이 덕분에 결국 의학 학위는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메디치가*였다. 메디치 가문은 갈릴레이를 저택으로 초청해 ‘지옥의 크기’를 주제로 강연을 부탁했다. 

단테의 작품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의 크기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매우 진지한 연구 주제였다. 갈릴레이는 작품 속 ‘루시퍼는 로마 성 베드로 광장의 거인 조각상보다 43배가 크고 조각상은 단테보다 43배가 크다’라는 묘사를 보고 비례법을 이용해 문제를 풀어나간다. 

루시퍼의 키는 약 1800m 정도이며, 지옥은 지구의 1/12 정도 부피인 원뿔 모양이라고 계산했다. 그의 강연은 극찬을 받으며 끝났고, 메디치는 학사 학위도 없는 갈릴레이에게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 자리(!)를 제안했다. 

메디치가(Medici家) | 15~16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 높았던 시민 가문이며, 공화국의 실제적 통치자.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유명해졌다. 메디치 가문은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며 르네상스시대가 피렌체에서 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진리이자 법’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의심하다  

▲ 중세 시대, ‘철학자’라면 곧 아리스토 텔레스를 의미했고, 의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배워야 했다. [사진 출처=microfilosofia.com]
▲ 중세 시대, ‘철학자’라면 곧 아리스토 텔레스를 의미했고, 의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배워야 했다. [사진 출처=microfilosofia.com]

갈릴레이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 배운 것은 아리스토텔레
스의 철학이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철학 분야뿐 아니라 학문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 쉽게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곧 진리이자 법인 시대였다.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갈릴레이가 반기를 들게 된 계기는 우연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 

대학생이던 갈릴레이는 대학을 거닐다가 우박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우박 덩어리들은 크기나 무게에 관계없이 똑같은 속도로 지면에 떨어지는 듯 보였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따르면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졌어야’ 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는 의문을 갖고 당시 피사 대학 최고 학자이자 강경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던 ‘지롤라모 보로’ 교수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보로는 “우박이 각각 다른 위치에서 떨어졌다. 무거운 우박은 더 높은 곳에서, 가벼운 우박은 더 낮은 곳에서 떨어져서 우리의 눈엔 동시에 닿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라고 답했다. 당연히 갈릴레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 지적한 ‘사고 실험’ 

갈릴레이는 교수가 된 이후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대한 지적을 이어갔다. 

또한 보로 교수의 답변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여전히 얼토당토않는 가정이라는 생각을 간직했고, 이 같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논리 개발에 골몰했다. 

결국 교수가 된 갈릴레이는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모순을 지적하며 그의 가정이 틀렸음을 가볍게 증명한다.  

피사의 사탑에 직접 올라가 ‘등가원리’ 증명  
갈릴레이는 다른 철학자들처럼 책상에서만 머리를 굴리지는 않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직접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서 실험을 진행했다. 

피사의 사탑에서 1㎏짜리 쇠공과 10㎏짜리 쇠공을 (거의) 동시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라면 10㎏ 쇠공이 1㎏ 쇠공에 비해 10배 더 빨리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 두 개의 쇠공은 거의 동시에 떨어졌다. 그는 이 실험에서 ‘공기의 저항이 작용하기 때문에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약간 먼저 떨어진다’는 전제를 덧붙였다. 

갈릴레이는 이를 통해 ‘공기의 저항을 무시한 상태에서 질량이 다른 두 물체를 낙하시키면 물체의 질량과 상관없이 동시에 떨어진다’라는 ‘등가원리’를 밝혀냈다. 다시 말해 관성질량*중력질량*이 같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과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 기반이 되기도 했다. 후대 사람들은 갈릴레이가 남긴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이 값이 정말로 같은지, 또 같은 이유를 알기 위해 실험을 계속한다. 

