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음울한 묵시록을 충격적으로 그려내다

21세기의 음울한 묵시록을 충격적으로 그려낸 불행한 문화영웅 ‘필립 K. 딕’
 

“한 하이테크회사에서 특수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천재 공학자 마이클 제닝스는 어느 날 회사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을 받는다. 그는 한 가지 프로젝트가 끝나면 기밀 누출을 막기 위해 프로젝트 기간 동안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 그런 그에게 ‘2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에 참가하라. 그러면 그 대가로 5만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의 보수(Paycheck)를 주겠다’는 제안이 온 것이다(출판 당시 5만달러는 엄청난 거액이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치고 깨어난 그가 받은 것은 ‘가는 철사 한 가닥과 버스 토큰 한개, 코드 키, 승차권 반쪽, 포커칩 반쪽, 천조각, 물품보관증’ 등 자질구레한 7개의 물건이 담긴 헝겊 주머니뿐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자신은 거액의 보수 대신 이런 잡동사니가 담긴 주머니를 선택한 것일까? …7개의 물건을 가지고 지워진 기억을 찾아나선 그는 자신을 잡으려는 비밀경찰과 만나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도망쳐야 한다는 현실에 부닥친다.

제닝스는 위기 때마다 자신이 주머니 속의 영문 모를 물건 하나씩을 사용하며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그리고 자기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거액의 페이첵 대신 역시 이 잡동사니 물건들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곤 경악한다.”(소설 <페이첵>)

죽은 뒤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져

“서방연합정부 범죄예방국 국장 존 앤더튼은 ‘미래의 살인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카드를 보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 모든 범죄를 1주일 전에 예견해 범죄 예정자를 미리 수용해버리는 식으로 철저한 치안을 유지하는 이 미래 사회에서 앤더튼이 체포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죽일 것이라고 나타난 사람은 서방연합동맹군(AFWA) 사령관 ‘레오폴드 캐프랜’이다. … 캐프랜은 범죄예방국의 오류 가능성을 트집 잡아 범죄예방시스템을 해체하려 한다. 만일 이 기구를 해체하지 않으면 퇴역 장교가 이끄는 군사정보국에 의해 내전으로 비화할지도 모른다고 ‘세명의 돌연변이 예지자’들이 예언했다는 것이다.

… 세명의 예지자들이 미래를 똑같이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두 사람의 예언이 일치하는 ‘메조리티 리포트’(Majority Report)와 그 예언에 시간과 장소의 변수 정도가 달리 작용하는 것을 반영하는 한 사람의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가 있을 뿐이다.

… 존 앤더튼은 자신이 30년에 걸쳐 완성해놓은 범죄예방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이 만일 예지자의 리포트처럼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다면… 자신은 수용소로 갈 것이지만, 이 시스템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시스템이 틀렸다면…

이 끔찍한 ‘패러독스’를 이용해 ‘미-중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해체되면서 퇴역한’ 레오폴드 캐프랜은 권력이동을 노리는 것이다. 과연 어떤 리포트가 옳은 것인가? 누가 서방연합의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소설 <마이너리티 리포트>)
 

   
▲ 놀라운 상상력으로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미래현실을 그려내 21세기형 실존의 물음을 인류에게 던진 필립 K. 딕.(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사진 제공=한겨레21>

공상과학소설(SF) 작가인 필립 K. 딕은 1928년 시카고에서 푸줏간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세금검열관인 어머니 사이에서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쌍둥이 누이 제인은 태어난 지 41일 만에 죽었다.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간 그는 청소년기에 아시모프, 존 캠벨, 반 보그트 등 SF 작가들에 심취했다. 그 뒤 버클리대학을 1년 다니다 중퇴한 뒤 1982년 54살로 죽을 때까지 30여년 동안 전업작가로서 48편의 장편소설(그 가운데 생전에 출판된 것은 34편)과 100편 이상의 단편소설, 그리고 에세이 등을 썼다.

수천통의 편지를 남겼으며, ‘인조인간과 인류’ 등의 유명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결혼을 5번이나 했으며 광장공포증·자살충동·공격본능·피해망상·신경쇠약 등의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하루 60쪽씩 글을 쓰느라 각성제도 복용했다.

