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그 어떤 남성 위인에도 뒤지지 않는 용기를 발휘하다

“3·1운동 때 의암 손병희 선생도 고문실로 끌려갔다. 여러 놈이 고개를 젖혀서 눕힌 뒤 손 발 사지를 장의자에 붙들어 맸다. 입과 코에 걸레조각을 올려놓고 물을 들이붓는 것이다. 입과 코로 물이 들어가며 숨이 칵칵 막힌다. 5분, 10분 계속하면 배가 불러올 뿐만 아니라 숨이 막혀 기절하고 만다.

… 그 다음날 또 고문실로 끌려가 ‘학춤’을 춘다. 바른손을 어깨 위로 돌리고 왼손을 허리 뒤로 돌려서 두 엄지손가락을 한데 단단히 매고 천장에 박아놓은 못에다가 바른 팔꿈치를 거는 것이다. 그 아래에는 숯불이 이글거리는 화롯불을 갖다놓는다. 동여맨 엄지손가락이 끊어질 듯이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깻죽지가 물러가고 가슴이 뻐개지며, 화롯불의 화기는 온몸을 엄습해 일초 동안도 견뎌내기 어렵다.

… 의암은 보석으로 나온 뒤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혹독한 고문을 이기고…

“장로교의 대표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남강 이승훈 선생도 숱한 고문을 당했다. 취조실에서 격검대로 하나둘 하나둘 하고 군호를 맞춰가며 어깨와 등 그리고 아무 데나 때리는 것은 오히려 대접해주는 셈이다. 고문실 장의자에 눕히고 잡아맨 뒤 고춧가루가 섞여 있는 설렁탕 국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는 것이다.… 게다가 화롯불에 부젓가락을 달궈 허벅지를 쑤셔댄다.… 남강 역시 출옥 뒤 일찍 돌아갔다.”

“3·1운동 당시 학생대표로 활동했던 김원벽도 몇달 동안 고문을 받았다.… 물 먹이고, 주리 틀고, 때리는 것으로도 입을 열지 않자 일본 경찰은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동원했다. 눈을 조금 감기만 하면 바늘 끝으로 살을 찔러서 깜짝 놀라 깨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 이틀 잠을 못 자게 한 뒤 잠깐 눈을 붙이게 한다. 그래서 잠이 들락말락하면 사정없이 두들겨서 깨우는 것이다.… 그 역시 출감 뒤 요절했다.”
 

   
▲ <출처=공공누리> 서울 장충단공원의 유관순 열사 동상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조흔파는 <왜경고문비화>에서 3·1운동 뒤 체포된 민족지도자들이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전하고 있다.

민족지도자로 존경받는 의암이며 남강조차도 일본 제국주의 경찰은 얼마나 악독하게 고문했는지 느낄 수 있다.

특히 3·1운동과 관련한 체포자, 사망-부상자 수를 자세히 보면 일제가 시위자들을 체포하는 대신 진압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무더기 학살하는 음모를 실행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예컨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체포자가 4만6948명인 데 반해 사망자가 무려 7509명, 부상자가 1만5961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건 체포를 통한 해산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유관순은 이 과정에서 체포된 조선인 4만여명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 3·1운동의 불길 속에서 그 누구보다 밝고도 처절한 불꽃을 태웠다. 18살, 꽃 같은 나이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숨진 그는 겨레의 별이 되고 신화가 됐다.

유관순은 1902년 충청도 천안에서 독실한 감리교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류중권은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여 개화한 사람으로 사재를 털어 ‘흥호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관순은 그 뒤 장학생으로 서울 이화학당(이화여고의 전신)에 입학해 신식학문을 배우며 애국정신을 키웠다. 그는 정동제일교회에 다닐 때도 매일같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기도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가 터지자 관순은 뒷담을 넘어서 다른 5명의 ‘시위특별결사대’와 함께 시위 행렬에 참가했다. 3·1운동의 여파로 학교가 휴교하자 관순은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다.

관순은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우선 가족이 다니던 매봉교회 어른들에게 만세시위에 대해 알리고 천안에서도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렇게 여학생의 몸으로 기독교인들, 동리 유지들, 향교의 유림까지도 설득해 참여케 한다.

시위 예정일이 아우내 장날인 1919년 4월1일로 잡히자 관순은 경찰의 눈을 피해 천안·목천·연기·청주·진천·안성 등지의 학교와 교회 그리고 유림을 돌며 시위 참가를 독려했다.

4월 1일이 되자 관순은 장터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에게 갖은 학대와 모욕을 가했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온갖 압제에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 다 같이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현대 여성들에게 자부심을 주는 존재
 

   
▲ <출처=공공누리> 유관순 열사 영정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거리행진이 벌어졌다. 일본 헌병에 이어 천안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 20여명이 들이닥쳐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의 총검 공격으로 사람들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장터는 피와 주검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날 관순의 아버지 류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도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학살됐다. 관순은 주모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는 천안헌병대를 거쳐 공주검사국, 공주재판소, 서울복심법원재판소,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는 동안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관순은 이렇게 옮겨가는 과정에서 사람이 모인 곳을 지날 때면 으레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 호송하는 헌병들을 당황하게 했으며, 그 결과 칼에 찔리기도 했다.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관순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선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그러자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핀잔을 주자 관순은 일어나 걸상을 들어 검사를 내리쳤다. 최종적으로 관순은 3년에서 7년으로 형이 더 늘어났다.

