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들의 진로 탐험-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립자, 빌 게이츠는 여전히 수많은 세계인들의 우상이다. 그가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를 다녔지만 중퇴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굉장한 다독가이며, 직접 저술한 책 '생각의 속도'는 출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 빌 게이츠는 청소년기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누구나 선망하는 대학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꿈을 이루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의 이야기가 진학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을, 어린 청소년들에게는 꿈을 찾고 실행에 옮기는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


학교공부보다 백과사전과 공상 좋아한 수재
하버드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드는 학교로 유명하다. 인구 약 5,000만 명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서울대 입학생 정원이 5,000명 정도인데 반해, 인구 약 3억 명인 미국에서 가장 좋다는 하버드의 신입생 정원은 1,60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날고 긴다는 수재들까지 도전하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한국에서 하버드에 직접 도전해 합격하는 학생은 공식적으로 한 해에 3~4명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빌 게이츠는 1974년 하버드에 합격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아서 한번 들으면 잊어먹지 않을 정도인 수재다. 나중에 미국 워싱턴주의 변호사협회 회장까지 지낸 아버지와 은행가 가문 출신인 어머니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 시애틀의 레이크사이드 사립학교에 들어갔다.

이 사립학교는 대학 입시를 겨냥해 중고등 과정을 하나로 묶어 가르치는 학제였다. 뉴잉글랜드에서 먼저 뿌리내린 프렙을 본따 서부의 새로운 산업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시애틀에도 도입한 것이다.

게이츠는 학교공부보다는 백과사전과 공상을 좋아했다. 백과사전은 거의 외우다시피 읽어 젖혔다.

“사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게 너무 많거든요. 백과사전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몰랐던 세상의 하나하나가 내 것이 되는 것 같아요.”

학교수업에는 그다지 큰 열의를 나타내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수학과 과학만큼은 아주 좋아했다. 그런 그가 하버드에 들어간 것은 매우 뛰어난 수학실력과 대학입시를 앞두고 마지막 한 해 열심히 공부한 덕 때문이다. 대학생까지 참가해 벌이는 유명한 수학경시대회인 퍼트넘 경시대회에서 게이츠는 거의 만점에 육박하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입시를 한 해 앞두고서야 본격적으로 공부라는 것을 했다.
 

   
▲ 빌 게이츠의 개인 블로그 가운데 독서 분야에 해당하는 '내가 읽고 있는 책'. 그는 해마다 수백 권의 책을 읽어치우는 독서광이다.

게이츠가 하버드 합격 사실을 안 것은 같은 학교 3년 선배인 폴 알렌과 RODS라는 회사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취업해 있던 때다.

그가 컴퓨터, 지금의 눈으로 보면 빈약하고 형편없기 짝이 없는데다가 덩치는 대형트럭에 육박하는 거대한 외양의 초기 버전 컴퓨터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레이크사이드 E8(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2학년에 해당)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항공공학 석사에 프랑스 소르본느대학 불문학 석사 학위까지 받고, 해군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한 레이크사이드의 수학교사 빌 더글이 레이크사이드 어머니회에 제안해 학교에 초기 컴퓨터의 단말기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 학생들이 컴퓨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채 대학에 가야 할 시대입니다.”

6년 전 1962년 시애틀의 엑스포를 경험한 어머니회는 즉각 바자회 수입금의 일부를 할애해 컴퓨터 설치비와 1년치 사용료를 책정하는 것으로 지원에 나섰다. 당시 컴퓨터를 처음 만난 레이크사이드 10대 소년들의 감동은 매우 컸다. 게이츠의 평생 친구인 폴 앨런은 이렇게 적었다.

