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영웅전 6호 '단군 성조(聖祖) 임검'
- 단군은 신화가 아닌 중국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실재한 역사 - 단군이 도읍한 곳은 평양(북한 평양이 아님) 또는 아사달 - 단군은 거수국 외에도 주위 나라들을 도와
이성계가 2천 년 전 조선을 새롭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국했던 것처럼, 북한 김일성은 평양이 조선의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일본이 만들고자 하고 싶었던 평양도 북한의 평양이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도 단군 조선이 평양에서 개국했어야 김일성 왕조의 명분이 생기는 것처럼, 역사는 내가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라 글과 말로 면면히 이어져오는 우리의 정신이다. 역사를 제대로 알려고 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번 동이영웅전 6번째로 소개하는 영웅은 임검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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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성조는 신시의 위업을 이어 조선이라는 통일 왕조를 시작하신 개천절의 영웅이다. 신시의 통치자를 환웅이라고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단군이라고 불렀는데 초대 단군 성조의 이름은 왕검이라 전한다.
왕검은 한자화된 이름으로 원래의 이름은 임검이었으며, 그의 이름이 제왕을 뜻하는 우리 말의 보통 명사인 임금으로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부도지』에서 “환웅씨가 임검씨를 낳았다”고 한 데서 확인된다.
단군 왕검을 성조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를 처음 개창한 조상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호칭이다. 그러나 고조선을 말살하기 위해 광분했던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은 신화이며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는 학설을 만들어낸 이후 학자들조차 지금까지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국민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어, 단군 성조라는 표현에 대해 국수주의적 편견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 듯하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식민지 역사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기에 이런 일도 생긴 것이다.
그러면 단군에 관한 기록이 과연 신화인가? 물론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다. 그 이유도 지극히 간단하다. 앞에서 복희씨에 관한 부분은 신화적 내지 전설적 요소가 다소 있었지만, 신농씨로부터 치우씨와 소호씨에 이르기까지 중국 기록에 근거한 역사, 바로 그 뒤 기록인 단군을 어떻게 신화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한웅(환웅)씨가 임검씨를 낳았으니, 때에 4해(海)의 여러 종족들이 천부의 이치를 익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혹에 빠져 세상이 고통스러웠다. 임검씨가 천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천웅의 도를 닦아 계불의식을 행하여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이어받았다.
갈고, 심고, 누에를 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임검씨가 뿌리를 먹고 이슬을 마시므로 몸에는 털이 길게 자랐는데, 4해를 널리 돌아다니며 여러 종족을 차례로 방문하니, 백년 사이에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위의 내용은 『부도지』 12장에 나오는데, ‘갈다’의 뜻은 밭을 가는 것뿐만 아니라 돌을 갈아 생활필수품들을 만드는 것이고, 일찍이 실크를 생산하고 이를 소·말과 함께 주변에 교역하여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했는데 단군 자신은 편한 삶을 포기하고 종족의 화합과 언어의 통일을 위하여 원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사해를 다니느라 몸에는 털이 길게 자란 것이며 이로 인해 임검씨의 초상화가 풀옷을 입은 것처럼 묘사되었다. 널리 퍼져 살게 된 이후 차츰 언어가 변하고 마고의 법을 잊어버린 족속들의 화합과 율려 복본을 위해 단군 임검은 방문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구리족을 중심으로 통일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원행은 신라 화랑의 덕목이자 선도사상과 풍류로서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다. 즉 동북의 자방(磁方)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물과 육지가 서로 통하여 열 방향으로 갈리어 나갔다. 인삼과 잣과 7색 옥돌이 가득하니 자삭(磁朔)의 정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태백산 밝은 땅 정상에 천부단을 짓고 사방에 보단을 설치하였다.
보단의 사이는 각각 3겹의 도랑으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의 사이는 1,000리였으며, 도랑의 좌우에 각각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는 마고 본성에서 그 법을 취한 것이었다. 부도의 아랫 부분은 나누어 마을을 만들었다.
