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질병 해결의 길 제시한 세균학, 면역학의 아버지

21세기, 새로운 세균전이 시작되고 있다. 인류가 ‘세균의 완전정복’을 호언한 것을 비웃듯이 세균의 대대적인 역습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의 절멸을 선포했다. 세균에서 비롯된 전염병은 지나간 시대의 흔적처럼 여겨졌다.

언젠가 다시 천연두 백신을 만들기 위해 엄중하게 경비하며 보관하는 천연두균을 완전히 없애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의학계의 낙관론을 비웃듯이, 세균들은 오만한 인류를 향해 통렬한 어퍼컷을 날렸다.

천연두 정복 2년 뒤 인류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의 공포에 빠져들어야 했다. 1990년대에는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괴질성 에볼라바이러스의 창궐 앞에 몸을 떨어야 했고, 21세기의 문을 연 9·11 테러 직후에는 탄저병균의 ‘백색 분말’ 앞에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역사가 처음 시작되는 것처럼 갑자기 이 미생물들은 인류 앞에 존재를 내밀기 시작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에서 조류독감, 광우병, 구제역에 이르기까지 병균들은 새롭게 변신한 몸으로 무장하고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산학협동’으로 포도주산업 일궈
 

   
▲ 루이 파스퇴르 <일러 제공=한겨레21>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다시 밀어닥친 이 길고도 험난한 세균과의 싸움 한복판에 한 거인이 서 있다.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다. 우리에게는 우유살균법으로 더 친근하게 알려진 이름이지만, 그는 세균학과 면역학의 아버지이고 광견병과 탄저병 백신 등 많은 백신을 만든 화학자이자 의학자이다.

바로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19세기 이후 인류에게 가장 다양하고 광범한 혜택을 가져다준 인물 가운데 랭킹 1~2위를 다투고 있다.

1864년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의 한 실험실. 화학과 교수인 파스퇴르가 목이 구부러진 플라스틱병을 앞에 놓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끓인 설탕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탕물은 몇주일째 아무 변화도 없이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미 이 조그만 유리병이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공기가 차단된 유리병 속의 물체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생명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그것이 바로 이 실험의 요체였다.

한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기원한다는 자연속생설(自然續生說)이 수백년을 지배해온 자연발생설을 뒤집는 순간이었다. 나아가 공기를 차단하면 어떠한 생명현상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또 다른 생명체들이 공기 속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이름은 바로 ‘세균’이었다.

   
▲ 파스퇴르가 고안한 S자형 유리 플라스크들 <그림 제공=한겨레21>

파스퇴르는 화학자로서 출발했다. 농업지역인 스트라스부르대학의 화학과 교수로서 그는 포도주를 상하게 하는 원인의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인근 농장주들로부터 연구 의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효모’다. 파스퇴르는 효모가 포도주 맛을 결정하는 핵심임을 깨닫고는 곧 가장 적합한 효모를 배양해냈다. 나아가 포도주 맛을 상하게 하는 나쁜 세균들을 살균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 그의 이름을 딴 저온살균법인 ‘파스퇴라이제이션’(Pasteurization)이다. 산학협동의 결과로 프랑스의 포도주는 세계 제일의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의 연구는 이처럼 의학·화학·생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치는 것이었고 그 밑바닥에는 늘 세균이라는 작은 생물이 있었다.

파스퇴르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대신 비과학적이고 심지어 미신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파스퇴르는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입증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는 탄저병 세균을 분리해내고 그 병균과 백신을 각기 다른 그룹의 양떼에게 주사했다. 그 결과 병균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것과, 백신을 통해 그 질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증명했다.

이제 사람들에게 질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몸이 아프다면, 그것은 어딘가가 세균에 감염됐다는 것을 뜻하게 됐다.

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질병의 원인은 이른바 ‘나쁜 공기’(miasma)거나 ‘체질’이었다. 나쁜 공기란 오늘날과 같은 환경오염이 아니라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사악한 기운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질병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파스퇴르는 세균의 존재를 ‘발견’한 데 이어 그 세균을 약화시켜 인체에 주입하면 면역기능이 생긴다는 것도 입증했다.

과감한 공개실험으로 승부수
 

   
▲ 파스퇴르는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에 가까운 과학자다. 끈질기게 반복된 시행착오를 견뎌냈고, 탁월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이제 질병은 증상이 아니라, 그 증상을 일으키는 특정한 세균들에 의해 분류됐다. 그리고 치료는 그 세균들을 말살하는 쪽으로 모아졌다. 말하자면 대세균전이 치료법으로 확립됐다.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의 개발은 바로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세균학과 면역학의 문을 동시에 열어젖혔고,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알 수 있는 미시의 세계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전쟁터임을 보여주었다.