“텔레타이프(당시의 컴퓨터 단말기)는 저음의 윙윙거리는 소리, 종이테이프 펀치의 기관총 소리, 그리고 프린터키의 철커덩 소리가 혼합된 멋진 소음을 냈다…. ASR-33은 시끄럽고 느린데다가 디스플레이 화면이나 소문자 입력 기능도 갖추지 못한 멍청한 원격 터미널이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나는 넋이 나갔다. 금세 이 기계로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레이크사이드의 해커동지들
나중에 ‘레이크사이드의 해커동지들’이라는 표현을 얻게 되는 이 소년들이 바로 시애틀을 미국의 새로운 정보통신산업의 중심지로 부상시키는 주역이 된다. 소년들은 거대한 컴퓨터를 자기 뜻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그 어떤 제대로 된 프로그램도 없던 시절, 제대로 가르쳐주는 스승도 없던 시기, 미지의 바다로 뛰어들어 용감하게 스스로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서로 명령어와 프로그래밍 요령들을 공유했다. 빌 게이츠도 처음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틱택토라고 하는 미국식 오목(O와 X를 맡은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표시해 먼저 3개를 나란히 만들면 이기는 게임)의 컴퓨터용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3살 때였다.

하비 모털스키는 컴퓨터의 랜덤 숫자생성기를 주사위로 활용하는 텍스트 기반의 ‘모노폴리’를 개발했고, 바브 맥코는 코드 300줄이 들어가는 버추얼 카지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당시 레이크사이드 해커들은 한 달 만에 어머니들이 배정해 준 컴퓨터 사용료 1년치 예산을 다 써버렸다.

그 해 1968년은 컴퓨터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였다. 바로 이해에 휴렛패커드는 최초로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데스크톱 계산기 출시했다. 또한 임의접근기억장치인 DRAM이 발명 특허를 받았고,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인텔을 공동 창립한 해도 이 해다.

소년 해커들의 ‘모험’은 1972년 여름 폴 앨런이 빌 게이츠에게 전자전문잡지 <일렉트로닉스>의 한 귀퉁이에 실린 10줄짜리 기사를 보여주면서 흥미나 취미 수준을 뛰어넘어 진짜 모험, ‘비즈니스로의 모험’으로 발전한다. 인텔이라는 신생기업에서 8008이라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내놓았다는 기사를 보며 둘은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하는 이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가진 성능은 앞으로 굉장히 빠르게 향상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컴퓨터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로부터 3년 뒤 하버드대학 2학년 때인 1975년 게이츠는 앨런과 함께 하버드 스퀘어에서 <포플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에 실린 한 조립 컴퓨터 사진을 보고 흥분에 빠진다. 미국의 인기공상과학드라마 <스타트렉>에 나오는 행선지 이름 알테어를 따서 이름 붙인 최초의 본격 개인용 컴퓨터가 나왔다는 것이다. 빌과 폴은 이 알테어 컴퓨터가 정확히 어떤 용도로 쓰이게 될지는 몰랐지만,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과 컴퓨터 업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두 사람은 당시 점차 성능이 크게 향상돼 가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프로그래밍 언어를 갖게 되면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다고 깨달았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컴퓨터의 두뇌인 마이크로프로세서에게 명령을 내려 작업을 수행하게 해준다. 당시의 컴퓨터는 이게 아직 개발돼 있지 않았다.

폴과 빌은 앞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보다 더 성능이 향상되고 대량생산으로 가격마저 적정하게 떨어지면 개인들도 저마다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새로운 컴퓨터 문명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단이 필요했다. 바로 진로에의 결단이 필요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컴퓨터 문명 앞의 진로 결단

   
▲ 알테어 컴퓨터

당시 빌은 하버드대 2학년이었고, 폴은 워싱턴주립대학 컴퓨터공학과를 3년 다닌 뒤 휴학하고 취직을 한 상태였다. 폴의 부모님은 컴퓨터와 관련된 일에 대해 대부분의 부모들처럼 미심쩍어했다.

하지만 폴은 이미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휴학해서 프로그래머로 취직까지 한 상태였다.

빌이 문제였다. 빌의 부모님은 자식의 미래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존중해 주었다. 진보적이면서도 절제된 가풍의 집안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빌의 누나 크리스티는 바로 그런 식으로 해서 전교 수석을 달려 나중에 대형 회계회사의 회장직에 올랐다.

빌의 부모님은 빌의 진로와 관련해 마음으로는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당연히 하버드에서도 법학을 전공하기를 바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로에 대한 구상이 좀 복잡했다.