여기서 단군이 선택한 부도지 땅을 찾아보자. 고대인들은 자기력을 미지의 힘으로 생각했으며 자기가 많은 곳을 신성시하여 그곳에 신전을 건립했다. 물과 육지가 만나면서 동시에 물이 10갈래로 갈리어 나간다니 혹시 열수가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닐까? 또 태백산은 섬서성, 산서성, 하북성 등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
『설문해자』를 보면 인삼은 상당(上堂)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인삼은 산서성, 하북성, 요동성에서 산출된다. 『본초경집주』에도 인삼은 상당과 요동에서 난다고 하였다. 자삭방에서 난 인삼은 장생하게 해 주는데 방삭초, 불로초라고 하는 것이며 부도지역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인삼과 잣, 옥의 (천)부인은 불함삼역의 특산이요, 4해(海) 종족들의 하늘의 은혜였다고 하였다. 잣은 침엽수로 더운 남쪽 땅에서 자라지 않고, 현재까지 우리 민족은 잣을 먹을 뿐만이 아니라 한복에도 단추의 기능으로 잣물리기 장식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잣을 하늘이 주는 복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궁씨의 후예 6만명을 부도에 이주시키고,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를 새겨 천지의 물에 흘려보내 4군데 물의 종족들을 초청하였다. 이를 보고 모여들어 박달나무 숲에서 신시를 크게 열고, 계불로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을 살피고, 마고의 족보를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
북극성과 칠요의 위치를 정하여 넓고 평평한 돌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제사를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의 악을 연주하였다.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를 새긴 방장해인(方丈海印)을 나누어 주었고, 매 10년마다 신시를 여니 말과 글이 같아지고 사람들이 크게 화합하였다.
위에 묘사된 부도는 황토나 광야지가 아닌 것이, 뗏목을 8만 개나 만들려면 나무가 많은 산지일 것이며, 뗏목이 흘러 사방으로 다다르려면 상류에서 제작하여 둥글게 흐르는 강물을 이용한 듯하다. 예로, 황하는 3면 방향으로 흐르기에 4군데 물의 모든 족속을 모을 수가 있다.
『습유기』를 보면 단군의 ‘뗏목’ 이야기가 나온다. 단군이 개국하던 시기와도 딱 맞고 뗏목이 4해를 일주한다는 사실도 일치한다. 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며 기록이자 역사임이 다시 한번 더 확인된다. 『습유기』에 전해지는 기록을 보자.
요 재위 30년, 서쪽 물(西海)에 거대한 ‘뗏목’이 떠 있었다. 뗏목 위에 빛이 있어 밤엔 밝게 빛나고 낮엔 사라졌다. 물(海)에 있던 사람이 멀리서 그 빛을 보고는,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품이 마치 별이나 달이 깜박거리는 줄 알았다고 했다. 뗏목은 항상 4해를 돌면서 떠다니다가 12년에 한번 일주하기를 반복한다.
관월사 또는 괘성사라고도 한다. 우인(羽人)이 그 뗏목에서 살고 있다. 신선이 이슬을 머금고 씻어내면 해와 달도 어둑어둑해진다. 우·하 말엽에 이르러 뗏목에 대해 기록하지 않게 되었다. 물(海)를 오가는 사람들만이 그 신비하고 아름다움을 전했다.
『삼국유사』에 보인 단군에 관한 내용을 분석해도 결론은 같다.
『위서(魏書)』에 말하기를 “2천 년 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와 같은 시대였다.”
