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왕,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다

21세기, 우리 민족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변수들은 참으로 많다. 전쟁인가 평화인가?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는 가능한가? 선진국 진입 가능성은? 통일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이루어진다면 그 시나리오는 어떻게 될까? 한민족의 장기 생존은 가능한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

세상이 어떻게 되건 앞으로 ‘여성’이라는 변수는 그 중요성에서 결코 앞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 여성의 시대가 새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는 충분히 많다. 건국 이래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집권한 현재, 이미 여성의 시대는 시작됐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이다(선덕왕이 맞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선덕여왕으로 하는 걸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그에게는 대략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평가가 따라다닌다. ‘한민족 최초의 여왕’이라는 것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는 것이다.

최초의 여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한 상식이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는 누구나 100% 찬성하는 평가라고는 하기 어려운, 반대의견도 조금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여왕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세력이 당시 신라 안팎에 실질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흐름은 신라 당시는 물론 신라의 이야기를 역사에 기록한 고려 시대, 심지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먼저 선덕여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으로 진평왕의 장녀다. 성품이 어질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자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 진평왕 때 당나라로부터 얻어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의 종자를 보고 ‘이 꽃은 비록 아름다우나 반드시 향기가 없겠나이다’고 왕에게 말했다. 왕이 그 이유를 묻자 ‘꽃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나이다’라고 할 정도로 명석했다."

임금으로 오른 첫해(서기 632년) 겨울에 홀아비, 홀어미, 고아, 자식 없는 노인과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제해 민심을 안정시켰다. 12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쳤다. 이듬해에는 죄수들에게 대사면을 내리고, 모든 주군에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그해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했다. 재위 4년째에 당나라로부터 주국낙랑공 신라왕(柱國樂浪公 新羅王)에 책봉됐다.

   
 

재위 5년 5월에 청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 서쪽에 있는 옥문지라는 연못에 모여든 것을 보고 ‘서남쪽 변경 옥문곡이라는 곳에 백제군이 침입해 매복하고 있는 것 같다’고 예측해 실제 백제군 500명을 찾아내 섬멸한 적이 있다.

재위 7년 11월에 고구려 군사가 북쪽 변경 칠중성에 쳐들어온 것을 물리쳤다. 재위 9년 당나라에 청원해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을 국학(당나라의 최고 학부)에 입학시켰다.

재위 11년에는 백제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서쪽 지방 40여성을 빼앗겼다. 다시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사신을 당태종에게 보내 위급한 사실을 알렸다.

그 해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의 공격으로 접경지대의 요충인 대야성이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로 성주인 김품석 등이 전사했다. 이에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으나 이것이 이뤄지지 않자 이듬해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고구려연합에 대항할 ‘대국의 군사를 청원한다’며 구원병을 청했다.

이를 받아 당태종은 이듬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내년에는 반드시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협박했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듣지 않았다.

그해 9월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백제 정벌에 나서 7개 성을 점령했다. 재위 14년 정월에 김유신이 백제 정벌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군이 다시 쳐들어오는 등 잇따라 3번씩이나 백제의 침략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했다. 그해 3월에 황룡사탑을 건립했다.

5월에 당태종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자 선덕여왕은 군사 3만명을 내어 당나라를 원조했다. 이 기회를 타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서쪽의 변방 7성을 공격해 빼앗아갔다.

재위 16년인 서기 647년 정월에 비담 염종 등이 ‘여왕이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했다. 그달 8일 왕이 돌아가시므로 시호를 선덕이라 했다.”

당태종과 김부식의 업신여김

역사적으로 선덕여왕의 재위기간은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에 따라 고구려-백제의 ‘여-제 동맹’이 강화되던 시기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 ‘나-당 동맹’으로 이에 맞섰다. 한반도를 무대로 다국간 무력전과 외교전이 한층 더 치열해지고 있던 격동의 시기였다.

