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영웅전 2호 태호 복희씨 "중국, 일본 역사는 한국의 방계 역사"
- 중국 삼황오제의 삼황 중의 1인 - 신시 배달국-고조선-부여-고구려,신라,백제 등 열국
우리가 한국과 중국의 예전 그림을 보면 축 늘어진 옷을 입고 있으면 중국, 한복처럼 입고 있으면 한국의 조상이라고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한복은 이성계의 조선시대 때 입은 옷이지 고려나 열국시대, 조선시대 때 입은 옷이 아니다. 이처럼 고정관념이 갖고 있는 편견이 역사 왜곡을 당연시하게 되기도 한다.
학교 이후에 역사를 배우려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동북아의 역사가 한국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북아의 역사란 한국, 중국, 일본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일본의 천황이 자기들 모계 조상이 백제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부계는 딴데서 온 것도 아니다. 결국, 신시 배달국, 조선, 열국시대로 이어지는 조상들 중 1인일 것이다.
실제로 동경대 연구조사에서도 일본의 조상이 한국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일본의 조상은 한국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역사학자들은 일부 식민사관의 동조자들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DNA조사 결과 역시 그렇다. 프로축구 선수가 A팀에서 싸우다가 B팀으로 가면서 친정팀과 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의 역사를 진짜 우리 역사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재단의 결과일 뿐이지 진짜 역사가 아니다.
중국도 지금 자신들의 조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교육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한 번 교과서로 배운 역사는 쉽게 잊기 어렵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현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는 한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가장 최근의 역사인 청나라 역시 그들의 조상이 신라에서 왔다고 했기도 했지만, 청나라 황제가 우리 조상에게 제를 올렸으니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한국의 역사로 편입시켜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현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은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선조 때의 임진왜란, 인조 때의 병자호란, 현대사의 6.25동란은 모두 형제국의 싸움일 뿐이다. 차츰 시간이 흘러 지금의 젊은이들은 북한은 딴나라로 인식돼가는 과정에 있다. 그렇다면 역사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에 따라 시각을 달리할 뿐이지 않을까.
하지만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동이영웅전을 보면 왜 동북아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인지를 알게 된다. 그 첫 번째로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잘 알고 있는 태호 복희씨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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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최초로 그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위인은 다름아닌 태호 복희씨다. 그러나 복희씨를 우리 동이 민족으로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씨란 원시 씨족사회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실제로 복희씨 당시는 씨족사회보다 훨씬 진보된 부족국가 단계였으며 진일보한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복희씨는 현재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인 것처럼 기록하여, 우리는 태호 복희씨가 우리의 조상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태호 복희씨를 중화의 시조라 하여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은 당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정이다. 그는 고대 중화의 으뜸가는 역사학자로 평가되는 사마천과 같은 집안으로서, 사마천이 중화의 시조로 5제의 시작이라는 황제(공손 헌원)로부터 중화의 역사를 기록한것으로는 약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중화 역사의 시조는 5제 이전에 3황이 이미 있어 그 첫째인 복희씨를 중화의 시조로 생각하여, 사마천의 『사기』가 「5제본기」부터 시작한 것을 보완하여 그 앞에 「3황본기」를 만들어 넣은 장본인이다.
그는 3황으로 태호 복희, 여왜, 신농을 꼽았다. 이 부분도 지금 중국의 사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아 정설이 없는 상태로, 역사의 왜곡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이 3황 5제는 모두 중화에서 우리 민족을 부르는 동이(東夷)로서 우리의 조상이다. 이 영웅전에서는 3황 가운데 여기의 복희씨와 다음의 신농씨, 그리고 5제의 첫째인 소호씨의 3제왕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서는 국사 시간에 가르쳐 주지 않는다. 중국사를 배우게 될 때 3황 5제라는 성덕의 제왕들이 있었다는 신기한 사실을 알고나서, “중국은 참으로 복 받은 훌륭한 나라구나! ”하고 부러워한 기억이 난다.