전쟁터는 늦게 발견됐지만, 전쟁은 빠르게 진행됐다. 1880년대까지 인간이 개발한 세균백신은 천연두, 광견병, 탄저병 등 겨우 열손가락을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20년 뒤 수백종의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과 그 백신이 탄생했다. 갑자기 세균은 인류생활을 지배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피묻은 손으로 수술하던 의사들이 진료 전에 반드시 손을 씻도록 된 것도 바로 세균전파설 때문이다. 모든 병원이 의무적으로 소독을 하게 됐다. 이제 인간들은 깨끗해 보이는 옷감, 음식 그리고 생활용품에서도 세균을 발견해냈다. 어디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신체적인 접촉은 물론, 잔을 돌리거나 키스조차도 위험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악수도 위험했다.

인간들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의 영역은 제한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지금 잡고 있는 지하철 손잡이에는 수백만 마리의 세균이 서식하고 있습니다”라는 으스스한 문구로 시작하는 멸균비누 광고는 바로 이 시대에 뿌리를 둔다고도 할 수 있다.

파스퇴르는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에 가까운 과학자다. 끈질기게 반복된 시행착오를 견뎌냈고, 탁월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세균혁명’에 따라 인간의 평균수명은 기록적으로 늘어났다. 세균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발명품인 페니실린을 끝으로 정말 인간들은 세균의 세계를 ‘정복’했다고까지 믿었다.

파스퇴르는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에 더 가까운 과학자다. 무엇보다 그는 끈질기게 반복된 시행착오를 견디는 인내의 미덕이 대단히 뛰어났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도전자들과 일일이 맞서 싸워야 했고, 뇌졸중에 걸려 몸이 마비되는 병마와도 싸워야 했다.

인내보다도 더 탁월했던 것은 승부사로서의 기질이다. 어느 의미에서 그의 과학적 명성은 실험실에서 확립되었다기보다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미완성품을 과감하게 공개실험을 통해 입증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광견병백신 역시 아직 동물실험조차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한 것이다. 미친 개에게 물린 9살 난 소년에게 주사약을 투입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도박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체실험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그의 모든 공개실험은 성공으로 끝났다.

나폴레옹 제치고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에

그는 과학자의 윤리라는 기준에서 의심받을 수 있는 행동도 여러 차례 벌였다. 사실 몇몇 실험은 그의 조수나 공동연구자의 실험을 가져다 자기 이름으로 내건 것이다. 그러나 국제적인 그의 명성은 그런 비난을 모두 묻어버렸다.

그가 자연속생설을 확고한 신념으로 가졌던 것은 과학적 발견의 결과라기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신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최근 과학사 학자들은 그의 연구노트를 검토한 결과 그가 자연발생설에 유리한 실험결과들을 고의적으로 무시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광견병백신의 발명도 사실은 그 원인균을 확인하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는 “세균이 이 병을 전파한다”고 주장하고 백신까지 만들기는 했지만, 광견병 세균은 전자현미경으로나 관찰할 수 있는 바이러스다.
 

   
▲ 루이 파스퇴르가 말년에 세운 파스퇴르연구소 <사진 제공=한겨레21>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서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나폴레옹 등을 제치고 그에게 1위의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다. 

파스퇴르가 말년에 국가적인 의학연구를 위해 연구소를 세우자고 제안했을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은 기꺼이 거액을 내놓았다. 바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는 ‘파스퇴르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80년대 말 최초로 AIDS바이러스를 확인해냈다.

한번 생각해보라. 신생아일 때 맞는 그 종합백신이 아니라면, 당신이 지금 살아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 온 + 오프 항해지도 ::

▶ 중고생
-<미생물의 발견과 파스퇴르> 루이즈 로빈스,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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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이상
-<왜 하필이면 세균이었을까> 존 월러, 몸과 마음
 

천연두와 제너, 그리고 지석영

 
   
▲ 천연두 백신의 개발자로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에드워드 제너 <사진 제공=한겨레21>
몇년 전까지만 해도 비디오테이프의 첫 부분에선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환, 마마보다도 더 무서운 음란물 테이프….” 얼마나 천연두가 끔찍했으면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음란물 경고문구에까지 등장시켰을까? 요즘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천연두는 인류에게 그만큼 끔찍한 재앙이었다.

