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영웅전 5호 '소호 금천(金天)씨'
- 신농씨의 사위 소호 금천 중원의 통치가가 되다 - 소호(少昊)라는 별명은 '태호 복희씨의 분신'의 의미 - 중국이 공식적으로 청동기 시대가 없는 이유 - 신라가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싸운 곳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
역사는 해석학이다.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진짜 역사는 하나일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 역사를 해석해 식민사관 등을 보면 이들은 한국을 자신들의 방계로 기록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온전히 그들의 역사를 갖고 싶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한국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둔갑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역사를 부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것은 놔두고 동이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 더를 얹고 싶겠지만, 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온전한 역사를 영원히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온전한 역사를 갖기 위해서는 동이의 역사를 메인으로 다루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사마천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다.
중국 역사가 가짜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가깝게 청나라 황제도 신라의 조상에게 제를 올리고 그 이전의 사람들도 모두 동이에게 제를 올렸는데, 그들이 '하나 더' 정신으로 역사를 만든다면 그들은 찐 역사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동북공정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번 동이영웅전 5번째로 소개하는 우리의 영웅은 소호 금천씨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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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 금천씨는 공손 헌원의 맏아들이며, 신농씨의 사위 자격으로 신농에 이어 중원의 통치자가 되었다. 소호(少昊)라는 별명은 태호 복희씨의 가르침과 법을 이어받은 분신이라는 뜻이며 또 그가 복희씨와 같은 동이임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 언급하였듯이 사마천이 소호를 5제로 기록하지 않아 그의 제왕으로서의 덕이나 업적 같은 일들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의 다양한 구성과 활동으로 인해 그의 존재는 우리 고대사에 있어 대단히 의미심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습유기』에 의하면 소호는 금덕(金德)으로 왕이 되었으며 서방의 주인으로 금천씨, 금궁씨(金窮氏)라고도 한다. 어머니 황아는 밤에는 베를 짜고 낮에는 옥비둘기를 돛 끝에 달고서 뗏목을 타고 물가에서 놀다가 소호를 낳으니 서해안에 많은 뽕나무 이름을 따서 궁상씨, 상궁씨라고 했다. 또 5마리의 봉황이 각 방향 색상에 따라 소호의 뜰로 모여들어 그를 봉황씨라고도 한다.
금천씨라는 호칭은‘황금’(또는 쇠; 고대에 모두 보물처럼 귀한 물건)과‘하늘’을 귀하게 여기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족이 하늘에 제사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황금으로 하늘의 신상을 만들어 제사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치우때 이미 청동과 철을 다루기 시작하였고 이후 강철 제련의 ‘쇠/금’ 기술을 창안한 동이의 금이란 철(銕) 글자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소호씨 일족을 ‘금·하늘 겨레’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의 주학연(朱學淵)이란 물리학자이면서 언어학자는 이들이 여진족이라고 하였다. 그는 소호의 아버지가 공손씨인 사실은 모르면서도 공손씨와 소호씨가 모두 동이로 금·하늘 겨레인 것을 제대로 보았다. 또 그가 말한 여진족이란 금나라와 청나라의 성씨인 ‘아이신’을 말하는데 아이신이란 (황)금이란 뜻이다. 여기서 금씨의 중간 시조로 신라의 김씨인 김함보를 말한다.
주학연은 공손 헌원씨의 성‘공손’도‘애신(愛新; 아이신을 한자로 표기한 것)’과 같은 것으로 애신 헌원이 황금 성씨(즉 여진과 신라의 김씨)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추정은 사실로 드러나는데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는 김씨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 사람들이 자칭 소호 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김유신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종손’이라고 하였으니····
소호 금천씨의 금(金)이 신라의 김(金)씨로 된 것을 알 수 있으며, 공손 헌원과 소호가 같은 혈통임도 정확히 밝혀 놓았다. 이런 것을 보면 위에 주학연이 소호 금천을 여진족이라 한 견해는 고조선의 동이로 수정해야 옳다.
한편「문무대왕 비문」에 보면 그가 ‘투후 제천의 자손’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투후란 한나라 때 김일제라는 사람이 제후로 있을 당시 제후국 왕의 호칭이었다. 문무대왕의 선조 김일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주인공인데 『한서』에 기록된 내용을 간추리면 대략 이렇다.
김일제는 원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흉노는 진·한나라 때 이름으로 중원의 북쪽에 있었다. 진시황이 흉노를 막기 위해 저 유명한 만리장성 (사실은 천리 밖에 안됨)을 쌓았으며, 한 고조 유방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길 만큼 당시 흉노는 강성했다. 그 후 무제 때는 한나라가 강성하여 흉노, 위만조선, 월나라 등을 정벌하여 잠시 힘의 균형이 잡히게 되었는데, 당시 전쟁에서 김일제는 포로가 되었다.
14세의 어린 김일제는 어머니와 함께 노비가 되어 양을 쳤으나 훌륭한 어머니 덕분에 제대로 교육을 받아 성실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그가 훗날 무제에게 지난 일을 이야기하자 무제는 그 어머니에게 큰 상을 내렸으며, 그녀가 죽자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감천궁에 걸어놓게 하였다. 김일제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엎드려 절하고 실컷 울었다.
