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역사상 가장 광대한 땅을 정복한 광개토대왕이 부활한다

선왕들의 치욕을 딛고 한반도 역사상 가장 광대한 땅을 정복한 광개토대왕이 부활한다 

분단되면서 우리의 조국은 사실상 ‘섬나라’가 돼버렸다. 젊은이들이 방학이면 갖가지 차량에 올라탄 채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달려갈 수 있는 북쪽 길이 막힌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조국을 동강낸 철조망의 벽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우리가 부모 세대에게 분단의 시작에 대해 원망했듯이, 이제 우리는 자녀 세대에게 분단의 지속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할 판이다.

따라서 통일은 우리에겐 단순한 민족의 재결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잃어버린 대륙을 향해 날아오르는 화려한 비상이 민족 재결합의 감동 뒷면에 장엄하게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제공=한겨레21>

끝없는 정복전의 동기, 원한!

우리에게 해방의 꿈, 대륙의 꿈, 천하의 꿈을 안겨주는 존재가 있다. 광개토대왕이다. 20세기 역사에서 우리 민족에게 자연스럽게 생성된 그런 꿈이랄까 잠재의식에 이어 21세기 벽두부터 몰아치고 있는 중국의 역사전쟁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더더욱 존경받는 한국인이 돼가고 있다. 과연 광개토대왕은 부활하는가? 우리의 꿈은 이뤄질 것인가?

광개토대왕(재위 서기 391~413년)의 휘는 담덕(談德)이다. (이름도 좋다! 덕을 말하다, 담덕.) 역사서에조차 “어려서부터 체격이 뛰어나게 훌륭했으며 뜻이 고상했다”고 기록된 그는 제왕학-군사학을 마스터했다.

10대 나이의 태자 때 이미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갔다. 동서남북 모든 방면을 향해 달려나간 그는 마침내 우리 민족사에서 최대로 꼽히는 정복 군주가 된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사방으로 치닫게 했을까? 그의 끝없는 정복전의 동기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제1차적 동인은 ‘원한’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채 아직 충분히 강력하게 성장하지 못한 국가는 필연적으로 주변 국가들과 싸울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선 어쩔 수 없이 치명적인 상처도 입게 마련이지 않은가.

담덕이 물려받은 고구려는 강력한 정복국가-완성형의 국가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서기 371년 평양까지 치고 올라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 처참한 지경에까지 밀리고 있었다. 백제쪽의 위대한 영웅은 근초고왕이다.
 

   
▲ <제공=한겨레21>

원한은 서쪽으로도 깊다. 모용씨의 선비족과 겨루는 과정에서 서기 342년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는 치욕을 겪었다. 이때 선왕 미천왕의 주검을 빼앗기고 태후를 포로로 붙잡혀가게 하는 극악한 비극도 경험한다.

고구려는 설욕을 위해 먼저 남쪽을 향했다. 고국원왕의 아들이자 담덕의 큰아버지인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죽은 지 4년 뒤인 서기 375년을 시작으로 376년, 377년 그렇게 해마다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는 담덕도 태어나 있을 때다.

역사학자 김용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처음 말을 배우고 사물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때에 담덕이 본 것은 고구려 군대가 백제를 공격하러 가는 장면들이었다. 어린 담덕에게 고구려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적이 백제라는 사실은 뇌리에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 즉위 다음해인 서기 392년 7월 왕은 친히 4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황해도 지역을 공격해 10여개 성을 빼앗았다. 9월에는 북쪽의 거란을 쳐 남녀 500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거란에 빼앗겼던 백성 1만명을 설득해 이끌고 돌아온다.

그 뒤 10월에는 다시 남쪽의 백제로 진격해 백제가 자랑하는 수군기지인 관미성(그 위치에 대해선 오늘날의 강화도, 또는 강화의 부속섬인 교동도, 또는 예성강 하구 설의 3가지 정도가 있다)을 20일 만에 함락시킨다. 이 관미성 공격을 위해 광개토대왕이 쓴 전법이 눈길을 끈다.

관미성은 바다로 둘러싸인데다 사면이 절벽으로 이뤄진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여기를 공격하기 위해 대왕은 해군을 동원해 7개 길로 진격하였다.

관미성의 함락은 서해 지배권이 고구려로 넘어간다는 것이자, 한강변에 위치한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관미성을 탈환하기 위해 서기 393년 백제 아신왕 자신이 1만명을 거느리고 공격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듬해에도 백제 아신왕은 황해도 수곡성을 공격하고, 그 이듬해에도 좌장 진무 등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모두 실패한다.

이 수곡성을 둘러싼 싸움에는 광개토대왕이 친히 7천 병력을 이끌고 참전해 백제군 8천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대전과를 올린다. 이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백제 아신왕은 자신도 광개토대왕과 같은 규모의 병력인 7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진격했다가 큰 눈을 만나 철수하고 만다.

이처럼 백제의 실패가 거듭되자 광개토대왕은 서기 396년 친히 수군을 이끌고 한강변에 있는 백제의 수도를 공격한다. 오늘날 풍납토성을 사면에서 포위한 광개토대왕의 총공세 앞에 결국 백제는 항복한다.

젊어서 즉위한 뒤 줄곧 광개토대왕의 라이벌처럼 겨뤄온 아신왕은 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아신왕의 아우와 신하 10명, 백제 백성 1천여명을 포로로 잡고 많은 재물과 함께 개선한다.
 

