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정화가 만든 지도 의지해 대항해 나서"

1431년 제7차 항해에 나서 동지나해를 내려가던 명나라 제독 정화(鄭和)는 이번이 마지막 항해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다. 막 60살이 된 그는 중간 기착지에서 해상의 안전을 주관하는 도교의 여신 천비에게 그동안의 가호에 감사하는 글을 올렸다. 정화의 글을 담은 비석은 비바람과 정치적 음모로 얼룩진 600년의 세월을 이긴 채 마침내 세상을 향해 정화 함대의 숨겨진 진실을 전하기 시작했다.
 
명군의 포로가 되어 환관으로

“우리들, 정화와 그 동료들은 야만 지역의 번국에 칙사로 가라는 황상의 천명을 받들어 지금까지 7차례에 걸쳐 항해를 수행했다. …수평선 너머 세상의 끝에 있는 나라들이, 서쪽 나라들의 서쪽 끝이, 북쪽 나라의 북쪽 끝이, 그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건 우리 항해의 목표였다. 그렇게 우리는 크고 작은 나라 3천개를 찾아갔다.”(복건성 장락현 삼봉탑사 천비궁에 있는 <천비령응지기>에서)
 

   
▲ <일러=한겨레21> 정화 상상도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우리는 모두 10만리(약 18만5천km)가 넘는 거대한 해역을 항해했으며, 그 대양에서 하늘까지 치솟는 산더미 같은 파도를 보았다. 우리는 저 멀리 빛살 속에서 투명한 하늘색에 잠긴 야만 지역을 발견했다. …우리의 항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무자비한 파도를 쾌속으로 통과하는 별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태창현 유가항 천비궁에 있는 <통번사적기>에서)

20세기까지 명나라 제독 정화의 활동은 대체로 이렇게 기록돼 있었다.

정화는 운남성 출신으로 색목인이었다. 몽골을 지원해 원 초기 함양왕에 책봉된 바 있는 집안의 원래 성은 마(馬)씨다. 명나라의 운남정벌 때 12살 소년이었던 그는 명군의 포로가 돼 거세되었다고 알려진다.

1년 뒤 그는 북경의 국경 수비를 지휘하던 주원장의 넷째아들 연왕(燕王) 주체에게 환관으로 보내져 연왕부의 핵심인물로 성장했다. “신장 9척(180cm), 허리둘레 10위(150cm), 미목 수려,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며 음성은 낭랑하다.”

환관은 여성형일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선입견과 달리 그는 대장부상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해 여러 나라 말에 능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알려진다.

한편 탁월한 지도력을 갖춘 주체는 결국 건문제의 숙청 작전에 맞서 정변을 일으켜 4년 동안의 격전 끝에 승리한다. 그가 승리한 원인의 하나로 황제 진영에서 박대받은 환관들의 비밀스런 지원을 꼽기도 한다.

환관들은 황제 진영의 허술한 경비 상황을 그대로 연왕쪽에 전달해 남경 함락의 결정적 요인을 제공한 것이다. 정화는 한편으로는 황제쪽 궁정에 있는 환관들을 이용한 정보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능한 야전 지휘관으로서 주체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주체가 영락제로 등극한 직후 환관의 최고위 직위인 태감으로 승진하고, 정씨 성을 하사받는다. 
 

   
▲ <사진=한겨레21> 정화는 대항해를 통해 도자기 등 명나라의 특산품 시장을 아시아·아프리카로 확장시키는 한편 기린 등 각종 동물과 특산품을 중국으로 들여왔다.

그 뒤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저 유명한 ‘남해대원정’을 떠나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1차 항해 당시 함대는 보선 62척을 비롯해 100여척으로 이뤄졌다. 보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50m, 폭이 60m가 넘는다. 그가 지휘한 함대는 당시 유럽 모든 나라의 군함 수를 합친 것보다 큰 규모다.

영락제가 대항해를 명령한 배경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바다 건너 세상의 끝까지 가서 모든 번국들이 조공을 바치도록 하라.”

영국 퇴역장교 멘지스의 놀랄 만한 발표

공식적인 칙명은 그렇게 돼 있다. 세상 천하를 유교적 중화질서에 편입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외국 망명설이 민간에 퍼져 있는 건문제의 행방을 쫓으라는 명령이 비밀리에 내려졌을 수도 있다.