여기서 동이라는 말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알아두어야 대한민국 국민답다고 생각된다. 동이란 우리의 입장에서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중화 사람들이 우리를 부른 호칭이다. 현재 오랑캐‘이’라는 뜻은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국내에 잘못 전승되는 풀이다.
동이(東夷)에서 동은 중화의 동쪽에 위치한 것을 나타내며,
이(夷)라는 글자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즉 서쪽의 이민족은 서융, 남쪽은 남만, 그리고 북쪽은 북적으로 불렀다. 사방을 이리 부른 것은 중화가 작은 나라였으며 그 주위가 모두 같은 이민족 즉 고조선에 속한 거수(渠帥)국들 이었음을 뜻한다. 동이는 사방의 고조선 사람들이 중화인들 비해 신체도 크고 마음도 넓을 뿐 아니라 크고 성능이 뛰어난 활을 잘 만들어 잘 쏘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고대에 활은 칼이나 창같이 근접전이 아니라 멀리서 미리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첨단 무기였기 때문에, 중화인들은 동이의 활과 화살의 제작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예기』나 『설문해자』같은 책에는 동이에 대하여 지극히 좋은 표현이 실려 있다. 동방에서는 어질고 생명을 좋아하여 만물이 땅에 기반을 두고 난다. 고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 군자국·불 사국이 있기에 이르렀다. 대개 땅에 있는 사람들이 자못 순리의 성품이 있다고 하나, 동이는 오직 큰 것을 쫓으니 대인이다. 살피건대 그곳은 하늘이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니 (大자는) 사람의 형상을 말한 것이다.
고조선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현실을 짐작할 수 있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 모두 크다고 했으니 대국으로서의 경제 문화의 높은 수준을 말한 것이다. 군자는 원래 임금이란 뜻이지만 공자가 말한 바 소인과 구별되는 이상적 인간상인데 그런 사람이 살고 다스리는 나라가 군자국이며, 또한 천성이 유순하고 도를 닦으면 오래 사는 신선이 되므로 신선들이 죽지 않고 사는 불사국도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현이라는 공자조차 9이 (9개 동이의 총칭)에서 살고 싶어 하였다고 한다.
다시 복희씨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사마정에 의해 복희씨는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이 3황의 비조로 중화의 시조가 되었다. 하나의 나라를 일으키는 일은 보통 사람이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당대의 뛰어난 영웅이라야 감당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역할이다.
그렇다면 사마정은 중화의 건국이라는 엄청난 역할의 주인공으로 왜 하필 복희라는 인물을 골랐을까?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기에 그리했다고 보면 오히려 너무나 싱거운 선문답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화 역사의 최전성기인 당나라 사람으로서 복희씨를 대 중화(中華)의 시조로 택했을 때는 복희씨가 참으로 대 중화의 시조에 합당한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단한 위인과 영웅의 풍모를 두루 갖춘 복희는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으며 또 어떠한 정치를 통해 백성들에게 얼마나 혜택을 베푼 훌륭한 지도자였을까? 중화의 기록에 따르면 태호 복희씨는 산동(山東)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복희의 어머니는 화서라고 하는데 어떤 여인인지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용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가졌다는 뇌신의 큰 발자국을 밟은 뒤 복희를 낳았다고 한다.
복희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기록인 『태백일사(太白逸史)』「신시본기(神市本紀)」에 보면 태우의 환웅의 12명의 아들 중 막내라고 전한다. 환웅은 고조선 이전에 있던 신시라는 나라의 통치자의 호칭이었다. 신시는 배달국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민족이 세운 첫 나라로 알려져 있으며, 18명의 환웅께서 1,500년 동안 다스리다가 단군의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8명이 1,500년이라면 한 사람이 80년 이상 다스렸다는 말인데 이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거짓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옛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허황한 사실을 날조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여 그 이유를 알아낼 필요가 있다.
가령 고대인이 가진 시간 개념이 지금의 1년과는 달랐을지 모르며 한 계절을 1년으로 했다면 지금의 20년 간씩 다스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다른 가정을 해 본다면 고대의 통치자는 종교적 지도자로서 신선이었기에 상당히 장수했다고 기록할 가능성은 없을까? 기독교의 성서의 영웅들도 최장수자 모두 아담은 930세, 노아는 950세, 셀라는 969세이니까 말이다.
