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논쟁 남송의 한족 명장...교과서 통한 격하 움직임에 전 민중적 반발

“대학 동창 하나가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를 백족(白族) 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분증에는 ‘한족’(漢族)이라고 적혀 있다. 또 다른 회사 동료는 성이 왕씨다. 몽골족인데 호적지와 출생지가 다 (한족 문명의 중심지인) 하남성 남양으로 돼 있다.

산서성과 내몽골자치주를 여행할 때 운전을 맡은 기사는 산서성의 한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할아버지가 몽골족이라고 털어놓았다. …여기 무너져내린 만리장성의 모습을 보면 이곳에서 엄청난 역사극들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를 주름잡던 그 많은 소수민족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중국의 한 네티즌이 쓴 글 ‘한족, 중화민족 그리고 악비정신’ 가운데)

 

   
▲ <중국통사>에 실린 악비의 그림. 그는 12세기 초 여진의 금나라에 맞서 싸운 남송의 명장으로, 위난에 빠진 송나라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었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중국 역사상 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

2003년 12월 중국은 갑자기 때 아닌 ‘민족영웅 논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12월9일 <베이징청년보> 등 언론들이 “신판 고등중학교 역사 대강에서 ‘악비(岳飛)와 문천상은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므로 더 이상 ’민족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정의했다”고 보도하면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sohu.com’을 비롯해 중국 유수의 사이트는 이 조처를 비난하는 글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우스워 죽을 지경이로다. …이 귀여운 변증법과 중국 역사학자들이여! …이건 정말 중국 역사상 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이다.”(‘sublexical’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

“진짜 열받는다. 나는 지금까지 정말로 조국을 사랑했다. 어릴 적부터 국가의 민족영웅들을 숭배해왔는데… 이렇게 악비가 민족영웅이 아니라면… 진짜 사람 마음을 소름끼치게 한다.”(‘운해옥궁연’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

“애국은 당연히 불변하는 정의이다. …한번 물어보자. 어느 날 중국이 일본을 병합했다고 치자. 그러면 일제 침략에 대항해 싸운 장군들은 결국 애국을 한 게 아니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한 나라가 됐는데 무슨 애국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단 말인가?”(‘람성목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

권위 있는 대학교수들마저 공개적으로 당국을 비판하고 나섰다. 중국 사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원로학자 대일 박사와 중국 송사(宋史)연구회의 왕증유 회장까지 나서 어떻게 교육 당국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일부 네티즌들과 학자들은 당국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압도적인 비판 여론에 휩쓸려 소수로 몰려버렸다.

기록적인 경제성장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엑스포까지 잇따라 유치하고, 나아가 최초의 유인 인공위성 선저우(神舟) 5호의 발사 성공으로 국가적 자존심과 국민적 통합 열기가 한층 고조되던 중국에 이상한 여론의 먹구름이 형성돼버린 것이다.

도대체 악비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일까?

   
▲ 악비의 어머니가 아들의 등에 '정충보국'이라는 문신을 새겨주고 있다. 악비는 가장 한족적인 가치관에 투철한 이미지를 지녀왔다. <그림 제공=한겨레21>

악비는 12세기 초 여진의 금나라에 맞서 싸운 남송의 한족 출신 명장이다. 당시 송나라는 금나라의 공격으로 수도 개봉을 빼앗기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마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남송의 이름으로 왕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악비는 농부 출신이었지만 문과 무를 겸비한 장군이었다. 그는 금나라 군사의 대공세로 위기에 빠진 군을 이끌고 항전에 나서 여러 번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1134년 그는 북벌에 나서 호북성에서 하남성까지 진격해 위난에 빠진 송나라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었다.