7차에 걸친 항해 때마다 최고지휘관인 정사는 태감 정화가 맡았다. 수백척의 함선에 3만명에 이르는 대군의 총사령관으로 환관 출신을 기용한 것에는 정화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영락제의 유학자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당시 대유학자 방효유를 비롯해 유학자 진영의 상당수는 주원장의 적손으로 학문을 사랑한 건문제를 지지하며 영락제에 대한 출사를 거부하다가 무더기로 처형됐다. 환관은 자식을 낳을 수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황제에게 더욱 충성하리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대항해는 비단·도자기·옻칠기·사향·장뇌 등 중국 특산품의 시장을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장시키는 한편, 그 지역의 특산품인 후추·용연향·진주·보석·산호·사자·기린·얼룩말·타조 등을 중국으로 들여왔다.

사람과 정보의 대규모 교류도 촉진하면서 동남아 지역에 화교들이 진출하는 주요한 계기로 작용했다고 평가받는다. 그 뒤 정화는 7차 항해에서 돌아오는 길에 1433년 인도양에서 62살의 나이로 죽는다.

명나라 역사는 공식적으로 정화 함대가 찾아간 지역을 수마트라, 베트남, 시암, 캄보디아, 필리핀, 실론, 방글라데시, 인도, 소말리아 모가디슈로 기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희망봉까지 돌았다는 주장도 제시된 바 있다.

세계 역사는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바다를 사실상 서양의 지배권 아래 가둬놓았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카브랄… 마젤란… 제임스 쿡… 모든 대항해시대의 영광은 이런 서양식 이름이 휩쓸어갔다. 세계 학계는 그렇게 수세기 동안 철옹성처럼 정화를, 정화로 표상되는 동양의 바다사를 사실상 배제하거나 축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철옹성이 갈라지는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002년 3월15일 영국 런던의 왕립 지리학회에서 개빈 멘지스라는 한 퇴역 해군장교가 놀랄 만한 내용을 발표하고 나선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 그는 이미 72년이나 늦어 있었다. 실제로는 명나라 제독 정화의 함대가 이미 1421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콜럼버스나 마젤란은 오히려 이 정화 함대가 만든 지도를 가지고 대항해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정화 함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조선술과 항해술로 세계일주까지 마쳤을 개연성이 대단히 높다.”
 

   
▲ <사진=한겨레21> ‘21세기 정화논쟁’은 2002년 개빈 멘지스가 <1421: 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를 출판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했다.

멘지스의 발표는 그가 영국 해군 잠수함 장교로 17년 동안 근무하면서 항해지도와 천체관측에 정통한데다, 대항해시대의 대표적 탐험가들의 항로를 모두 실제로 항해했다는 경력 때문에 독특한 관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21세기 정화 논쟁’은 그해 11월 멘지스가 <1421: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를 출판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한다. 14년 동안 140개 국가의 현장과 문서보관소, 도서관, 과학연구소, 희귀자료 소장기관 등을 뒤지고,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는 등 숱한 노력 끝에 태어난 이 책은 곧바로 영국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했다.

멘지스가 논점의 시발로 삼은 주제는 대략 다음과 같은 5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1492년 콜럼버스가 이른바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실제로 대서양 건너편 육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항해지도가 여럿 있었다. 콜럼버스나 마젤란은 모두 이런 지도를 가지고 항해에 나섰다. 그들은 어둠 속에 잠긴 미지의 바다를 항해한 것이 결코 아니다.

(2)1421년 시작된 정화 함대의 제6차 항해 때 본대와 별도로 3개 분견대가 2년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1423년 여름과 가을 각각 명나라로 귀환했다. 이 가운데는 28개월 만에 단 5척만 살아서 돌아온 분견대도 있다.

“정화의 지도를 손에 든 콜럼버스”

(3)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남중국 등 아시아계로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미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도착 당시 곳곳에 상당수 살고 있었다. 이런 지역은 남북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태평양의 여러 섬 등 광범한 지역에 점점이 흩어져 있다. 1400년대 것으로 확인되는 선박의 잔해도 계속 보고되고 있다.