이 부분은 중국의 『위서』라는 책을 인용하였는데 신화적 요소는 전혀 없다. 그리고 요임금과 같은 시대인 서기전 24세기에 조선을 세웠다고 했으므로 이들은 공통적이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단군과 고조선은 없었던 존재로 취급했다. 그 이유는 고조선의 역사가 일본의 역사보다 무려 2천년이나 길어 식민지배를 하는 일본의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삼국유사』는 이어 또 이렇게 썼다.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옛적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여러 번 천하에 뜻을 두고 세상을 구하려고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을 보고 홍익인간 할 만하다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 내려가니 이를 신시라 하였으니 이가 환웅천왕이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있어 한 굴에 살며 늘 환웅 신에게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 빌었다.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먹되 백일 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먹고 참으니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잠시 인간이 되어 그녀와 혼인하매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제요 즉위 50년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처음 조선이라 칭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은거하여 산신이 되니 1,908년이 흘렀다.”
다소 길지만 골자는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으며 하나라보다 일찍 나라를 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고기』를 인용했다고 하였는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같은 내용을 『단군고기』에 있다고 하였다. 앞에서 환웅은 신시 통치자의 칭호임을 보았는데 여기의 환웅은 아마도 마지막 환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그를 하느님 환인 (일연스님은 불교 용어인‘제석’이라 풀이하였다)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였을 뿐이다. 영웅의 신격화는 옛사람들의 일상적인 표현방식인데 이 정도를 가지고 신화 운운하는 것은 언어 도단이다.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종족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데, 식민사학자들이 아니라면 이런 것을 가지고 신화라고 우기지는 못할 것이다. 또 단군의 역년 1,500년 또는 1,900년은 한 분의 단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조선 단군들의 역대 지위년도를 통합한 것으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산신이 되었다는 부분도 당시 고조선의 종교인 신선도의 관념에 따라 신선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에 단군 왕검을 선인(仙人) 왕검으로 기록하였는데, 선인은 즉 신선으로 종교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보면 된다.
위의 기록에서 단군이 도읍한 곳은 평양 또는 아사달이라고 하였다. 이 평양이라는 지명 때문에 단군 성조의 도읍지를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는 낭설을 일본인들이 만들어냈다. 고조선이 한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약소국이었다는 허구를 우리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조작을 시작하였던 1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와 만주로 대폭 축소된 조선시대 이후에 그렇게 생각한 역사가들도 있었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을 필두로 근대적 역사학 방법론으로 단군의 도읍을 중국 대륙으로 논증한 사학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단군 성조의 도읍한 평양이나 아사달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대륙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신시의 치우 천왕의 나라인 구리나 청구 등이 대륙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환웅의 아들인 단군이 거기서 가까운 곳을 버리고 수천 리 멀리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옮겨야만 할 불가피한 사연이 있었을까?
중국의 숱한 기록들을 보면 단군의 도읍이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 명확하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쉽게 알 수 있는 문헌을 하나만 보기로 하겠다.
『산해경』「해내경」에는 “동해의 안쪽, 북해 가에 조선이 있다”고 설명해 놓았다. 이것만큼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고조선의 위치를 말한 기록도 드물다고나 할까?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으며, 동시에 북해라고 한 발해(渤海)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 고조선이 현재 북한 평양에 도읍하지 않은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발해가 현 발해가 아니고 산동과 대륙의 중간에 위치한 대륙택이라는 이론이 새로이 제기되고 있다. 전에는 산동이 섬이였다. 해수면의 변화와 황하의 퇴적으로 인해 강이 메꾸어 지는데, 이에 발해란 산동 태산을 둘러싸고 있는 초승달 형상의 큰 물줄기를 일컫는 것이였다. 『우공』에서도 “해대(海岱)란 바로 청주(靑州)이다”라 하였다.
초기 단군왕검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사기』에 제순 때 중원의 북쪽에 산융, 발, 숙신이 있다고 하였다. 이 산융이 고조선의 거수국임을 앞에서 언급하였는데 여기의 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숙신은 조선을 달리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같은 나라를 말한다.
공자나 사마천은 조선이라는 이름 대신에 숙신이라는 용어를 주로 썼다. 서기전 7세기의 춘추시대에 오면 『관자』라는 책에는 『사기』의 발·숙신 대신 발·조선이라고 표기하여 숙신이 조선과 같은 실체임을 알게 한다. 즉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고조선이 중원의 바로 북쪽에 있었다는 점이다.