어릴 때는 과학과 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과학자가 된다는 말도 자주 하곤 했다. 동시에 경영에 대한 관심도 컸다. 유명한 변호사인 아버지는 집에서 미국의 경영자 전문매거진 <포춘>(Fortune)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빌은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포춘>을 탐독해왔다. 빌은 나중에 폴에게 <포춘> 신년호를 보여주며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포춘 500대 기업(포춘이 매년 뽑는 세계우수기업 500개)을 운영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우리도 언젠가 기업주가 됐으면 좋겠다.”

빌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법학뿐 아니라 경제학을 한다는 생각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폴과 컴퓨터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고 속속 업그레이드돼서 나오는 초기 소형컴퓨터에 특화된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하면서 전공을 응용수학으로 바꿨다. 그런데 이마저 버려야 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빌과 폴은 무엇보다 새로운 소형 컴퓨터 알테어의 운영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미래를 결정짓는 최대의 관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둘은 총력을 다해 프로그래밍 작업에 나섰다.

바로 그 시기 상당히 많은 초기 컴퓨터의 마니아와 해커들이 이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초기 소형컴퓨터 제조회사를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거나 보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무서운 라이벌들이 속속 기숙사와 창고, 빈 사무실 등에서 새로운 문명을 열어젖힐 무겁고도 중대한 레이스에 돌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당시 그들이 얼마나 혼신의 에너지와 능력을 모아 최선을 다했는지 빌은 이렇게 기억한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알테어를 위한 베이식(운영 프로그램)을 짜는 동안 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1975년 겨울 나는 기숙사 방안을 수 없이 맴돌았다. 폴과 나는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우리는 밤낮을 잊고 살았다. 책상에 앉아 있거나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기 일쑤였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온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베이식은 5주 만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에 완전히 온몸을 던져 뛰어들지 않으면 장래의 소형 컴퓨터를 위한 소프트웨어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영원히 놓치게 된다고 우리는 판단했다.

1975년 폴은 원래 다니던 회사의 프로그래머 일을 그만두었고(당시 폴은 하니웰이라는 큰 회사에 다니면서 퇴근 뒤부터 새벽 3시까지 는 빌과 알테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1인 2역을 해냈다), 나는 대학에 휴학원을 제출했다.”
 

   
▲ 대형 컴퓨터를 생산하는 거대기업 IBM 본사.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에 운영체제를 납품하면서 비약적인 성공을 거둔다.

빌이 하버드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과 상의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부모님을 ‘설득’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리겠다는 빌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를 깨달은 부모님은 아들의 뜻을 받아들이셨다.

처음에 빌은 하버드를 떠나는 것에 대해 다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기도 했다. 잠시 공부를 그만두고 회사를 차렸다가 나중에 돌아와 학업을 마친다는 식으로 말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대학교의 장기휴학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대학에 복학해 학위를 마칠 수 있다. 그러니까 게이츠도 이런 장기휴학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버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강렬한 의지를 안고 ‘떠났다’라고 해야 맞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의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탄생했다.

“나는 대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내 또래의 똑똑한 친구들과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릴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아홉의 나이로 그렇게 나는 사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빌 게이츠가 하버드를 떠날 때 예상한 대로 세계는 그때부터 엄청나게 바뀌었다. 게이츠 자신은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세계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결정적인 순간 게이츠 자신이 진로에 대해 가장 용감하고 정확하게 결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는 그 뒤의 더 큰 본질을, 부분 보다는 전체를, 직업보다는 산업을 보는 거대한 통찰력이 바로 게이츠 진로 결단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빌 게이츠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몇몇 과목의 시험에서 낙제를 받았다. 하지만 내 친구는 모든 과목의 시험을 통과했다. 지금 그 친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엔지니어이고 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오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운 빌 게이츠와 폴 앨런 두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자녀의 개성과 자기주도권을 인정하는 좋은 부모

- 빌 게이츠의 부모는 아들의 흥미와 적성을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희망을 자녀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나중에 빌이 마이크로소프트의 특허소송으로 고전할 때도 아버지는 변호사의 경험을 살려 아들을 조언하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 폴 앨런의 부모도 넉넉하지는 않았으나 자식의 미래에 대해선 아낌없이 투자했다. 사립학교에 보내고, 나중 아들 졸업식 때 컴퓨터 사용시간을 오버해서 쓴 200달러를 다 갚아준 것도 아버지다.