(4)약 1만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말이 실제로는 유럽 정복자들의 남아메리카 도착 시기에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등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에 인간에 의한 동물과 식물의 대규모 교류를 증명하는 사례들이 매우 많다.

(5)콜럼버스 이전 시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조선술과 지도 제작기술, 천문관측 능력, 항해술을 갖춘 나라는 중국 명나라밖에 없다.
 

   
▲ <사진=한겨레21> 중국 기념주화에 새겨진 정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수십년 전에 이미 아메리카의 존재를 확인하는 비교적 정확한 지도가 존재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사실이라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1421년 정화 함대의 3개 분견대는 외교사절들을 아프리카로 귀국시킨 뒤 과연 어디로 갔던 것일까? 분견대의 ‘알려지지 않은 항해’가 과연 ‘아메리카 지도’의 존재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시아계 인종으로 보이는 인물들에 대한 DNA 측정검사는 실시했는가? 정화 함대의 아메리카 발견이 사실이라면 왜 중국 역사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인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의 주장대로 중국이 유럽에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사는 다시 씌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한 아마추어 역사가(an amateur historian)의 특이한 전문성과 정열 그리고 치열한 노력이 없었다면 도저히 빛을 보기 어렵거나 영원히 묻혀버렸을지 모르는 ‘정화 함대=아메리카 발견+최초의 세계일주’ 주장은 이제 정식으로 세상의 빛 속으로 나왔다.

정화가 남긴 비문 2개에 나타난 ‘3천개의 나라’와 ‘10만리’(18만5천km)는 중국적 과장이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우리도 멘지스의 안내로 모든 지적 능력을 총동원해 1421년 정화 함대가 과연 무슨 일을 해냈는지 그 대항해를 되살려내는 ‘21세기의 오디세이’를 떠나보자.

…정화 함대의 항해는 점점 더 모험의 강도를 높여갔다. 제2차 항해 때는 전진기지 말라카에서 본대와 분견대가 분리되더니 제3차 항해 때는 훨씬 더 서쪽인 인도 서안의 캘리컷이 전진기지가 됐다. 제4차 항해 때는 캘리컷에서 함대가 분리돼 각각 페르시아만, 아프리카로 향했다. 제5차 항해 때는 세계 각국의 대표와 사절을 북경으로 데려왔다.

…1421년 제6차 항해… 항해의 목적은 제5차 항해 때 북경으로 경호해온 각국 대표와 사절을 반대로 자기네 나라로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함대는 모두 107척으로 이뤄졌다. 함대는 충분히 보급품을 채운 뒤 캘리컷으로 항해했다. 캘리컷에서 총사령관 정화는 본대를 이끌고 남지나해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 주문, 주만, 홍보, 양진 등 모두 환관이기도 한 분견대 지휘관들은 전부 정화와 함께 오랫동안 대항해에 참여해오며 함대 지휘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 각 분견대에는 화약을 이용한 무력을 갖춘 군대가 편재돼 있었다.

‘21세기 오디세이’로 떠나는 길

함대는 주문, 주만, 홍보의 3개 분견대로 나뉜 채 함께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로 갔다. 외교사절들을 모두 목적지까지 데려간 뒤 함대는 아프리카 남단까지 내려가 희망봉을 돌았다. 주문, 주만, 홍보의 분견대는 벵구엘라 해류를 타고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올라가 케이프 베르데 군도까지 갔다.

아직 사람이 살지 않고 있는 케이프 베르데 군도에서 식수와 식량을 조달한 그들은 이번에는 모든 바다에 떠 있는 것들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어내는 거대한 적도 해류를 타고 계속 항해해 마침내 카리브해에 도달했다.

그러나 카리브해에 진입하면서 세 분견대는 이 해역에서 적도 해류가 각각 남북으로 갈라지는 거대한 자연 현상에 따라 주문 분견대와 주만-홍보 분견대로 갈라지게 된다. 상상해보라. 거의 항공모함 크기에 육박하는 30여척의 보선과 그를 따르는 50여척의 크고 작은 중간급 보선과 수송선들이 해류의 분리 현상에 따라 저마다 돛들을 펄럭이며 각각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향해 두 패로 갈라지는 장관을! 이 장면은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 틀림없다.
 

