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고대사’ 바로 알기
- 중국 문명의 뿌리는 ‘동이족’이었대!
- 연나라를 세운 ‘모용황’도 우리와 이웃사촌이라고?
- 송나라가 ‘신의 배’를 만든 이유!
- 고려를 위한 몽골의 배려 “그대들의 풍습대로 사시오”
- 명나라와 조선은 ‘전략적 관계’일 뿐!
- 누가 뭐래도 한국은 ‘독립국가’라고!

▲[톡톡 매거진] '똑똑 라이브러리'에 실린 콘텐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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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바로 알기 
2017년 4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에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언급한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논란이 됐어요.

이처럼 중국 지도부 외에도 중년층 이상의 중국인들 중에는 ‘한국이 중국의 종속국가였다’라는 잘못된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지금부터 배울 한국 고대사를 통해  한국이 종속국가가 아닌 ‘독립국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해요. 

■ 필자 소개 
이기훈 교사는 중국 베이징언어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중국 ‘사서’의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 관련 내용을 연구한 끝에 ‘동이족’이 중국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쓰지 않고 읽는 한자>, <동이 한국사>, <중국이 쓴 한국사>, <우리한자 808> 외 다수가 있으며, 현재 유튜브 역사채널 ‘이기훈의 역사와 미래’를 운영 중입니다. 

종속국가(從屬國家) | 법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정치나 경제ㆍ군사 면에서 다른 나라에 지배되고 있는 나라 

중국 문명의 뿌리는 ‘동이족’이었대! 
고대 중국은 동쪽에 ‘동이족’, 남쪽에 ‘묘만족’, 서쪽에 ‘화하족’ 이렇게 3개의 민족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해요. 그 중 동이족은 한국인과 매우 유사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었는데요. 이는 중국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에요, 굽이 높은 그릇을 쓰거나, 순장을 하는 것 그리고 머리를 납작하게 하는 풍습 등이 이를 증명하죠. 

그런데 실제로 중국 문명을 시작한 나라들이 바로 이 ‘동이족’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지고 있어요. 현재 발견되는 유물로 추정해보면 당시 동이족은 만리장성 동쪽에서 기원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데요. 중국 동북지역에 위치한 요녕성 박물관에 가면 중국 최초의 국가형태를 갖춘 마을이나, 중국 최초의 옥기들을 확인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까지 만리장성 동쪽은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중국의 권위 있는 역사서인 ‘사기’나 ‘구당서’ 등을 보면 그곳이 ‘조선’, 즉 고조선임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동이족이 기원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이족 사람들이 세운 나라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두 번째 왕조인 ‘상나라’예요. 상나라 사람들도 본래 중국 동북 지역에 있던 고조선에서 이주해 와서 중국을 다스리다가 다시 고조선으로 돌아가는데요. 이들은 한국인의 시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비록 상나라의 왕조는 중국에 있었지만 그 기원이 고조선의 서쪽지역이었고, 이들이 다시 고조선으로 이주해왔으니 한국인과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는 거죠. 

옥기(玉器) | 옥으로 만든 그릇 
시조(始祖) | 한 겨레나 가계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 

 

*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3대 민족' 
*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3대 민족' 

연나라를 세운 ‘모용황’도 우리와 이웃사촌이라고? 
중국 진나라는 옛 고조선 땅인 중국 동북 요녕지역의 권력자에게 ‘조선공’이라는 작위를 줬다고 해요. 당시 ‘모용황’이라는 자가 작위를 받았는데, 이는 모용황이 고조선 지역에 살던 사람이었다는 것과,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중국에 의해 멸망했다고 쓰여 있던 일부 역사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증명하죠. 

345년 모용황은 진나라를 쳐들어가 중원을 차지하고 연나라를 세우는데요. 그는 한국인의 뿌리였던 예맥족의 일파인 ‘선비족’이었어요. 이들 선비족은 그 뒤로도 계속 중국 땅을 점령하며 1,000년 가까이 중국을 다스렸답니다. 

송나라가 ‘신의 배’를 만든 이유! 
우주선 기술이 발달한 중국에서는 1999년 최초의 무인우주선 ‘신주’를 발사했어요.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를 오가는 배’라는 뜻의 신주는 중국인의 자부심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죠. 

그런데, 처음 신주를 만들게 된 건 우주 탐사의 목적이 아닌 ‘고려’에 사신을 보내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송나라 6대 황제 ‘신종’은 1078년 처음으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려 기술자들을 초빙해 왔는데요. 그들을 시켜 명주(절강성)에서 2척의 신주를 만들게 했어요. 그리고는 그 배로 사신들을 고려에 보내죠. 