   
▲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안에 전시된 광개토대왕의 전투도. 그는 동서남북 모든 방면을 향해 정복전을 벌였다. <제공=한겨레21>

이처럼 백제와의 전쟁에서 대왕이 빼앗은 것이 58개성, 700여 마을에 이른다. 결국 고구려의 설욕전은 광개토대왕 때 한강유역까지 육박해 백제의 항복을 받은 뒤, 그 아들 장수왕 때 백제의 수도를 함락해 개로왕을 죽이는 것으로 한 매듭을 짓는다.

이때 백제는 한강유역을 버리고 남쪽 웅진으로 천도한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광개토대왕은 공격뿐만 아니라 방어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대륙을 달린 것만 아니라 배를 타고 거대 병력의 해군도 훌륭하게 지휘하는 등 ‘전쟁의 신’과도 같은 면모를 보인다.

백제 아신왕, 무릎을 꿇고 항복하다

광개토대왕의 남진은 서기 399년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게 공격받은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해 대왕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5만이라는 대병력을 신라로 출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고구려군은 신라로 가서 왜군을 물리치고 가야 지방까지 진격해 왜군을 완전히 물리친다.

(바로 광개토대왕비에 나와 있는 이 부분의 비문 해석을 놓고 일본의 사학자들이 당시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도적 오역은 당시 백제와 왜가 동맹 관계였다는 가장 기본적인 역학 관계에서 보면 출발부터 타당성을 잃고 있다.) 
 

   
▲ 경기 구리시에 있는 광개토대왕 동상. 뒷면에 쓰인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고구려 백성이 그에게 붙인 극존칭의 이름이며,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그대로 쓴 것이다. <제공=한겨레21 박승화 기자>

고구려의 남진은 설욕전에서 시작됐지만 중대한 결과로 이어졌다. 어느 의미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무작정 땅만 넓히는 데만 골몰한 팽창주의자가 아니라 국가의 명운과 관련해 대단히 멀리, 크게 보는 전략가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역사서 <남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고구려는) 토지가 척박해 양잠과 농사로써 충분히 자급하지 못하므로 음식을 절약해 먹는다.” 그에 반해 남쪽은 좋은 곡창이 곳곳에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1차로 황해도, 2차로 한강유역을 놓고 격전을 벌인 이유는 바로 이 안정적인 식량공급 기지인 평야를 점령하기 위해서다. 나아가 중국과의 교역 통로를 장악하기 위해서다. 대왕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남진에 이어 만주와 중원 향한 북벌로

나아가 고구려의 남진은 민족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남진정책을 통해 삼국의 민족문화적 동질성이 강화·발전했다는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고구려의 문화가 대거 한반도 남쪽으로 밀려 들어왔다고 파악한다.

문화적으로 ‘경주 호우총에서 광개토대왕의 제사에 사용된 제기가 출토되고, 서북총에서는 장수왕의 연호가 새겨진 은그릇이 출토된 사실’은 고구려와 한반도의 문화적 융합·동질화가 획기적으로 가속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핵심적인 먹거리로 자리잡고 있는 된장·간장이 바로 고구려를 통해 이 시기에 들어왔다는 논문도 발표됐다. 남진정책의 결과로 민족적 정체성이 발전해 결국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의 대대적인 신라 귀순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남진은 이어 만주와 중원을 향한 북벌로 이어진다. 환도성을 함락하고 고구려에 치욕을 안겨준 선비족에게 설욕하기 위해 대왕은 먼저 서북방을 안정시켜 공격의 여건을 완전히 갖춰놓는다. 서기 395년 선비족의 북쪽 배후라 할 수 있는 거란을 치고, 다시 서기 398년 북방의 숙신을 안정적으로 복속시킨다.

그 뒤 선비족이 후연을 세우자 서기 407년 후연에 대한 전면전을 벌인다. 이때 광개토대왕은 백제 공략 때처럼 치밀하게 준비한 뒤 전격적으로 사면에서 들이치는 ‘필승 전법’을 구사한다. 백제의 관미성을 칠 때처럼 우회작전을 동원해 후연의 수도 용성을 사면에서 한꺼번에 압박한 것이다. 이때도 해군을 동원하였다.

후연은 결국 이런 공세에 굴복해 내부 반란이 일어나 고구려 출신인 고운을 왕으로 옹립하고 후연 대신 북연을 세운다. 광개토대왕은 고운을 고구려의 제후왕으로 받아들인다. 그 뒤 서기 410년 동부여도 정벌해 동쪽도 안정화한다.

이 결과 고구려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의 북부 전역을 강역으로 거느린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확고하게 군림하게 됐다.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인 위기의 나라, 왕이 전사하거나 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치욕을 겪는 국가를 이제는 부챗살 모양으로 그 국력이 사면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중심제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왜 그리도 일찍 죽었을까

이 전성기를 가져온 광개토대왕에게 고구려 백성들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彊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극존칭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렇게 칭송했다. “태왕의 은혜는 하늘에 이르고, 태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쳤나이다.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하고,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나이다.”

그런데 대왕은 왜 이리도 일찍 죽었을까? 아쉽다. 왜 그 아들 장수왕은 수를 충분히 누렸는데 39살에 죽었을까? 의문이다. 고구려 역대 군왕 가운데는 동명성왕처럼 40도 안 돼 죽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태조왕처럼 재위기간만 94년에 이른 것으로 기록된 왕도 있기에 그렇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정열을 전력으로 쏟아부은 사람들은 왜 그리도 일찍 가야만 하는 것일까? 아, 주몽이여, 담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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