모두 세 차례 북벌에 나선 그는 한때 송나라의 수도였던 개봉 인근 정주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금나라군에서는 “오히려 산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악가군(악비의 군대)을 무너뜨리기는 정말 힘들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그러나 주전파이던 악비는 화평파인 재상 진회의 견제를 받는다. 금나라와 화평을 추진하던 진회는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황제 고종을 움직여 악비군 등 주전파 장군들을 군대로부터 격리시키는 방식 등으로 지휘권을 제한시켰다.

39살에 반란죄 뒤집어쓰고 독살당해

   
▲ 악비가 쓴 제갈량의 '전출사표'. 그는 금나라를 공격하는 북벌을 제갈량의 위나라 정벌과 일체화시켰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이런 화평의 움직임에 반발한 악비가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자, 진회는 기습적으로 악비와 그 아들 악운에게 반란죄를 뒤집어씌워 독살해버렸다. 그때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악비는 후세에 충절과 공적을 인정받아 죽임을 당한 지 37년이 지나서 ‘무목’이라는 시호를 추증받고, 70년 뒤에는 ‘악왕’으로 추서된다.

무엇보다 그는 (1) 한족의 송나라가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차례나 이민족에게 시달리던 시기에 무력 면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인물, (2) 가장 중국적인 문화를 꽃피운 시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송왕조 때 명장이면서도 시문에 능한 등 문화인물의 성격을 함께 갖췄다는 매력, (3) 어머니가 등에 새겨준 ‘정충보국’이라는 문신이 상징하듯이 가장 한족적인 가치관에 투철한 인물 이미지, (4) 젊은 나이에 아들과 함께 한을 품고 죽은 비극적인 성격 등이 어울려 오늘날까지도 역사상의 스타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악비에 대해 중국 당국이 전격적으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격하시키겠다니 전 사회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의 핵심이랄까 본질은 특정 인물의 평가라는 겉모습을 훨씬 뛰어넘는 폭발력을 안고 있다. 중국 당국이 역사전쟁을 통해 ‘이념의 만리장성’과 함께 ‘민족의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현대 중화민족의 통합성·정체성을 정면으로 뒤흔드는 ‘민족폭탄’적 요소가 불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악비가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라는 논리의 근거는 대략 이렇다.

(1) 악비는 금나라 사람과 싸웠다. 그런데 당시 금과 송은 ‘형제끼리 담을 쌓고 집안에서 싸운 것’이다. 따라서 악비는 국가와 민족을 보위한 공로가 없다. 당연히 그를 민족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다.

(2) 중국은 50여개 민족으로 이뤄진 대가정이다. 한족중심주의적인 악비를 민족영웅이라고 하면 그건 한족중심주의의 노골화 그 자체이다.

(3) 악비가 남송을 보위할 무렵 고종을 황제로 한 당시의 남송은 극도로 부패해 망해야 마땅한 나라였다. 따라서 망해야 할 나라를 보위한 악비는 역사의 흐름을 거역한 것으로써 민족영웅이라고 할 수 없다.

(4) 외래 침략자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민족영웅으로 정의한다면, 악비는 그냥 한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악비가 활약하던 당시 중화민족은 일체화되기 전이었다. 중앙정부가 직접적으로 서장·운남·몽골·신장에 행성을 설치하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관리를 시행한 것은 원나라 이후부터인 것이다.

한족중심주의만 자극하고 끝날 수도

신악비론에 대한 민중적인 반발은 중국 당국의 의도대로 사태가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강력한 경고의 성격을 띤다. 비판의 뼈대는 이렇다.

첫째, 신악비론에서 제시하는 결과론적인 접근방법은 역사와 민족의 정의를 결정적으로 해칠 것이라는 논리이다. 예컨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현실화됐다면 왕정위 등 친일파의 거두들은 모조리 영웅이 되고 항일전쟁 중 숨진 3500만명의 영웅들은 모두 천벌을 받은 셈이 된다.