고조선이 만약 북한 지역에 있고 그 도읍이 북한 평양이었다면 중원은 한반도 내에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경기도가 당시 중원이 되어야 하는 해괴망측한 결과가 된다. 그런데도 아직도 중·고등학교 국사 공부시간에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고 배우고 있다.
역사의 진실은 고조선이 한반도의 약소국이 아니라 대륙의 광대한 영토를 아울러 가진 선진 대국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보자.
단군 성조께서는 나라를 9부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는데 신채호 선생은 조선의 9부를 청(또는 남藍), 적, 백, 현, 황, 견, 우, 방, 양부라고 설파하였다. 그런데 중화에서 우리 동이를 총칭하여 9이(夷)라고도 하였으니 이 말은 공자가 숙신(조선)이라는 국가 명칭 대신 민족 명칭으로 잘 쓰던 말이다.
『후한서』에 보면 9이의 이름을 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 등의 아홉이라 하였다. 이를 신채호의 9부와 비교해 보면 그 중 7개의 이름이 일치하며, 다른 둘은 각각 풍이, 양이와 청부, 양부이다. 이것으로 보면 조선 9부의 이름을 따서 중화에서 9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다고 보이지만, 중국의 다른 기록에는 청부(남부)에 대응하는 남이(藍夷)와 양부에 대응하는 양이도 기록된 것을 볼 때, 신채호의 9부 명칭은 정확한 자료에 의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9이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면 고조선의 강역이 대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에 관한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나마 퍼즐을 맞추는 식으로 9이의 강역을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9이는 그 기록 순서대로 중국의 가장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북을 거쳐 북쪽을 가로 지나 동북과 동쪽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중화의 북쪽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9이의 범위가 서쪽의 서융은 물론 북쪽의 북적과 동쪽의 동이를 포괄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서융의 하나였던 진나라와 북적의 대표격이라 할 흉노 등도 앞에서 본 것처럼 고조선의 범위 안에 있던 동족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첨언해서 말하자면 가장 서쪽의 견이는 뒤에 견융으로 불러 서쪽의 이(夷)가 융(戎)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고, 백이와 적이는 뒤에 백적과 적적으로 불러 북쪽의 이(夷)가 적(狄)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게 한다. 중화인들의 부르는 호칭에 따라 원래 한 뿌리이던 우리 민족이 서로 별개의 민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이(玄夷)는 발해 연안에 있던 동이의 종주국‘고조선’을 가리키는 말이며, 풍이(馮夷)는 조선 9부의 이름에는 없지만 중화 동쪽에 있던 복희씨의 출신지이기 때문에 그의 성씨인 풍을 따라 풍이로 부른 듯하다.
이렇게 광대한 나라 고조선은 신시의 유업을 이은 것이었으니 단군은 과연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까? 당시는 제정일치 시대로 종교적인 일이 곧 정치로 가장 중요한 제왕의 역할이었으니 『부도지』에는 이렇게 썼다.
사방의 여러 종족들이 천부의 이치를 익히지 않고 미혹에 빠졌으므로 두루 순행하여 깨우치니 백 년 사이에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미혹함을 풀어 근본으로 되돌아갈 것을 맹세하여 부도 건설을 다짐하니, 이는 종족들이 모여 달라진 언어와 풍속을 고치고 천부의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황궁씨 이후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받아, 새 나라에 부도를 세워 흩어진 사방의 종족들을 깨우치는 구심의 역할을 다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십 년마다 신시를 열어 여러 종족의 대표들을 모으니,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로 되어 사람들이 화합하였다.
또 신시와는 별도로 두 강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8택(澤)에 해시(海市)를 열어 매년 10월 제사를 드리니 사방에서 육지와 바다의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 종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종족들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받들어 올리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라고 하였다.