관성질량 | 물체에 힘을 가했을 때 이에 비례해 가속도가 생기는 관계의 비례상수 
중력질량 | 중력의 크기를 이용해서 정의된 질량  


20배율의 고성능 망원경 발명  
1609년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됐다는 망원경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안경 제조자들이 멀리 있는 물체를 3~4배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 망원경에 자신의 광학 지식을 더해 기존의 것보다 20배나 가까이 보이는 고성능 망원경을 제작했다. 고배율 망원경을 발명한 그는 사람들과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종탑에 올랐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으로 해안가를 살펴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엄청난 발명품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큰 도움이 되리라는 점을 알아챈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당시 망원경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어떤 용도로 사용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모두 망원경을 적군의 동향을 살피는 군사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달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끝없이 넓은 미지의 세계 하늘을 바라봤다.  

망원경으로 본 ‘진짜 우주’에 경악  

▲ 루도비코 치골리의 '성모 마리아'. 갈릴레이는 친구였던 화가 치골리에게 달을 관측한 결과를 전했고, 이후 치골리는 성모 마리아 발밑에 표면이 울퉁불퉁한 달을 그려넣었다. [사진 출처=finestresullarte.info]
▲ 루도비코 치골리의 '성모 마리아'. 갈릴레이는 친구였던 화가 치골리에게 달을 관측한 결과를 전했고, 이후 치골리는 성모 마리아 발밑에 표면이 울퉁불퉁한 달을 그려넣었다. [사진 출처=finestresullarte.info]

망원경으로 하늘을 본 갈릴레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자신이 상상해온 우주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천상계, 즉 우주는 지상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5원소 ‘에테르(Ether)’로 이뤄진 영원불변의 세계다. 

그래서 천상계에 있는 달 또한 완벽한 수정구처럼 생겼다고 말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하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고, 태양계 천체들은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 순서로 자리하고 있다. 

그가 망원경으로 처음 관측한 천체는 달이었다. 그가 발명한 고배율 망원경을 사용하자, 달의 표면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것은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모양이 아니라, 표면이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지구의 표면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광대한 돌출부, 깊은 계곡과 만곡부가 가득하다.” 

갈릴레이 우주 관측 일지 

1. 달_ 울퉁불퉁한 표면, 초승달-반달-보름달 → 변화 주기 있음 

▲ 갈릴레이가 스케치한 달의 모습[사진 출처=uk.phaidon.com]
▲ 갈릴레이가 스케치한 달의 모습[사진 출처=uk.phaidon.com]

달 표면에 검게 보이는 부분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아마도 그곳엔 물이 있을 것 같다. 

기하학을 이용해 달의 산 높이를 계산해보니 어떤 것은 6~7km 정도였다. 계속해서 관측해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달의 어두운 곳들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초승달-반달-보름달이 일정주기로 변화하고 있다. 

2. 금성_ 달처럼 변화 주기가 있음 
신기하게도 금성도 달처럼 일정 주기로 상이 변화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동설*대로 지구가 중심에 있고, 금성-태양 순서라면 결코 볼 수 없는 결과다.  

3. 목성_ 목성 주위 떠도는 별은 4개 
목성 주위에 별 4개가 규칙적으로 배회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지구의 달과 같은 위성일 것이다. 

어느 날은 위성이 모두 보이지 않아 계산해보니 공전 주기를 알아낼 수 있었다(현대에 계산한 값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이는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4. 태양_ 흑점 발견! 

▲ 1613년 6월 23일 갈릴레이의 태양 흑점 스케치 [사진 출처=iau.org]
▲ 1613년 6월 23일 갈릴레이의 태양 흑점 스케치 [사진 출처=iau.org]

독일 예수회 인사, 크리스토퍼 샤이너가 책을 보내왔다. 내용은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해보니 앞에 검은 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점이 태양 앞에 떠있는 작은 별의 무리라고 주장하며 나의 의견을 구했다. 