둘째, 악비의 부정은 중국 과거사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침략전쟁이 전혀 없었다는 대단히 비합리적이고 황당하기조차 한 논법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셋째, 악비의 가치는 시대와 민족의 한계성을 넘어 통시대적인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송·금 시대의 악비에 대해 지금 여러 민족이 영웅으로서 존경하는 것은 외부의 침략과 압박에 저항하는 정신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런 여론에는 싱가포르 등의 해외 화교들까지 가세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결국 중국 당국은 후퇴하는 자세를 취한다. 중국 교육부 기초교육과정교재발전중심의 관계자는 기자회견을 열고 “원래 내용과 보도된 내용이 다르다”고 밝혔다.

실제로는 교과서가 아닌 참고서인 ‘학습지도’에서, 그것도 참고자료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일찍이 50년대 어떤 학자가 악비를 민족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민족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와 그 대비책으로 전문가와 학자들의 개인적인 관점을 정리해 보급했다.”

이 논쟁은 중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는 중국 당국의 의도와는 달리 한족중심주의를 자극하고, 비한족들도 그 귀추를 주시하도록 이끌고 있다.

과연 악비 논쟁은 어디로 갈 것인가? 중화민족의 운명이 사실상 거기 숨겨져 있다.


:: 온 + 오프 항해지도 ::

▶ 중고생
-<중국오천년> 진순신/다락원

▶▶ 대학생 이상
-<문화 악비> 황보중행/중국화교출판사(중국책)
-<중국통사> 광명일보출판사(중국책)
-<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기행> 진순신/예담
 

악비를 죽인 진회는…

 
   
▲ 모욕적인 형상으로 만들어진 진회 부부의 석상. 그는 중국 역사에서 '민족배신자'로 평가받아왔다. <사진 제공=한겨레21>
‘중국발 역사논쟁’에서 등장한 신악비론은 매우 이상하고 황당한 논리적 귀결점을 향하고 있다. 그 논리대로라면 중국 역사에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민족배신자들’은 전면적으로 재해석되거나 새로 기술돼야 한다.

당장 악비를 죽인 남송의 화평파 재상 진회는 더 이상 민족반역자가 아니게 된다. 오히려 ‘민족통일적 과정’에서 중화민족 대가정의 가치를 일찌감치 꿰뚫어 보고 중화민족 전체의 힘을 분산시킬 송금전쟁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한 이른바 ‘민족영웅’이 된다.

그가 화평파의 우두머리로서 주전파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악비처럼 죽이거나 숙청한 일들도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정당화돼야 한다.

이에 따라 악비를 떠받들기 위해 악왕묘 앞에 세워 침세례 등 모욕을 받도록 만든 진회 부부의 조각상은 없애거나 새롭게 세워야 할 판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악왕묘 자리에 오히려 진회를 위한 묘를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역사상 주전파의 피와 죽음을 딛고 권세와 천수를 누린 진회는 이제는 더 큰 영화를 누려도 될 판이다.

몽골의 중원 점령과 함께 대거 등장한 한족 출신의 토호들인 이른바 ‘한간세후’(漢奸世侯)들 역시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전령사들이 된다. 이들에게 붙인 간신의 ‘간’자를 떼는 등 실질적인 명칭도 바뀌어야 한다.

쿠빌라이의 장군이 되어 몽골의 벌송군 총대장 바얀과 함께 전공을 세운 사천택 같은 사람은 중국 통일을 실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새로운 ‘민족영웅’으로 기록돼야 한다. 쿠빌라이의 참모로 활약했던 유병충, 장문겸 같은 유학자들 역시 그렇다.

명말청초 때 명을 배신하고 청을 위해 일한 오삼계 역시 민족통일에 기여한 인물로 정리돼야 한다. 오삼계는 난공불락의 요새 산해관을 관할하고 있으면서 명의 반란군인 이자성군으로부터 산해관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더 큰 강적인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사실상 명의 멸망을 결정지었다.

비록 그가 나중에 삼번의 난을 일으켰지만, 어쨌든 민족통일적 관점에서 보면 청의 대의에 순종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통일에 기여한 공이 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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