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시스템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벤처창업을 상징하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설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는 압록강가에서 목욕을 하던 하백(河伯·물의 신)의 아름다운 세 딸을 보고 연심을 느낀다. 그는 결국 하백과 싸움을 벌여 큰딸 유화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가 유화를 지상에 그대로 두고 하늘로 올라가자 하백은 크게 분노한다.

‘네 얼굴이 반반해서 그 따위 욕을 당했으니 너는 내 딸이 아니다’면서 징벌로 유화의 입술을 석자나 늘여놓고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 던져버렸다. 유화는 우발수에 사냥을 나온 부여의 금와왕을 만나 궁중으로 들어간다. 유화는 곧 태양의 빛이 되어 다시 찾아온 해모수의 어루만짐을 통해 임신을 한다.

유화는 아기 대신 닷되들이 알을 낳는다. 부여 궁중에서는 그 알을 불길하게 생각해 마구간에도 버려보고 급기야 산속에까지 버렸으나 오히려 알은 뭇짐승의 보호를 받는다. 결국 알에서는 준수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 '길 떠나는 주몽'과 '말 달리는 주몽'. 평양시 동명왕릉 옆 전각의 내부 그림들이다.(<역사스페셜4>,효형출판) <사진 제공=한겨레21>

아이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활로 파리를 잡는 등 백발백중의 활솜씨를 보인다. 아이는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주몽으로 불렸다. 주몽이 활도 잘 쏘고 용력도 있고 부하도 아끼고 덕까지 갖춰 사람들의 존경을 받자 대소왕자를 비롯한 일곱 왕자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한다.

주몽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망명을 결심한다. 유화 부인은 아들의 망명을 위해 준마를 고른다. 주몽이 좌천돼 책임을 맡고 있던 목장으로 가 채찍을 들어 말들을 갈겨 가장 높이 뛰어 울타리마저 성큼 넘는 말을 골라 그 혓바닥에 바늘을 꽂아놓은 것이다. 말은 빼빼 말라 결국 주몽에게 하사품으로 내려진다.

주몽은 그 말을 다시 잘 먹여 명마로 되돌려놓은 다음 남쪽으로 향한다. 유화 부인은 아들에게 보리를 비롯해 오곡의 씨앗을 준다. 오이, 마리, 협부와 함께 떠난 주몽은 모둔곡에서 재사, 무골, 수거 세 사람을 만난다. 주몽 일행은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운다. 고구려가 탄생한 것이다.

그때 주몽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주몽은 이웃의 말갈족을 공격해 굴복시킨다. 그 뒤 주몽은 비류국의 송양왕과 경합을 벌여 비류국까지 흡수한다.

   
▲ 동명성왕 상상도.(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사진 제공=한겨레21>

재위 4년째 되는 해 7월 골령에서 검은 구름이 이레 동안 가리워서 산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속에서는 수천명이 떠드는 소리와 집짓는 소리만이 들릴 뿐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왕은 ‘이것은 하늘이 나를 위해 궁성을 지어주시는 것이다’라고 했고, 과연 7일이 지나자 화려한 성곽과 궁궐이 완성된다.

왕은 하늘에 제사하고 입성한다. 재위 6년 고구려는 행인국을 합병한다. 재위 19년 그가 향년 40에 세상을 뜨자 후세 사람들은 그를 동명성왕이라고 했다.”(이규보 <동명왕편>)

주몽은 고씨가 아니라 해씨?

고구려 건국설화는 매우 낭만적이다. 배경도 제법 아름답고 스케일도 크다. 그런 설화에서 비과학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좀더 진실에 가깝도록 조명하는 작업을 역사학자들은 벌여왔다. 이제는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중국쪽의 갑작스런 역사 공세까지 겹쳐 진실을 찾는 작업은 훨씬 복잡하고 어렵게 돼가고 있다.

해모수는 부여족의 한 지도자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는 하백족과 싸워 이겨 유화와 결혼한 뒤 결국에는 이탈 도주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따라서 주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씨’가 아닌 ‘해씨’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씨’를 ‘해’(태양)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모수를 우리 옛말에 비춰 해석하면 ‘헴수’ ‘갬수’ ‘검수’가 되는데, 검은 신(神)을 말하고 수는 남성을 말하니 결국 ‘남신’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그런 그가 고구려 왕조의 혈통의 신비화를 위해 신으로 격상된 셈이다.