김일제는 몇 년간 왕궁의 말들을 돌보았는데 어느 날 한 무제가 그의 건장한 체구와 기품있는 모습, 잘 기른 말을 보고 마감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근면함과 충성스러움, 본분을 지켜 임무를 완수하는 자세로 무제에게 인정받아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로 승진했으며 천금의 상도 받았다. 외국인이 노비에서 단계적으로 올라 경이라는 관직에 오른 것은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한 무제가 김일제의 두 아들을 좋아하여 늘 옆에 두고 데리고 놀았다. 그러다 보니 큰 아들이 방자하게 되어 어전에서 공공연히 궁녀를 희롱하기까지 했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본 김일제는 화가 치밀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여버렸다. 한 무제는 노하고 애통해 하였으나 한편 김일제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김일제는 한 무제 곁에 수십 년을 있었지만 잘못이 없었고 상으로 준 궁녀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김일제의 딸을 후궁으로 맞으려 했지만 김일제는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시중복사 망하라 등 망씨가 한 무제를 암살할 계획으로 거사하였으나 김일제는 늘 경계하여 이를 탐지하고 있었다. 망하라가 칼을 숨기고 한 무제의 침실로 돌진할 때 김일제가 그를 덮쳐 잡았다. 이로 인하여 그의 충심과 효, 절개는 널리 명성을 얻었다. 그후 김일제가 죽자 성대한 장례가 치러져 행렬이 무릉에 이어졌고 경후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가풍이 정직함과 관대함이었고 자손들 역시 자중했기 때문에, 왕망 때까지 현손 김흠과 김준이 제후로 봉해지고 경의 자리에 올랐다.
왕망의 외척 김씨가 해외로 망명한 1세기 초에 신라에는 김알지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신라 김씨의 시조라고 한다. 그런데 그의 후손이 뒤에 미추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신라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여 김씨의 왕조가 되었다. 그러므로 문무대왕의 선조 김알지는 한나라에서 망명 온 김일제의 후손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흉노 태자의 후손이 신라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신기한 이야기지만 사실 조상의 뿌리를 캐보면 신라와 흉노는 같은 소호의 후손임이 드러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것인데 그것은 바로 김일제의 후손이 하필이면 바다 건너 먼 한반도, 그것도 가까운 서해가 아닌 경상도로 왔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신라의 본토가 대륙의 산동성과 그 남쪽의 중국 동해안 지역에 존재했었던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라가 동일한 대륙에 함께 위치하였기 때문에 한나라에서 쉽게 망명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나라 이전 진시황 때 만리장성의 노역을 피하기 위해 연·제·조나라 등 동북부 사람 수만 명이 신라의 전신인 진한으로 도망 온 것을 보면 신라가 중원에 가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삼국사기 문무대왕전에서도, 신라가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싸운 곳들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었으며 백제·신라 모두 그곳에 있었음을 수많은 중국 사서들이 밝히고 있다.
흉노의 조상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흉노열전」에서 하나라를 세운 제우의 후예라고 하여 순유라고 썼다. 그리고 요·순 이전에는 흉노 선조들의 나라로 산융, 험윤, 훈육 등의 종족이 있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제우의 후예인 흉노는 우리와 같은 핏줄이 된다. 그러나 사마천의 의도는 흉노를 중화인의 후예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다.
순유라는 인물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걸의 아들 훈육으로서 흉노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사기』 주석서에서 말한다. 사마천도 요·순 이전에 훈육이란 종족이 이미 있었다고 했는데 그 훈육이 1,000년 후인 하나라 말기의 사람이라고 하니, 이런 엉터리 주석을 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 흉노의 조상이 중화인이라는 사마천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중화 사관의 비근한 예라 하겠다.
또 흉노의 옛 나라였다는 산융은 춘추시대까지 존속하였고 그 후 오환·선비로 이어져 흉노와는 다른 갈래인데도 사마천은 산융을 흉노의 조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오환·선비의 전신이라는 이 산융(山戎)은 동호(東胡)라는 이름과 함께 고조선의 별칭 또는 거수국의 하나였다. 결국 사마천은 우리 조상을 흉노의 조상으로 갖다 썼는데 이 또한 매우 흥미로운 대목으로, 한 무제 때에 북으로 조금 후퇴하기는 했지만 전성기의 흉노 영역은 서쪽의 강·저족을 아우르며 실로 광대했었는데 흉노는 고조선의 거수국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보자. 중화에서는 북쪽에 있던 흉노 등을 북적(北狄)이라 부르는 한편 서쪽의 진(秦)나라 등 이민족을 서융(西戎)이라 하였으나, 이것은 엄밀하게 구분되는 호칭이 아니었으며, 흔히 서북쪽의 민족들을 총칭하여 융적(戎狄)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흉노나 진나라나 같은 계통의 민족이었는데, 진나라의 조상이 다름이 아닌 소호씨로서 신라 김씨의 조상과 같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사기』「봉선서」에 보면 진나라에서 소호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소호가 그들의 조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마천은 같은 『사기』의 「진본기」에서는 아래와 같이 허위로 기록하였다.