이를 가리켜‘조선 제사 朝鮮祭’라 하였다. 이로부터 나라 이름이‘조선’이 된 것은 아닐까? 또 산의 종족과 바다의 종족이 모두 모여 교류하고 제사를 지내고 새해맞이 제사와 추수감사제사를 지내고 모여 잔치하며 물자를 교류하였다. 이에 4군데의 물(四海)에서 산업이 일어나고 교역이 왕성해지므로 천하가 넉넉하여 부족함이 없었다.
이때 중원은 요(堯)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5제 시대의 나라 이름은 우(虞)나라로 고조선의 거수국과 같은 지위에 있었다. 그런데 요는 부도의 법을 따르지 않고 5행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장하며 당도를 세워 대립하였다.
그는 황궁씨의 후예인 묘예 (苗裔; 구리의 후예인 3묘, 묘족)를 쫓아내니 그들은 동·서·북의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이는 먼 옛날 5미의 변이 있은 이후로 인간 세상의 2번째 큰일이었다.
이에 단군 성조께서는 유호씨 부자에게 가서 요를 깨우치라 명령하였다. 요는 그들을 공손히 대접하니 유호씨는 하빈과 여러 곳에 옮겨 살며 그를 감시하였다. 이때 요는 유호씨의 아들 순(舜)의 사람됨을 보고 다른 뜻을 품어, 일을 맡기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미혹하여 아버지 몰래 그녀들을 아내로 삼고 요에게 협조하였다.
지금까지 『부도지』를 토대로 서술하였으나 당시 중화와의 관계는 우리 고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상세하게 검토하기로 하겠다. 순의 아버지가 유호씨라고 하였는데 『사기』에는 ‘고수’라고 하였으며 우리의 『단기고사』에도 그렇게 되어있다. 『사기』에는 고수가 장님에 완고하며, 처가 죽은 뒤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을 사랑하여 늘 순을 죽이려 했다고 썼다. 그러나 『단기고사』에는 고수가 고조선의 명문가 출신으로, 순이 요에게 벼슬하므로 불화하여 고수가 순을 죽이려 했다고 하였다.
우리의 기록들에서는 순의 아버지가 순을 죽일 만한 상황이 이해되지만, 『사기』의 기록대로라면 미천한 집안의 장님이 굳이 아들을 죽여야만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이는 사마천이 중요한 사실들을 숨기기 위한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앞에서 본 중국인 낙빈기에 의하면 순은 5제의 두 번째인 전욱의 손자이므로, 순이 미천한 집안이라는 사마천의 말은 거짓임이 드러난다.
전욱의 다음은 사위인 곡이 제위를 이었으므로 전욱의 아들은 5제에 들지 못했는데, 그가 누구인지 모르나 순의 아버지라야 순이 전욱의 손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의 아버지가 바로 고수로서 전욱의 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를 감추기 위해 고수를 전욱의 5대손으로 만들었으나 제왕의 5대손이 왜 미천한지 알 수 없다. 또 5대손이면 그 아들 순은 6대손으로, 요의 딸들과는 3대의 세대차가 있으므로 결혼 상대가 될 수 없다.
한편 순의 아버지를 유호씨라고 한 것은 고수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의 나라 이름인 성씨를 호칭한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기록 방법인데 『사기』에서는 순의 아버지를 나라를 가진 씨로 기록할 수 없으므로, 미천한 신분임을 보이기 위해 고수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유호씨는 순이 요를 돕는 것을 누차 경계하였으나 순은 듣지 않고 현자를 찾아 죽이고 3묘를 정벌하니, 이때의 일에 대하여 『부도지』에 이렇게 썼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순을) 꾸짖고 그(요를 말함)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하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태백일사』에도 보인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중화의 기록이 얼마나 많이 조작된 것인지 알게 된다. 공자가『서경』에서 요를 중화의 시조로 만든 것은 위에서 보듯이 그가 대국 고조선에 대항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성군으로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설정하기 위하여 선양설을 만들어냈으나, 위에서 보았듯이 선양의 실체를 알고 나면 참으로 허망한 생각만 들 뿐이다.