   
▲ 동명성왕은 고구려 건국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새로 단장한 봉분.(<역사스페셜4>,효형출판) <사진 제공=한겨레21>

난생설화는 일반적으로 남방의 설화로 알려지는데 고구려에서도 채용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설화도 난생설화를 채용하고 있다. 유화의 입술이 ‘석자’나 늘어지는 것은 조류숭배 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결국 늘어진 입술을 여러 차례 잘라낸 뒤에 벙어리에서 벗어나 말을 하게 된다. 이런 조류숭배 사상은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 설화에서도 발견된다.

“알영이라는 우물가에 한 계룡(鷄龍)이 나타나더니 왼쪽 옆구리로 옥 같은 여아 하나를 낳았는데 그 입부리가 닭같이 뾰족하여 월성 북쪽 냇물가에다가 그 입부리를 떼어버리고 나니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일부에서는 알영 대신 아리영(阿利英)이라고도 적혀 있다. 이 ‘알’ ‘아리’라는 말이 다 우리 옛말에서는 거룩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TV드라마 <인어아가씨>의 아리영도 여기서 따온 것이 아닐까?)

난생설화와 조류숭배 사상이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설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탈 도주한 것으로 보이는 아버지쪽의 해모수는 고구려 역사에서 그렇게 추앙받지 못하나, 어머니쪽의 유화 부인은 고구려의 농업신으로 살아남아 추앙받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아직 모계중심적 사회가 강하게 남아 있는 걸 반영한 듯하다.

주몽의 건국 과정은 오늘날 관점에서도 매우 눈길을 끈다. 어느 의미에서는 주몽은 유능한 벤처창업가로서 이른바 인수·합병(M&A)에 대단히 능했던 대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주몽의 남하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거부이자 새로운 벤처창업을 상징한다. 기존의 틀을 버리고 새 판을 벌인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초기 잠재역량(지분)은 북부여를 함께 탈출한 오이, 마리, 협부 등 북부여 세력이다.

부여에서 분사해 ‘중소기업 고구려’를 세우다

거기에 재사, 무골, 묵거 등 모둔곡 세력이 합류한다. 이 과정은 우호적 인수·합병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 뒤 졸본천을 중심으로 한 졸본부여(중국 요녕성 환인시 지역)의 토착세력과 연합하는 제2차 인수·합병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선 ‘정략결혼’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졸본부여의 연합세력을 대표하는 것은 이 지역의 유력자인 소서노이다. 졸본의 부호 연타발의 딸로 우태와 결혼해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던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 (일부에서는 두 아들이 주몽과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하지만, 별다른 후계 논쟁 없이 북부여에서 내려온 유리로 결정된 것을 보면 역시 우태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다.)

소서노는 주몽과 재혼한 뒤 전 재산을 기울여 주몽의 창업을 돕는다.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과의 제3차 인수·합병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큰 틀에서는 우호적 인수·합병이라고 할 수 있다. 비류국의 송양왕이 스스로를 ‘선인’이라고 한 점에서 이 나라는 단군의 후손이자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비류국이 소노 집단을 상징하며, 비류국의 합병은 바로 고구려연맹체에서 주도권이 주몽의 계루 집단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파악한다. 나중에 송양왕은 ‘송양후’ 또는 ‘송양왕’으로 명칭을 유지한다.

재위 6년에 있었던 행인국(혜산 일대) 정벌과 재위 10년에 있었던 북옥저(함경도 지역) 정벌은 적대적 인수·합병의 형태를 띤다. 두 나라는 그대로 고구려의 성읍으로 편입됐고 스스로의 지분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이처럼 주몽은 우호적 인수·합병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고구려의 영역을 확대해나가는 데 성공한다. 부여라는 기존틀에서는 성장할 수 없는 사업 부문을 이끌고 별도로 분사해 고구려라는 중소기업을 세운 뒤 우호적, 적대적 인수·합병 등을 적절히 결합시켜 경쟁력 있고 성장성이 높은 첨단기업으로 발전시킨 셈이다.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때는 동명성왕 때와는 달리 정벌 방식이 기본으로 정립되고 있다. 적대적 인수·합병과 신사업 진출이 더욱 일상화된 셈이다.