1971년 미 중앙정보국(CIA)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집을 습격당하고 협박 전화까지 계속되자 안전에 대한 편집증에 시달리다가 캐나다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하고 음울한 분위기에서 살았던 그는 생전에 그다지 각광받지 못했지만, 죽은 뒤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세기는 그의 이름을 주요한 문화코드로 화려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필립 K. 딕은 무엇보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미래 사회와 가상현실을 그려내 인류에게 21세기형 실존의 물음을 내던진다.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당신을 둘러싼 현실이 진실이라고 믿는가?’ ‘당신이 실제로는 인조인간이고, 그 현실은 가상인데도 그렇게 믿는단 말인가?’

‘머신’의 세계로 귀의하다

장자의 ‘나비의 꿈’과 기독교 신비주의를 무한의 상상력으로 첨단화한 시공간에서 인간과 인조인간이 맞붙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이런 놀라운 상상력을 할리우드가 그대로 둘 리 없다. 필립 딕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해인 1982년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처음으로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로 영화화된 것을 시작으로 속속 거장들의 손을 거쳐 영화로 변신한다.

1990년 <토탈 리콜>(Total Recall), 2001년 <임포스터>(Impostor), 2002년 <마리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3년 <페이첵>(Paycheck)이 잇따라 개봉된다. 감독들도 모두 쟁쟁한 인물들이다. 게리 플래더, 스티븐 스필버그, 오우삼….

특히 첫 작품 <블레이드 러너>는 음울한 디스토피아적 분위기에서 인간과 복제인간, 현실과 허구가 충돌하고 교차하는 충격적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각인을 남긴다.

늘 산성비가 내리는 어둡고 암울한 도시, 400층을 헤아리는 고층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에어카, 인간과 숨막히는 추적전을 벌이는 복제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 과연 누가 사람이고,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살아 있는 괴물과도 같은 그런 세계가 어느새 우리 앞에 도래한 듯한 환각과 함께 전율해야만 했다. ‘너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고, 인간이라고 해봤자 결국 수명이 좀 긴 리플리컨트(<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수명 4년짜리 복제인간)가 아닌가?’

   
▲ 쟁쟁한 감독들에 의해 영화화된 필립 K. 딕의 작품들. 맨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페이첵>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 리콜>. <사진 제공=한겨레21>

그의 작품은 그의 생애와 일정한 연관성을 유지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은 나를 미치게 한다. 기르는 고양이가 죽을 때마다 나는 신을 저주했다. …신에게 분노를 느낀다. 나는 신을 붙들고 ‘인간은 죄를 지어서 파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고통에 대한 강박관념의 반대급부일까? 그는 생명의 동일성 의식에 깊이 빠지게 된다. 여기서 그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절충론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머신’의 세계로 귀의한다. 바로 컴퓨터나 로봇이 스스로 지능을 진화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대신한다는 테마 속으로 지속해서 몰입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갖가지 정신질환으로 약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그에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헛갈릴 수밖에 없다. 진실은 그야말로 상대적이며, ‘살아 있는 생물만큼 많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여기에 시대 상황이 겹쳐진다. 그가 작품활동을 한 1950~8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상징되는 시대이다. 나아가 미국에 히피문화가 성장하고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 기세를 떨친 시기이다. 그가 청춘을 보낸 캘리포니아는 그런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그의 작품은 점점 난해하고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짙어간다. 여기에 1974년 ‘환상’을 경험하면서 일종의 변형된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서의 요소가 합쳐져 훨씬 복잡한 성격으로 발전한다. 그가 살아서 추구한 다양한 실험과 성과, 그리고 진지성은 그에게 ‘SF문학계의 셰익스피어’ ‘SF 분야의 성인’이라는 찬사를 안겨주기도 했다.

현대 첨단과학과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21세기의 음울한 묵시록을 충격적으로 그려낸 불행한 한 문화영웅을 만날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비디오의 발달은 스크린에서 참패한 <블레이드 러너>를 21세기 대중에게 연결시켜주는 훌륭한 통로가 됐고, 인터넷과 영화산업의 발전은 ‘필립 K. 딕’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현재 야후닷컴에서 검색되는 그의 관련 정보 사이트 수는 약 130여만건에 이른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발견해버린 미래의 인간은 ‘칼날 위를 달리는’ <블레이드 러너>처럼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불행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살하지 않고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 세계의 잔인성과 야만성은 이런 세계로 오는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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