특이하게도 선덕여왕은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국가를 통치하면서도 통도사·월정사·분황사·오세암·보문사 등 오늘날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크나큰 불사를 잇따라 지었다. 덕만이라는 이름은 바로 석가모니 시절 불교를 깊이 믿었던 석가모니 가족 공주의 이름이다.

삼국이 통일을 향해 치닫는 격동의 시대, 전쟁의 시대에 선덕여왕은 종교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정립시키는 과감한 정치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이 결단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역사적인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고구려나 백제에는 없었던 이 에너지로 결국 신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진 제공=한겨레21> 분황사 석탑(왼쪽)과 첨성대(오른쪽).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에 크나큰 불사를 잇따라 일으키는 등 종교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정립하는 한편 과학기술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한겨레 김종태 기자)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여왕이 맞닥뜨려야 하던 도전은 강력했다. 우선 재위 15년 동안 모두 11차례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재위 16년에 일어난 비담 등의 반란까지 치면 12차례이다).

총 11차례의 전쟁 가운데 신라가 먼저 공격한 것은 재위 13년 김유신을 시켜 백제를 쳐 7개 성을 빼앗은 것과, 재위 14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때 당나라쪽에 군사 3만명을 원병으로 보낸 것 2차례뿐이다. 재위 11년과 14년에는 각각 백제로부터 3차례나 공격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당태종은 여성 군주인 선덕여왕을 깎아내리는 공개적인 언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재위 12년인 서기 643년 당에 간 신라 사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 터이므로… 해마다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인즉, 나의 친척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자연 홀로 갈 수 없으므로 마땅히 군사를 파견해 그를 호위하게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는 것을 기다리자.”

나아가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신라본기 선덕왕’에서 이런 평까지 하고 있다. “하늘로서 말한다면 양은 강하고 음은 유약하고,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이 원문이 그 유명한 ‘남존여비’이다). 하물며 어찌 늙은 할머니를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다스리게 하는가? 신라가 여자를 왕위에 있게 한 것은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탁월한 외교전과 인재의 중용

당태종의 망발스러운 여성 비하 발언은 그의 후궁이었다가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의 ‘일격’ 앞에 그대로 무너진다. 무후는 고종에 이어 아들을 차례로 황제에 앉혔다가 서기 690년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나라 이름까지 주나라로 바꾸었다. 당태종이 그런 망언을 한 지 정확히 47년 뒤에 벌어진 일이다.

김부식의 평가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은 쉽사리 드러난다. 선덕여왕을 왕위에 있게 한 것은 확실히 ‘난세’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김부식이 말하는 난세, 곧 ‘나라를 엉망으로 운영하는 판국’에서 여왕을 뽑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지럽기에 영명한 군주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선덕여왕을 뽑았는데 결과가 그대로 이뤄졌다고 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가 이룩한 삼국통일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적인 견해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선덕여왕은 진흥왕 때 이뤄진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한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을 탁월한 외교전으로 맞서고, 불교를 통한 국민통합과 김춘추, 김유신 같은 유능한 인재의 중용으로 국력의 내실을 채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아가 시대 상황과 직책의 특수성 때문에 이 땅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국제주의에 적극적이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 온 + 오프 항해지도 ::

▶중고생
-<삼국사기> 김부식, 명문당. <삼국유사> 일연/리상호, 까치

▶▶대학생 이상
-<역사스페셜1> KBS역사스페셜/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나 ☞ 효형출판
 

선덕여왕의 경쟁력
1.국민통합을 위해 종교 적극 활용
2.탁월한 외교전략으로 고구려-백제 동맹에 맞섬
3.김춘추, 김유신 같은 인재 중용을 통한 위기 돌파 및 국력 강화
4.국제주의적 감각과 실천
5.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대대적인 해외유학 추진
6.가난한 사람과 어려운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
7.첨성대 건립에서 보이는 과학에 대한 관심

선덕여왕의 약점
1.사대주의적인 통일 방식
2.결과적으로 한민족의 활동권을 축소시킴
3.국내 반여왕파를 통합하는 데 실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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