세계지도, 정화 지도 베껴 짜깁기?

 
   
▲ <사진=한겨레21>
멘지스의 주장대로라면 아메리카의 존재를 담은 정화 함대의 오리지널 지도가 막상 중국에서는 버림받고 유럽에서는 채용된 결과 세계사가 서양의 것으로 결정됐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중국이 영국보다 수세기 앞서 미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다.

따라서 정화 함대의 지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실제로 멘지스가 정화 함대의 지도를 베껴 짜깁기한 것으로 분석하는 주요 초기 세계지도는 현재 1천만달러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미 대항해시대가 400~500년씩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대한 지도는 당시 흔히 베끼거나 짜깁기되곤 했다. 우리나라의 이회가 부분적으로 참여했다는 세계지도 <역대제왕혼일강리도>의 제작과정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1402년 조선 태종 때 이회는 조선전도인 <팔도도>를 만들었다. 그해 조정에서 3년 전 명나라로부터 도입한 원나라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합쳐 하나로 만들도록 했다. 두 지도를 합치되 서로 틀리는 곳은 조화시키고 자세하게 더 조사해 교정하라는 것이다. 이 합쳐진 지도에다 다시 우리나라 지도를 특별하게 크게 넓히도록 했다. 여기에 1401년 일본에서 가져온 일본 전도인 <늑성신도>를 덧붙여 만든 것이 바로 <역대제왕혼일강리도>이다. 이회가 <강리도>를 종합하는 기간이 불과 3개월 안팎인 점을 미뤄볼 때 <강리도>의 조선 부분에는 <팔도도>를 그대로 옮겨 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방동인 지음 <한국의 지도>에서)

초기 세계지도도 이런 식의 베끼기나 짜깁기가 일반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엄청난 함대의 규모

 
   
▲ <사진=한겨레21> 정화 함대와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동원된 산타마리아호와의 비교도. 정화 함대가 2500t 정도로 추정되는 반면 산타마리아호는 200~250t에 지나지 않았다.
정화 함대는 가장 큰 함선인 보선(서양취보선·西洋取寶船) 60여척을 중심으로 100~200척 정도로 이뤄져 있다. “1차 항해에 참가한 보선 63척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44장 4척에, 폭이 18장이다.”

이 기록에 따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길이 약 151.8m, 폭 61.6m에 이른다. 대형 돛이 9개다. 영국의 밀스는 적재 중량을 ‘약 2500t, 배수량은 약 3100t’으로 추정했다. 약 8천t까지 보는 설도 있다.

이에 비해 1492년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동원된 선박은 기함 산타마리아호가 200~250t에 지나지 않고 함선 수도 3척, 승무원은 총 120명 수준이다.

15세기 초 중국에 이렇게 큰 선박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은 1957년 남경 부근의 명나라 때 조선소 유적지로 보이는 곳에서 길이 11m의 거대한 목재 타봉이 발견돼 단번에 풀리게 된다.

함대의 총원은 보통 약 2만7천명 수준이다. 큰 보선에는 1천명 가까이까지 탑승한 것으로 추측된다. 의관과 의사들도 약 180명씩 됐다. 놀랍게도 수백명에 이르는 무희와 가수 등 여성도 동승하고 있었다. 외국의 군주나 외교사절 등을 함선에 초청하거나 명나라까지 태우고 이동하는 것 등에 대비했다고 한다.

식수선·양곡선·마선을 별도로 운용했고, 도자기·동전·옻칠기·비단 등 조공 무역품도 싣고 이동했다. 2만7천명 규모의 인원이 먹는 식량은 하루치가 70t, 음료수 역시 70t 규모가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때문에 파라핀 왁스를 이용해 바닷물을 증류하는 기술도 채용했다고 한다.

함대는 북반구에서는 북극성(Polaris) 등을, 남반구에서는 남십자성(Southeern Cross)과 용골자리의 으뜸별인 카노푸스(Canopus)를 기준별로 삼아 정확한 항로를 찾아냈다고 멘지스는 분석한다. 이런 보급 능력과 항해술로 함대는 어떤 기상조건에서도 하루 24시간씩, 한번에 몇달씩 어떤 대양이라도 운항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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