이는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의 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원풍원년(1079)에 처음으로 안도가(좌간의대부)와, 진목가(기거사인)를 고려에 파견해 고려 기술자들을 초빙한 뒤, 두 척의 큰 배를 명주에서 만들었는데, 두 척 모두를 신주라 했다. 정해로부터 바다를 직접 건너 동쪽(고려)에 도착하니, 이미 그 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하며 맞아주었다.”라고 쓰여 있죠. 

작위(爵位) | 벼슬과 지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중원(中原) | 중국의 황허강 중류의 남부 지역. 한때 군웅이 할거했던 중국의 중심부나 중국 땅을 말한다 
정해(定海) | 저장성, 저우산 군도의 중심 도시 


고려를 위한 몽골의 배려 “그대들의 풍습대로 사시오” 
몽골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제국이었어요. 유럽, 러시아, 중동, 중앙아시아, 중국을 침략한데 이어 인도까지 몽골 후손들이 지배했으니까요. 당시 몽골의 국력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조차하기 어렵죠. 

1253년 중국 서부를 점령한 몽골은 1258년에 중국에 남은 마지막 왕조인 남송을 공격해요 이에 고려는 중국이 무너지면 우리도 몽골에 항복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1259년 왕자를 보내 몽골과 강화를 맺기로 합니다. 

몽골은 자신들의 공격을 28년 동안 7차례나 막아낸 고려가 강화 요청을 해오자, 이를 크게 반기며 다른 나라엔 허용하지 않았던 특권을 고려에만 허락해요. 그것은 바로 고려의 풍습을 그대로 유지시킨 것인데요. 그로 인해 고려는 자국의 전통을 유지하며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었답니다. 

반면 중국은 인구의 90% 이상이 몽골인에 의해 사망하고, 몽골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죠. 

비록 고려가 몽골에 강화를 요청했지만, 이는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에요. 몽골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중국인이 아닌 몽골에서 중국으로 남하했던 외국인들이었고, 고려는 어디까지나 자치를 인정받은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전무후무(前無後無) |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대단히 놀랍고 뛰어난 일 
강화(講和) | 싸우던 두 편이 싸움을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됨 


명나라와 조선은 ‘전략적 관계’일 뿐! 
몽골제국이 무너지고 명나라가 세워질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말기에 해당해요. 1388년 신흥국인 명나라는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지역의 북쪽 땅을 요구합니다. 

이에 화가 난 고려는 군사를 모아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해요. 하지만 이 공격이 무리한 행위임을 깨달은 이성계는 압록강에서 군대를 돌려 고려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합니다. 

1392년 쿠데타를 통해 왕이 된 이성계는 기존 왕들에 비해 권력의 기반이 약했어요. 그런 이유로 중국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죠. 이성계는 명나라의 마음을 사기 위해 사신을 보내 국호를 선택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명나라 황제는 ‘조선’이란 국호를 내립니다. 

이 사실을 두고 중국에서는 조선이 중국에 종속된 나라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전략적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고대 국가들은 힘이 강한 국가에 형식적으로 작위를 요청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다스리는 땅의 권력을 정당화했는데, 당시엔 한국뿐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중국의 주변국들 역시 스스로 중국에게 작위를 요청하는 일이 많았어요. 

따라서 이런 형식적 관계를 빌미로 조선이 명나라의 종속국가였다고 보는 것은 당시 상황을 모르고 판단한 성급한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쿠데타 | 무력에 의해 정권을 빼앗는 일 

누가 뭐래도 한국은 ‘독립국가’라고! 
조선에게 명나라의 도움이 절실하게 된 사건이 있어요. 바로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인데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왕은 명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을 도와서 함께 일본을 물리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명나라는 조선을 돕다가 국력이 약해져 1644년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에 의해 무너지고 말아요. 여진족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이전인 1636년 조선을 침입하고, 임금과 신하의 예인 ‘군신의 예’까지 요구하죠. 

그런데 사실 여진족은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에요. 발해(698년)때부터 신라와 왕래가 끊어져 언어나 풍습이 달라졌지만, 그들은 과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후손이고, 심지어 자신들은 신라와 백제의 백성들이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답니다. 여진족은 그런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만든 거죠. 

지금까지 소개한 고대사를 되짚어보면 그 어디에도 한국이 중국의 실질적인 종속국가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알 수 있어요. 비록 명나라나, 청나라 시대에 중국의 간섭을 받긴 했지만, 이는 단지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현실적인 정책 수단이었을 뿐, 직접적인 행정적 지배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국은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고유의 전통을 지키고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한 ‘독립국가’였어요. 이점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고 한국인으로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는 여러분이 되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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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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