진나라의 조상은 전욱의 묘예다.
전욱의 손녀를 여수라고 하였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자,
여수가 이를 삼키고 대업을 낳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마천은 소호를 역사에서 밀어냈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를 진나라의 조상으로 기록하지 못하고, 소호 다음에 5제가 된 전욱 고양을 진나라의 조상으로 내세웠다. 위 문장에서 전욱만 소호로 바꾼다면 그의 손녀가 여수라거나 그녀가 대업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진나라가 소호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성씨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소호는 성씨가 영(瀛)씨인데 진시황의 이름은 영정(瀛政)으로 같은 영씨의 핏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씨의 후손 중에는 제후가 되어 그 봉국 이름으로 성씨를 삼은 사람이 십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러한 동이의 나라에는 서(徐)· 담(郯)· 황(黃)· 강(江) 등의 나라가 있어 그 위치는 중국의 동쪽인 동이 지역이었다.
그런데 시대적 구분 및 위인의 업적을 살피다 보면 단군 성조, 혹은 2세 부루 단군으로 보이는 백익의 성씨 역시 영씨라고 한다. 영씨와 같은 계통의 1성이 분화한 것으로 웅, 잉, 언, 은, 의씨 등이 있는데, 앞에서 본 초나라의 웅씨와 은나라의 은씨도 모두 동이임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소호는 나라를 세우고 소호지국(少昊之國)이라 불렀다. 소호의 부족은 새를 숭상하여 이를 관직명으로 삼았다. 이에 대하여 『춘추좌전』에서 담자(郯子)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선조인 소호가) 즉위하자 봉황이 날아들었다. 이로 인해 소호는 새로써 법도를 정하고 이를 관직명으로 삼았다. 봉조씨(鳳鳥氏)는 역(歷)을 주관하였고 현조씨(玄鳥氏)는 춘분과 추분의 시기를 구별하는 일을 담당하며, 백조씨(伯鳥氏)는 하지와 동지를 구별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청조씨(靑鳥氏)는 양기가 만물의 힘을 열어주는 일을 관장하고 저구씨(雎鳩氏)는 사마(司馬)를 관장하며 축구씨(祝鳩氏)는 사도(司徒)를 담당했다. 시구씨(鳲鳩氏)는 사공(司空)을 맡았고 상조씨(爽鳥氏)는 사구(司寇)를 관장하며 골구씨(鶻鳩氏)는 사사(司事)를 담당하였다.”
서기전 24세기는 푸날루아(punalua) 모계제 시대였다. 여러 남편과 여러 부인이 한 가정을 이루는 양급제(兩級制) 시대인데, 지금까지 ‘우리 남편, 우리 부인’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래로부터 전해진 말이 아닐까? 즉 당시는 왕위를 사위에게 넘겨주던 시기로서 지금 아들이라고 알려진 자(子)는 본래 사위이며, 우리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는 남(男)이라고 하였다.
고양씨의 3대 족보가 보정시에서 출토된 당우 3과병명(唐虞 三戈兵銘)에 기재되어 있는데, 씨칭과 족칭은 모두 하나의 소리계통(聲系)에 속하며, 이를 통해 당시의 정치 권력의 역학 관계 등 일어난 정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맨 위의 청동검에는 할아버지들(祖), 다음 청동검에는 백익·단군·마한시조 아버지들(父), 마지막 청동검에는 순임금·형제들(兄)의 이름이, 즉 3대에 걸친 이름들을 표기한것이라고 한다. 형제들끼리 부인들을 공유하던 푸날루아 제도는 은나라보다 몇백 년 이른 시대이므로 이 청동기는 확실하게 은나라 시대의 이전의 것이라고 중국 낙빈기는 말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서기전 1,800년 이전의 청동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은나라의 건국연대인 서기전 1,766년보다는 앞설 수 없다고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라 이전의 신농으로부터 백익에 이르는 집단의 실체를 부정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전 시기의 청동기라 할지라도 은대 이후의 것이 되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결과 서기전 2,500년대의 청동기를 서기전 1,8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둔갑시켰으며, 이로 시작하여 동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꽃피운 것으로 청동기 연대를 정리함으써 주나라의 금문은 질과 양의 면에서 훌륭하게 발달하다 그 후대에는 갑자기 사라지는 것으로 꾸며놓았다.
실은 문화가 발달하였던 은나라 시대의 청동기가 후대인 주나라 시대의 것보다 훌륭한데도 말이다. 사용하던 한자의 숫자도 은나라가 주나라 시대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조작에 의해 서주의 것은 고금문이 되고, 동주의 것은 말기의 금문이 되어버리고 모두 갑골문보다도 시기가 늦어지게 된 것이다.
[발췌=우리 고대 역사의 영웅들]
저자 황순종, 나영주
펴낸곳 시민혁명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