복희씨가 신시의 동이 출신임을 보았으나 중국의 유명한 학자 중에는 그를 묘족의 조상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묘족은 복희씨 당시에는 구리(9黎)라 하였고 얼마 후의 5제 시대에는 3묘(苗)라 하여 황하와 양자강, 중원 근처에 살었다. 3묘가 복희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은 묘족의 전설에 복희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타당한 것이다. 그러면 고대의 9리와 3묘는 우리 동이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9리에 관한 많은 기록을 보면 치우씨가 그 군주로 기록 된다. 치우씨는 복희씨보다 후세의 대영웅인데 두 사람이 같은 민족임을 알게 된다. 치우씨는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인데 신시의 환웅의 한 분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다스린 구리는 신시에 속한 거수국의 하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넓은 의미의 동이에 9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중국의 저명한 사학자 부사년은 복희가 동방의 부족이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공인되어 온 일이라고 하였다.
구리는 치우천왕 당시에 중화의 공손 헌원씨 (중국에서는 황제黃帝라 함)와 70회가 넘는 치열한 전쟁을 벌일 정도로 관계가 극도로 나빴다. 그 이후 구리의 후신인 3묘도 중국의 제순·제우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투쟁을 하였으나 점차 밀려 옮겨 갔다. 그리하여 3묘는 이후 또 남만 (南蠻; 중국 남쪽의 이민족)으로 이동된 이들은 우리 동이와는 구별되기 시작했다.
중국 남쪽의 초(楚)나라는 원래 이 남만족의 나라였다가 서기전 8세기 춘추시대에 들어 중원의 패권 경쟁에 뛰어들면서 주나라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초의 군주인 웅거나 춘추 5패의 한 주역인 문왕은 스스로 만(蠻)족임을 자처하였다. 초나라의 군주들은 웅씨 성이었는데 웅씨는 신시의 주요 성씨 중의 하나였으므로 초나라의 만(蠻)족(이전의 구리 및 3묘)은 결국 동이의 한 갈래인 셈이다. 다음에 볼 영웅인 염제 신농씨 또한 웅씨의 갈래임을 미리 언급하고자 한다.
초나라는 복희씨 당시부터 중원 남쪽에 있던 오랜 나라인데 복희씨가 비파를 만들어 가변이라는 곡을 만들자 초나라에서도 노상이라는 곡을 지었다고 한다. 복희의 도읍지는 지금 하남(河南)성의 진(陳)이었으므로 초는 그 남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복희씨는 또 동방으로 태산에 올라 토단을 쌓고 천신에게 제사지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진과 초, 태산의 위치가 더욱 분명해 진다.
이제 묘족에 전해오는 복희에 관한 전설을 보자. 그 골자는 복희는 여동생 여왜와 함께 아버지를 도와 뇌공과 싸웠는데 뇌공의 홍수 공격 때문에 인류가 전멸하게 되고, 복희 남매만 살아 남아 부부가 되어 인류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대홍수의 전설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성경에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 소수만 살아남았다는 내용이다. 복희 전설에 노아의 방주에 해당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표주박인데, 속이 비고 물에 뜨니 좋은 방주가 되었을 것이다.
여동생이자 부인이 된 여왜는 위에 언급한 대로 사마정이 복희에 이어 3황의 두 번째로 기록하였다. 이 설은 신빙성이 없어 보이지만 필자 나름대로 그 개연성을 추측해 본다면 이렇다. 복희씨는 자손을 본 뒤 일찍 세상을 떠나고 여왜는 번창한 자손들을 데리고 오래도록 살며 세상을 다스리니 성덕의 제왕이 되었다고···
복희와 여왜를 그린 채색 견화가 신강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에서 멀지 않은 무덤에서 20세기 초 발견되었다. 사람 얼굴에 용의 몸을 가진 2명이 하반신은 서로 칭칭 감은 채 그려져 있는데 하반신은 용이라기보다 뱀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마정은 복희와 여왜의 몸은 뱀이라고 하였으며, 복희를 이은 여왜가 제도는 고치지 않고 단지 생황이라는 악기만 만들었을 뿐이라고 기록했다.