태양을 관측해보니, 흑점은 태양의 표면을 가로질러 움직이며, 길이가 날마다 조금씩 바뀌고, 태양의 가장자리에 있을 때 길이가 짧아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더해 흑점 한 개를 추적해보니 서쪽 끝에서 사라졌다가 2주 후에 다시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다. 
천동설 |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태양을 비롯한 달, 행성, 항성 등이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고 설명한 우주체계. 서기 140년경 알렉산드리아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리했다. 

세상을 뒤집은 갈릴레이의 천체물리학  

▲ 교황청의 심문을 받고 있는 갈릴레이 [사진 출처=wikipedia]
▲ 교황청의 심문을 받고 있는 갈릴레이 [사진 출처=wikipedia]

갈릴레이는 우주를 관측한 결과를 정리해 1610년 '별의 소식'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어왔던 천동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뒤집는 것과 동시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출판한 후 학계의 유명 인사가 됐고, 대공의 수학자로 임명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동설’은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로 인정됐다.  

당시 신학자와 과학자들은 갈릴레이의 이론을 반박하고 나섰다. 당대 저명한 과학자이자 예수회 신부였던 클라비우스는 “망원경이라는 장비에 결함이 있어 달이 울퉁불퉁하게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진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다. 고문 신학자들은 갈릴레이의 가설이 ‘철학적으로 우매하고 신학적으로 이단적’이라는 의견을 제출했다. 

결국 갈릴레이는 1616년 교황청 추기경위원회로부터 심문을 받는다. 그는 지동설을 논하거나 옹호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만다. 

‘지동설’ 우회적으로 주장한 책 '대화' 

▲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대화' 표지 [사진 출처=wikipedia]
▲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대화' 표지 [사진 출처=wikipedia]

그러나 이렇게 물러날 갈릴레이가 아니었다. 갈릴레이는 교황에게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비교하는 책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청은 균형 있게 다룬다는 전제하에 집필을
허락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이하, 대화)'라는 책을 출판했다. 

'대화'는 3명의 등장인물이 4일간 대화를 나누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특히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그 힘이 어우러져 밀물과 썰물이 일어난다고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다(오늘날 우리는 조수간만의 차가 달과 태양의 인력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교회 검열에 의해 조차에 관한 내용은 빠지게 된다. 

신을 거역한 과학, 세기의 종교재판 

▲ 갈릴레이는 시력 감퇴 전까지 방에서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했다.
▲ 갈릴레이는 시력 감퇴 전까지 방에서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했다.

갈릴레이는 '대화'의 서문에 “두 이론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신만이 아신다”라고 썼지만,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지동설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신학자들은 이 책이 천동설 지지자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며, 교회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직접 종교재판소로 갈릴레이를 소환해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종교재판소는 두 가지 이유를 문제 삼았다. 하나는 지동설이 성경 내용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여호수아’ 10장에는 ‘신이 자신의 권능으로 지구를 도는 태양을 잠시 멈춘 기적을 행했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이유다. 나머지 하나는 1616년 교황과 했던 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갈릴레이는 7명의 재판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동설이라는 이단의 주장을 편 것을 철회한다고 참회했다.

그에게 사형 대신 내려진 판결은 ‘가택연금.’ 갈릴레이는 집에 갇혀 있었지만 그동안 망원경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며 지냈다. 맨눈으로 태양과 별을 관측하던 갈릴레이는 1637년 결국 두 눈이 완전히 멀어버렸다.

그러나 눈이 멀어가는 동안에도 근대 물리학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 저서 '두 개의 신과학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이라는 최후의 역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갈릴레이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이 실수였다는 견해를 밝혔고, 1992년 갈릴레이는 350여년 만에 공식 복권됐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일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어떠한 공식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과 신념을 놓고 볼 때 마음속에서 수천 번도 넘게 울렸을 말일 수 있다.

이외에도 샹들리에를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알아낸 일화, 피사의 사탑에서 자유낙하 실험을 한 일화 모두 꾸며진 이야기 일 수 있다.

다만 일화의 사실 여부를 떠나 갈릴레이가 근대 과학의 길을 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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