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일본의 기초를 닦은 ‘고난의 영웅’

일본적 경쟁력의 뿌리
 

“피로 피를 씻는 난세, 살벌한 전국시대다… 나는 분명 욕심 많은 사람이다. 내 아버지를 밀어내고, 아들까지도 죽였다.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뭐가 있느냐?… 누군가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는 한 그 피의 강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검의 산만 더욱 높아질 뿐….” (영화 <가케무샤> 중에서 다케다 신겐의 말)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가 IT(정보통신) 열풍에 빠져들고,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란 말을 들으며 세계 경제의 강자로 등극하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던 일본이 다시 용트림하고 있다.

호봉제-연공서열-종신고용의 독특한 인적 시스템과 탁월한 기술력,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고로 세계 경제를 누비던 일본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오명을 벗고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본의 경쟁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15세기 무렵까지 조선과 그다지 큰 격차를 보이지 않던 일본은 도대체 어떤 길을 갔기에 개국 이후 이처럼 짧은 시기에 세계 경제의 강자로 떠오른 것일까? 미국식 구조조정이라는 잔인한 제도가 세상에 맹위를 떨치는 21세기에도 어떻게 일본기업가들은 ‘사람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 <일러스트레이션/장광석, 제공=한겨레21>

두살 때 어머니와 생이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른바 ‘피로 피를 씻는 난세’가 절정기로 치닫기 시작한 1542년 일본 미카와(지금의 아이치현) 오카자키성에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 통일을 향한 크고 작은 전쟁으로 들끓던 일본의 전국시대에 그는 과연 ‘인내’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처절하게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참는 것을 최대 무기로,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같은 천재형 경쟁자들의 견제와 억압을 견뎌내고 마침내 일본 천하를 움켜쥐게 된다.

그의 인생은 두살 때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고난으로 시작된다. 주변의 강대한 다이묘(大名:전국시대의 영주들)의 압력에 소국의 다이묘인 아버지가 굴복해 정략이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뒤 6살 때 볼모로 넘겨져 두 차례에 걸쳐 13년 동안 엄중한 감시 속에서 볼모 생활을 해야 했다. 볼모 기간에 그는 자신을 잡고 있던 오다 노부히데의 협력 요청을 아버지가 냉혹하게 거절해 죽을 수도 있는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19살 때 볼모로 잡고 있던 이마가와가 신흥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망한 것을 계기로 볼모에서 해방돼 선조 때부터 근거지인 오카자키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남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에 사실상 복속해야 했으며, 노부나가와 연합한 것 때문에 다케다 신겐에게 집중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 뒤 사돈을 맺은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처를 죽이고 아들마저 자결하게 만드는 비극을 겪는다.

그는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어느덧 노부나가 세력의 강자로 떠올랐지만, 노부나가가 암살될 때 자신의 주력군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기회에 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다시 주도권을 빼앗기는 불운을 겪는다.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에게 굴종한 뒤 그는 강제로 본거지인 오카자키를 떠나 더 먼 동쪽의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겨가야 했다. 또한 히데요시의 압력으로 그의 이부여동생(조카딸)과 결혼해야 했고, 손녀딸과 히데요시의 아들이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천하통일 뒤 대륙정벌에 집착하는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명령하고 나라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을 때 이에야스는 절묘하게 조선 출병에서 빠질 수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외면상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면서 에도를 중심으로 힘을 비축한다.

그 뒤 대내외적으로 고전을 겪던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자 마침내 1600년 동군(에도를 중심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원하는 세력)을 이끌고 서군(히데요시의 근거지였던 사카이 등 오늘날의 오사카 세력)을 세키가하라에서 격파하고 사실상 통일 일본을 장악한다. 이에야스는 그 뒤 에도에 막부를 설치해 일본 전역을 통치하면서 근세 일본의 기초를 닦는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세력을 마지막으로 공격하기 위해 출전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맨 위 그림에서 흑마를 탄 사람). 아래 그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전래된 세계지도. 당시 이런 복제본이 많이 제작됐다. <사진=한겨레21>

일본인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파란만장한 삶은 일본에서 지금껏 숱한 소설과 책, 드라마, 영화, 연극의 소재가 돼오고 있다. 나아가 일본 사람들은 그를 늘 ‘일본의 10걸’로 선정하면서 존경하고 있다. 일본의 소설가 야마오카가 밝히고 있듯이 그는 ‘고난의 영웅’으로서 국가위기, 경제위기의 시기에 일본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 인물로 꼽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21세기 일본의 관련성에서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평화 일본’을 열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교차하고 있는 ‘평화’와 ‘팽창’의 두 주제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이토 히로부미-현대의 극우파로 이어지는 대외팽창과 전쟁의 기류에 대응하는 평화 속의 대내 발전이라는 기류는 사실상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처럼 평화 기류를 유지하고 있을 때 자신의 저력을 발휘해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길-팽창의 길로 갔을 때 언제나 초기의 성공과 긍극적 패배로 이어지곤 했다.

두 번째 이에야스는 경제에 대단히 강한 지도자로 난세를 헤쳐갔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소국에서 시작한 국가를 키워나간 경험으로 경제마인드를 충분히 갖춘 지도자였다. 그가 에도막부의 건설로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동부의 발전을 이루고 전란 뒤의 경제부흥을 일으킨 것은 그의 경제감각을 잘 읽게 해준다.

이와 함께 나카센도와 같은 동일본과 서일본을 잇는 주요 도로망을 정비하고 선박운행도 활성화했다. 이에 따라 국토의 균형 발전과 농경지의 확대, 상업의 융성, 해외무역의 활성화, 인구 증가를 이룩할 수 있었다.
 

   
▲ 도쿠가와 막부의 개막을 소재로 만든 일본의 역사신문 <사진=한겨레21>

세 번째 남의 강점을 모방해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자신을 초기에 크게 위협했던 다케다 신겐의 화폐경제를 계승했다. 일본 최초의 주조소판을 열어 전국에서 통용되는 금화 은화를 제조했다. 나아가 경장통보라는 동전을 주조해 사용해 화폐경제를 발전시켰다. 히데요시가 중시한 금광 은광의 몰수와 지배 원칙도 더욱더 강화시키고, 교통의 요충지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두었다.

네 번째 일본적 인간경영의 토대를 닦았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의 가신단은 먼저 충성심이 매우 뛰어났다. 이에야스가 남에게 고통을 강요하지 않고 모범을 보이며 사람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는 ‘여론’을 적극 활용해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산시켰다. 특히 그 자신이 ‘대기만성형’ 인물이었기에 일본인의 의식구조에 노인층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사회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각인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다른 나라와 달리 정년을 연장하는 놀라운 선택을 하는 이면에는 이에야스의 그림자가 분명 크고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원, 분노는 적”

다섯째, 검소·절약·저축의 미덕을 대단히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런 미덕이 근세 이후 일본인의 잠재력을 성장시키는 한편 교육열을 높이는 효과로 이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살아서 정치와 경제에서 동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그는 인간으로서 이런 교훈을 후세에 남기고 있기도 하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자유롭지 못함을 늘 곁에 있는 친구로 삼는다면 부족할 것이 없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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