투루판 채색 견화의 복희와 여왜는 손에 컴퍼스와 자를 쥐고 있다. 이것은 설계를 하고 물건을 만드는 도구이니 두 신은 창조신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은 초(楚)나라 굴원의『초사』에 “창조신인 여왜에게 몸이 있으니 누가 이를 만들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 점이다. 고대인의 관점에서도 창조주라는 여왜의 실체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움을 토로한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여왜에 관해서는 또 천지가 무너진 것을 보수했다는 설화도 있다.
『회남자』에 보면 하늘을 떠받치는 4개의 기둥이 부서지고 온 땅은 찢어지며 홍수가 넘치자, 여왜가 5색 돌을 불려 하늘을 보수하고 거북의 다리를 잘라 기둥을 세우는 한편, 흑룡을 죽여 기주 땅을 구제하고 석회를 쌓아 홍수를 막았다고 했다. 천지창조까지는 아니지만, 질서가 무너진 세계를 온 힘을 다해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는 이야기이다.
태호와 복희라는 이름에 대해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태(太)는 크다는 뜻이고 호(昊)는 기운이 넓다는 의미이니 성인 군자로서의 품행을 묘사한 말이다. 복(伏)은 엎드린다, 희(羲)는 기운을 뜻하는데 군주로서 제사할 때의 엄숙한 기품을 그린 듯하다. 복희는 또 포희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제사상에 올릴 희생물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당시 군주가 종교적 지도자였기에 여러 신과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의식이 가장 큰 일이었으며 제사의 종류에 따라 그 절차와 제물의 종류가 모두 달랐으니, 복희씨는 이러한 제사들을 체계적으로 만든 권위자였다고 보겠다. 복희의 연대는 서기전 3,000년 경에 대홍수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고, 이 때에 하늘 제사가 비로소 처음 발생하였다는 것과도 연결된다고 본다.
복희씨는 어릴 때부터 작은 나뭇가지를 가지고 이리저리 늘어놓아 8괘를 창안했다고 전한다. 다음에 볼 신농씨는 이 8괘를 또다시 8가지로 변화시켜 64괘를 만들었다는데 이것이 우주의 생성과 작용을 설명하는 동양 역(易)학의 토대가 되어, 후에 주나라 때의 주역으로 발전하고 집대성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처럼 원래 주역은 우리 한역(韓易)으로 불려야 한다.
복희씨의 성은 풍씨(風·鳳)였으며, 그 후손 중에 춘추시대에 임·숙·수구·전유라는 제후들이 있었다. 복희를 보면 동방에서 모든 문명이 발생한 것으로 봐야한다.
물건에 대한 중국어 ‘뚱시(東西)’란 바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온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즉 서쪽에는 물건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주역에서 천제는 ‘진에서 나온다(帝出乎震)’라고 하였는데 진방향이란 동북 방향인 간방(艮方)이다.
복희 여왜 인물화를 보면 눈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으니, 복희 여왜를 숭상하던 투루판 사람들은 유럽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었다. 또 남녀 모두 상투머리를 하였고 여왜는 곤지연지를 하였다. 곡령의 속옷을 입어 바람의 침입을 막고, 티베트 장족 복식의 손을 덮는 소매로 폭이 좁고 길다. 상의는 허리에서 주름을 잡은 것으로 승마에 편리하도록 마름질한 우리 민족의 한복 철릭과 유사하다.
마름질법은 스키타이 계통과 한복이 서로 유사한데, 이러한 형태는 동이 및 북이의 복식이다. 또 태양 빛을 방사상으로 표현하고 수 많은 별들과 연주문이 들어 있는데 이는 동이의 우주 자연 및 광명체 숭배신앙을 기본 바탕으로 형성하고 있음을 뜻한다.
[발췌=우리 고대 역사의 영웅들]
저자 황순종, 나영주
펴낸곳 시민혁명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