유호씨는 이후 둘째 아들 상에게 그 형인 순을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 마침내 당도를 혁파하였다. 요는 유폐 중에 죽고 순은 창오의 들로 도망하여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때 우(禹)는 아버지를 처형한 순에게 원한이 있었으므로 그를 추격하여 죽였다. 순의 두 처도 역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우 역시 요의 무리이기 때문에 제왕을 칭하고 고조선에 대항하여 유호씨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여러 번 패하여 모산의 진지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계가 대군으로 유호씨를 치러 왔으나 번번히 패하고 말았다. 유호씨와의 싸움은 공자의 『서경』에도 나오는데 그 결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이 군사들에게 훈시한 말만 써놓았으니, 『부도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의 설을 발전시켜 『사기』에서 허위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요가 즉위한 지 70년 만에 순을 얻어 등용하였으며
다시 20년 만에 연로하여 은퇴하고, 순에게 천하의
정사를 대신 맡아보게 하고 또한 천자로 추대하였다.
요는 제위를 물려준 지 28년 만에 붕어하였다.
요약하면 요 임금이 즉위한 뒤 118년 만에 붕어했으므로 만약 20세에 즉위하였다면 138년을 살았다는 것이 되니 우선 믿기가 어렵다. 또 90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고 하였으나 중국인 낙빈기가 밝힌 계보에 따르면 그의 재위 기간은 38년에 지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요의 재위를 오래도록 만들어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94년 동안 재위에 있기는 하였으나 7세에 왕이 되어 100세에 물러났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요의 생존시 순이 28년 동안이나 천자의 자리에 있었다는데, 만약 요가 노쇠하여 물려주었다면 그 후 28년이나 더 살았다는 점도 무언가 사연이 있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유가의 선양설에 반해 한비자는 명백한 반대 입장을 취하여 “순이 요를 핍박하며 우가 순을 핍박하고···” 라고 하여 순이 요를 핍박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위 우리 측의 기록에서 본 것과 같은 취지이다. 다음에 우가 순을 역시 핍박했다고 하여 선양설을 부인하였는데 『사기』에는 이 부분도 순이 우에게 선양한 것으로 만들었으니, 전 대의 한 번의 선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것일까? 낙빈기는 여기에 대하여 순이 남쪽으로 순행을 간 사이에 왕실의 여성 세력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우를 옹립했다는 것이다.
『대대례기』에 보면 “순이 죽자 우가 대신하여 흥하였다. 우는 갑자기 명령을 받고 (제위를) 이어····”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선양에 의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낙빈기의 설명이나 우리의 기록이 옳다는 근거가 될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의 구상 초기에 성군으로 기록된 요,순,우 3사람을 영웅전에 실을 생각으로 연구하였으나 거짓으로 점철된 사실을 알고 제외하였다. 다만 고조선과 관련되는 범위 안에서 그들의 행적을 본다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우선 순이 요를 대신하여 섭정할 때 동쪽으로 순수한 일에 관하여 『서경』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동방의 왕을 알현하고 1년의 달과 날짜를 협의했다.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하고, 5례·5옥·3면·2생·1사 등 예물에 관한 것을 고쳤다.
여기서 “동방의 왕을 알현하였다(사근동후, 肆覲東后)”는 것은 고조선의 최고 통치자인 단군왕검에게 거수국의 군주로서 예의를 갖춘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달력, 음률 및 도량형을 협의하고 통일했다는 것은 고조선을 기준으로 맞추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때 중화가 고조선보다 상국이나 문화적으로 우월한 입장이었다면“(중화에) 맞추도록 교시하였다”라는 식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고조선에서 대홍수를 다스린 경험을 중화에 전해 준 사건이다. 요 때부터 중원은 대홍수의 피해가 심각하여 곤에게 산과 강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9년 동안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요를 이은 순은 곤을 처벌하는 한편 곤의 아들 우를 사공으로 임명하여 다시 산과 강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 무렵 단군께서는 중원의 수재를 가엾이 여겨 맏아들 태자 부루를 보내 우와 만나게 하여 치산치수의 비법을 전해 주도록 하였다. 이런 사실은 『태백일사』와 『단군세기』에 씌어 있는데, 중화의 『오월춘추』에는 또 이렇게 썼다.