치사율 30%에, 심각한 곰보 자국을 얼굴에 남기는 천연두의 재앙을 막기 위해 인류는 온갖 경험과 지혜를 짜냈다. 심지어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정상인의 몸에 주입하는 방법도 있었다. 인도에서부터 유래한 전통예방법인 ‘인두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천연두에 감염되는 경우가 많은 등 부작용이 심했다. 어쨌든 이 방법은 초보적인 면역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천연두 백신의 개발자로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에드워드 제너의 업적은 이 인두법을 우두법으로 바꾼 데 있다. 시골 의사였던 제너는 천연두에 걸린 소에게 감염된 적이 있는 농부들은 인간천연두에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연두에 걸린 소에게서 고름을 짜내 인공적으로 사람의 몸에 주입했다. 동물실험조차 거치지 않은 생체실험이었다. 다행히 피시술자는 성공적으로 천연두에 면역기능을 갖게 되었다. 소천연두균은 인간천연두균보다 독성이 약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항체를 생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제너의 시대에 면역이나 항체와 같은 개념은 물론 존재하지 않았고, 천연두가 세균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제너 자신도 그런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는 경험해서 아는 일들을 과학적으로 재구성한 것뿐이다.

천연두 백신의 개발로 그는 한순간에 부와 명예를 얻었다. 국왕으로부터 직접 여러 차례의 하사금을 받았고, 자신의 발명품을 팔아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 제너의 가장 큰 반대자들은 인두법의 시술로 돈을 벌던 의사들이었다.

한국에는 1882년 지석영이 처음으로 우두법을 들여왔다. 개화파로서 서구 의학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일본에서 우두를 들여왔다. 맨 처음 자신의 2살 난 처남에게 시술해 이 땅에 첫 번째 종두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수구척사파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갑신정변 때 지석영의 종두학교는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버렸고, 그는 도피해야만 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영결식에서 영결사를 읽은 것으로 전해지는 친일 행적 때문에, 지석영은 지난해 고향인 부산시가 선정하는 ‘부산을 빛낸 21인’의 명단에서 빠지기도 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벤처, 생명의학

19세기 자본주의의 팽창은 단지 해외에 식민지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갈 수 없는 곳, 인간이 볼 수 없는 것들…. 그야말로 세계의 모든 것들이 이른바 식민(Colonization)의 대상이었다.

 

   
▲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신화는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세균 감염에 죽어가는 크림전쟁의 양상 때문에 가능했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세계일주 열풍, 극지방을 먼저 정복하려는 각 나라들의 치열한 경쟁은 국가적 명예를 건 ‘벤처올림픽’과도 같았다.‘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신화는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세균 감염에 죽어가는 크림전쟁의 양상 때문에 가능했다.

미지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19세기 서구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균을 향한 정복전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뤄졌다.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한다는 사명감만이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현미경으로 보이는 세계, 새로운 생물종을 남보다 먼저 발견하고 정복하려는 사회적 욕망이 의학적 탐구의 열정과 맥을 같이하였다. 근본적으로 전쟁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제너를 비롯해서 프랑스의 파스퇴르, 독일의 코흐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세균전을 수행하는 장군들이고 전략가들이었다. 20세기 중반의 미국-소련 사이의 우주경쟁을 무색케 하는 의학전, 화학전이 열강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질병 연구는 또 다른 특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전쟁터에서 군대의 전력을 보호하는 것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는 군인들보다 병에 걸려 죽는 군인의 수가 거의 두배에 이르렀다. 아주 작은 부상조차도 병원균이 우글거리는 야전병원에서는 환자를 그대로 감염에 노출시켜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형편이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신화는 군인들이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병으로 죽어가는 크림전쟁의 양상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처럼 2차감염 등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면 그런 신화의 약발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질병의 연구는 국가전력 증강계획의 일부이기도 했다. 제너의 종두법에 따른 천연두 백신을 제일 먼저 사들이도록 지시한 것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었다. 제너는 나아가 영국 정부의 청탁으로 천연두 백신을 프랑스에 판매하는 대신에 프랑스에 포로로 잡힌 영국군의 석방을 이뤄내기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미국 국방부는 질병과 관련한 벤처 연구에 적잖이 투자하고 있으며, 그 연구 결과를 최우선적이고 독점적으로 미군에 활용하는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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