북한의 독특한 역사론

한편 북한은 독특한 역사론을 전개해 눈길을 끈다. 주체사관을 내세우는 북한의 고구려 건국에 대한 논리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고구려는 이제까지 알려진 것보다 240년을 더 거슬러올라가 기원전 277년에 건국됐다. (2)그 고구려의 왕계도 지금과 달리 2대부터 6대까지 다섯 왕이 더 있었다. (3)동명왕릉이 고구려의 평양 천도 때 환인에서 평양으로 옮겨와 지금도 존재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북한의 주장은 그 대담한 발상법만큼이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앞으로 중국과 벌어질 역사 논쟁에서 북한과 협력하게 될 우리 역사계로서도 북한의 논법은 비켜갈 수 없는 논쟁거리다.

고구려의 건국을 상징하는 동명성왕은 이처럼 건국 연대, 건국 당시의 정확한 위치와 영역, 동명왕 이후의 역대 왕계도, 고구려 건국세력과 우리 민족의 연관성 등 미해결된 주제들로 둘러싸여 있다. 과연 고구려는 21세기 한민족에게 무엇인가? 저마다 역사책 하나라도 펴봐야 할 때다.

[온 + 오프 항해지도]

▶ 중고생
-<한국의 역사1> 이상옥/마당
-<역사스페셜4> KBS역사스페셜/효형출판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창해
-<삼국사기 상> 김부식/명문당
-고구려연구회 사이트

▶▶ 대학생 이상
-<중국정사조선전 1, 2권> 국사편찬위원회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 천관우/정음문화사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사계절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사이트 www.chinaborderland.com

중국 학자들, 북한에 자극받았나
 
   
▲ 북한과 중국 역사학자들의 설전을 목격했던 고구려연구회 대표 서길수 교수.  <사진 제공=한겨레21>
중국에서는 1990년대까지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구려는 중국사’라는 주장이 나오긴 했어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 북한은 1979년 주체사상에 입각해 연구한 성과를 토대로 <조선전사>를 새롭게 내놓는다.

특히 고구려사를 다룬 <조선전사> 3권에서는 대외투쟁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다뤄 고구려의 ‘반침략적 애국투쟁 정신’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내용은 중국 학자들을 상당히 자극했다고 평가된다.

마침내 북한과 중국은 공식석상에서 고구려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기에 이른다. 고구려연구회 대표 서길수 교수가 전하는 1993년 8월11일 중국 집안에서 열린 ‘제1차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토론회’의 논쟁 장면을 보자.

“이 토론회에는 중국, 한국, 북한, 일본, 대만, 홍콩에서 많은 학자들이 참석했다. …첫날 종합토론에서 북경대의 정인갑 교수가 (고구려의) 귀속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나섰다.

당시 집안박물관 부관장이던 경철화가 ‘나 개인의 학설이자 중국 동북지방 역사 및 고고학의 성과인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서기 427년부터는 고구려가 조선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 문화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지방의 용(龍)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 김일성대학의 역사학계 원로인 박시형(당시 84살) 교수가 반박하고 나섰다. ‘과거의 고조선-고구려 땅이 지금 중국 영토가 됐다고 해서 그 역사를 어떻게 중국사에 갖다 붙여 중국 소수민족 운운하는가 이해할 수가 없다.

고구려야 옛날부터 고조선-부여와 함께 중국인들 스스로가 역사책에서 동이족이라고 독립해 지칭했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란 서술은 역대 어느 사서에도 없다.’

그러자 다시 중국쪽 심양동아연구중심 손진기 주임이 되받는다. ‘우리들이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중앙 황조에 예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후예는 조선족이라고 할 수 없고, 대부분은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이 됐다.’ 당시 회의에 참가한 한국의 학자들은 경악했다. 한번도 고구려 역사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던 것이다. 이런 충격은 중국인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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