우(禹)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공을 다시 이루었다.····
꿈에 붉은 비단옷을 입은 현이의 창수 사신을 보았기에 제사를 지냈다.
우는 아버지 곤이 못다 이룬 홍수 다스리는 공을 이루었는데, 꿈에 현이의 창수 사신을 보았다고 했다. 현이는 앞에 9이에 관해 볼 때 동이의 종주국 고조선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여기의 창수는 창해로도 쓰는 지금의 발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현이의 창수 사신이란 발해 연안에 있던 고조선의 단군왕검이 보낸 사신인 태자 부루를 뜻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우가 꿈에 만났다고 하였으나 꿈속에서 홍수 다스리는 어려운 일이 어찌 전해질 것인가? 그러므로 단재 신채호는 태자 부루가 우에게 치수의 방법을 전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리 역사와 『오월춘추』를 참고한 즉 대개 단군이
팽오를 시켜 홍수를 다스리고 다시 지나(중화)의
물난리를 애타게 여겨 부루를 보내 『중경』을 주고,
또 조선의 홍수 다스릴 때 쓰던 탑국과 거부 등을
주어 드디어 우로 하여금 공을 이루게 한 고로,
우도 곧 조선을 앙모하여 조선의 제도를 본떠서····
그가 죽을 때에도 회계의 인연을 잊지 못하여 자기 몸을
회계산에 묻히게 함이라.
부루가 우를 회계산에서 만나 고조선의 서책과 장비들을 전해 주었다는 것인데 다른 곳에는 회계산이 아니라 도산에서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단재는 둘을 동일한 산으로 보았다).
단군이 임금성에 도읍을 세워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지으며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를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옛 신지씨의 후손)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 아들 부소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단군 8가라 하고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관직명에 매, 두루미, 백로 등 새가 여러 종류인 것이 조이(鳥夷)족 소호 금천씨의 조류 명칭으로 관직명을 정하였던 전통을 이은 듯하다. 후에 푸른 사슴과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地)에 모습을 드러냈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호가를 용가(龍加)로, 노가를 녹가(鹿加)로 고쳐 불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 나라를 다스린 지 30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의 들녁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아사달 아래 당장의 들녁에 거처하는데 이곳은 사방 수백리에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녁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처럼 모두 바르게 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하니 만백성이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수재로 인한 전염병을 치료하고자 고시씨의 옛 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 쇠와 돌을 맞부딪쳐 불씨를 만들어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이에 부싯쇠, 부싯돌, 부싯깃 등의 말이 생겨났다.
후대에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 라고 팽오의 업적이 나오는데, 『한서』의 “무제가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팽오가 예맥 및 고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에 등장하는 팽오는 동명이인이고 모두 산동 서주지방 및 팽성의 군주를 일컫는 것으로 파악된다.
단군은 여러 가(加)와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 음양, 사시(四時)의 신뿐만 아니라 산악, 하천, 마을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 종료시에 단군은 단군 8조(천범8조)의 교령, 홍범8정(政)을 유시하였다. 성(誠), 심화(心化), 경효충(敬孝忠), 화목(和睦), 애우(愛佑), 양보(讓步), 구휼(救恤), 경천친민(敬天親民) 등 가정·사회·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의 윤리를 가르쳤는데, 즉 하늘과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함부로 하지 말라 가르쳤다.