2. 좋은 학교 레이크사이드
- 교육에 있어서 진보적이었다. 규칙은 적은 반면 기회를 많이 주었다.
- 학교 최고의 전통이 “실제적 경험 없이 책으로만 하는 공부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매우 실천적이고 동시에 앞서가는 학교였다.

3. 좋은 교사들
- 고급기하학을 가르쳤던 빌 더글은 레이크사이드 학생들이 컴퓨터에 대해 좀 더 재미있는 것을 배우기를 바랐다. 학생들이 컴퓨터에 대해 제법 지식을 갖고 대학에 진학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1968년 어머니회를 찾아가 컴퓨터 설치를 제안했다. 당시 다른 학교들은 컴퓨터를 가르칠 때 구식 메인프레임에 대해 이론 정도나 가르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4. 좋은 친구들: 레이크사이드의 컴퓨터 해커들
- 1968년 대형 트럭만한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게 되자 몰려온 첫 번째 레이크사이드 학생그룹이다. 빌 게이츠도 잠시 뒤 여기 합류해 폴 앨런의 단짝이 된다.
- 당시 20명 남짓 되는 학생들이 컴퓨터실에 들르다가 나중에는 6명 정도가 핵심적인 열성파가 됐다. 원래 프로그래밍은 고독한 작업이기에 이들은 곧 형제처럼 친해졌다.

5. 깨어 있는 어머니회
   
▲ 빌 게이츠의 두 번째 저서 '생각의 속도' 1999년
- 어머니들은 빌 더글 교사의 조언대로 매년 여는 바자회 수익금으로 컴퓨터 타임쉐어링을 위한 텔레프린터 단말기의 임차 비용과 연간 사용료를 대주기로 결정했다.
당시의 타임 쉐어링은 하나의 거대한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여러 명의 사용자가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로, CPU의 처리시간을 세세하게 분할해 처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메인프레임에 여러 대의 텔레타이프(단말기)를 전화선으로 연결해 메일프레임 기기를 제어하거나 데이터를 받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 학생들이 한 달 만에 연간 사용료를 다 써버리자 어머니들은 추가예산을 다시 배정해 주셨다. 빌은 1968년이라는 시기에 자기들이 컴퓨터에 이렇게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정말 행운이고 정말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6. 인근에 있는 명문 워싱턴대학교의 존재
- 폴 앨런은 레이트사이드 졸업학년 때 같은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 대학원 컴퓨터공학과 실험실에 들어가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교수한테 들켰다. 당시 컴퓨터 실력이 좋은 폴이 대학원생들을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실험실 사용을 묵인받았다. 폴은 이 실험실에서 한 회사로부터 수주받은 회계프로그램 작업도 했다.
- 폴과 일부 친구들은 워싱턴대 컴퓨터공학 도서관도 무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거기서 최신 컴퓨터 자료를 보고 공부할 수 있었다.

7. 서부 선진지역 시애틀의 환경
- 시애틀은 미국의 서부 맨 북단에 있지만 서부의 선진 산업지역이었다. 이와 함께 인근에 원래부터 있는 거대 항공기제조회사 보잉사 및 대형 조선소, 그리고 금융업 등은 도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특히 1962년 만국박람회를 개최한 이후 도시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선진과 첨단을 지향해 나갔다. 이런 요소로 컴퓨터센터 코퍼레이션의 새로운 컴퓨터 임대사업 모델도 곧바로 시애틀에 들어왔다. 오늘날 노트북보다 속도는 3만분의 1에 지나지 않고, 메모리도 1만분의 1에 불과한 컴퓨터 수준이었던 초기부터 시애틀은 미국의 다른 지역에 전혀 뒤지지 않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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