관순은 감옥에서도 여러 번 만세를 불러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3·1운동의 1주년이 되는 날에도 감옥에서 만세투쟁을 벌이도록 조직했다. 이렇게 감옥에서도 굽히지 않고 수감투쟁을 하던 관순은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 영양실조 등으로 1920년 10월 감방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 <출처=공공누리> 병천 구미산에 세워진 기미독립만세 기념탑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실시한 추천하고 싶은 ‘10만원권 모델’을 묻는 설문에서 유관순은 1위 광개토대왕(40.7%), 2위 백범 김구(17.7%), 3위 신사임당(16.4%)에 이어 15.7%로 4위에 올랐다. 그가 2위권에 육박하는 호감을 네티즌으로부터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유관순이 ‘역사상 그 어떤 남성 위인에도 뒤지지 않는 용기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조흔파의 <왜경고문비화> 유관순 편을 보자.

“…관순은 취조를 받을 때에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곤 했다. 약이 오른 왜놈들은 다른 피의자에게 더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 국부에다가 수도 호스를 박고서 수돗물을 틀어놓기도 했으며… 거의 20개월 동안 하루같이 고문을 받았는데…

추운 겨울에 밖에 묶어 앉히고 수도 호스로 물벼락을 퍼부어 입은 옷과 살이 꽁꽁 얼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면 집어다가 이글거리는 난로 옆에 놓아서 녹히곤 했으며, 어떤 때는 밧줄로 오랫동안 마구 때린 뒤 까부라지면 캄풀주사로 회생시키고 다시 때리곤 했다.”

그래도 관순의 영혼은 꺾이지 않았다. 연약한 육신이 일제의 물리력에 100%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 항전한 것이다.

역사상 유관순이야말로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고 조작돼온 ‘용기’의 월계관을 남성의 이마로부터 들어내 여성에게 씌워준 ‘일대 사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점차 여러 부분에서 남성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현대 여성들에게 유관순의 존재는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슬픔도 힘” 한민족적 논법을 증명하다
 

   
▲ <출처=공공누리> 천안 유관순 열사 동상

또 하나의 요소는 관순이야말로 ‘슬픔도 힘’이라는 매우 한민족적인 논법을 증명하는 최고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제국주의와 독재에 패배하기만 해왔던 제3세계 민중들이 역사를 사랑하는 방식은 바로 죽을지언정 결코 굴복하지 않는 투사나 혁명가에 대한 연민과 존경이라고 할 수 있다.

니카라과의 산디노가, 볼리비아에서 죽은 게바라가, 필리핀의 호세 리잘이, 김구가 그런 대상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죽지도, 지지도 않는 승리자가 있다. 그 승리자와 민중의 관계는 일정 기간의 허니문이 지나면 치자와 피치자(잘못 발전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그것으로 전환하곤 한다.

거기에는 이성과 현실은 존재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감성과 상상력이 없다. 따라서 민중은 역사적으로 현실의 승리자와는 오래 ‘연애’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역사가 이성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기에 유관순이 있는 사이트에선 이 시대에도 눈물과 존경과 놀람과…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감동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 어떤 인물의 사이트에도 이런 종류의 파토스는 없다. 그것은 바로 슬픔의 힘이다.


:: 온 + 오프 항해지도 ::

▶ 중고생
-이화여고 사이트
www.ewha.hs.kr ☞ 이화백년사 ☞ 류관순
-류관순기념 매봉교회 사이트 www.maebong.or.kr 

▶▶ 대학생 이상
-<한국인의 인간상6 근대선각자편> 신구문화사 ☞ 류관순
(절판 상태라 구하기 어려움. 일부 도서관에만 있음).
-세계화폐사이트 www.numerousmoney.com
<아리랑> 님 웨일즈, 동녘
 

불굴의 소녀, 잔다르크 vs 유관순

잔다르크와 유관순은 둘 다 소녀의 몸으로 구국에 나서 민족의 수호자로 승화하는 등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17살에 조국의 위난을 보고 떨쳐 일어났다는 점부터 같다.

1412년 프랑스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다르크는 17살 때인 1429년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선다. 1902년 역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유관순도 17살 때인 1919년 3·1운동에 온몸을 던져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두 사람은 또 종교적 열정과 정치적 신념을 결합해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인간상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잔다르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천사장 미카엘의 계시를 받고 전장에 뛰어들었으며, 유관순도 독실한 감리교인으로서 온갖 고비마다 투철한 신앙심으로 헤쳐나갔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또 직관에서 비롯되는 탁월한 정치적 통찰력을 발휘한다. 잔다르크는 "프랑스가 하느님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았으므로 반드시 승리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역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열던 랭스를 점령해 먼저 대관식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관순은 자신이 왜 그처럼 극한적 비타협투쟁을 벌이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2천만 동포의 10분의 1만이라도 순국할 것을 결심한다면 독립은 저절로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적국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잔다르크의 고향 동레미라퓌셀은 주민들이 프랑스의 샤를 황태자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으로부터 여러 번 습격·약탈·살인·방화·납치의 피해를 겪었다.

유관순의 경우도 가족들이 세우고 다니던 매봉교회가 의병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여러 번 불태워졌다. 두 사람 다 적국에 붙잡혀 타협을 거절한 채 순국한 점도 같다.

유관순은 비록 잔다르크처럼 직접 전쟁터에 나가 결정적인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런 유사성 때문에 프랑스쪽의 인정을 받아 파리 잔다르크기념관에 영정이 봉안되기에 이른다. 일본의 일부 교과서도 그를 사진과 함께 ‘조선의 잔다르크’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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