홍범8정의 3번째는 사(祀)를 말하는데 이는 신명(神明)과 통함으로써 그 근본에 보답하라는 것이다. 즉 승냥이와 수달도 은혜를 갚으니 제사 지내는 것을 잊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부여, 예맥, 마한, 신라, 고구려 등의 모든 나라는 10월에, 백제는 사중월에 지냈으며, 각각 도천, 무천, 제천, 교천, 영고, 동맹 등으로 불렸다. 특히 부여는 제사 드리며 소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다. 그런데 중화의 기록에 의하면 고요가 제사를 많이 지낸 임금이라고 전하므로 단군과 고요를 동일인물로 보아 연구해 봄 직하다.
고조선은 초기부터 법이 엄격하였고 제9대 아술 단군대에 가서야 조금 유연해졌다. 아술 단군은“변을 싸면 땅이 더러워지기는 하지만 가끔은 비와 이슬이 내리기도 한다”며 금법 위반자를 용서해 주자 그가 교화 감화되었다 하는데, 이것은 초대 단군 때 이미 엄격한 법이 세워졌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몇백 년 뒤인 색불루 단군 때(서기전 1,282년)에는 처벌 관련 조항을 명시화한 8조 법금이 시작되었다.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이 천년 간을 지속되니, 자연히 우리 선조들은 주변국보다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았다. 고조선의 공무도하가는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 즉 하층민도 공후를 다루고 노래를 지을 줄 안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후에 고조선을 이어받은 고구려의 교육수준은 대단했다. 거리마다 공부하는 큰 집 경당을 지었고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매우 좋아해서 문지기나 말먹이는 집 등 지위가 낮은 집의 자녀들도 이곳경당에서 밤낮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혔다.
박창화 필사본『고구려사초략』을 보면,
‘유(幽)와 기(冀)의 땅에 가보니
한인(漢人)들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자가 100에 1도
되지 않았고, 동물의 행동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403년)’
라고 도(鞱)가 광개토호태왕에게 보고하였던 것에서 고구려와 한인들의 교육 수준이 확연히 비교됨을 확인할 수 있다. 403년은 광개토호태왕이 중원을 차지한 때로써, 5부 8맥의 자식들이 태왕의 첩으로 살고 있었고 남쪽 땅을 복속하여 3한의 땅을 아우르고 서쪽으로 2개의 진나라(동진, 후진)의 땅을 억누르던 시대였다.
또한 동이의 후장 전통을 고구려가 이어받았으니, 금은 재물을 모두 함께 묻어 거창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미리미리 조금씩 준비해둔다고 하였다. 부여도 얼음을 여름철 시신 보존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순장도 많게는 100명이 넘었다. 고구려는 도굴을 차단하기 위해 돌을 쌓아 봉분 무덤을 만들고 소나무나 잣나무를 줄지어 심었다.
풍속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술을 잘 담그며 밤늦도록 남녀가 모여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고, 여러 잡신 귀신, 땅과 곡식의 신, 별들에게 제사하는 것을 좋아했고, 음력 10월에는 동맹을 천제를 지냈다. 고구려인의 모자는 골소라고 부르는데 대개 보라색 비단으로 만들며 금은으로 장식한다. 관리들은 거기에 새의 깃털을 2개 꽂아 일반인과 다르게 보이게 한다. 남자들은 저고리와 통 큰 바지와 흰 가죽 허리띠를 매는데, 이 흰색 띠는 황궁씨의 속신 백모지의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마고성에서 5미의 변이 일어났을 때, 가장 어른이었던 황궁씨가 백모(흰띠)를 묶어 마고 앞에 사죄하며 5미의 책임을 스스로 지고 복종을 서약하던 뜻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이 전통은 후대까지 이어져 내려왔는데, <양직공도>의 고구려 사신과 일본 아스카 및 나라시대의 남녀 복장 모두에 흰 허리띠를 매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발췌=우리 고대 역사의 영웅들]
저자 황순종, 나영주
펴낸곳 시민혁명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