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시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의무가 있다.
최소한의 의무도 다하지 못하는 국가가 시민에게
"당신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 김현진 강원사대부고 교사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인권정책연구소 송년행사에 갈 기회가 생겨 서울까지 갔다가 운이 좋게 보았다. 무미건조한 듯한 영화는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젖어있게 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40여 년 동안 목수로 일하며 성실히 세금도 내고, 병든 아내를 간병했던 긴 시간 덕에 이젠 낮보다 밤이 더 편한 다니엘 블레이크. 심장질환으로 질병급여를 신청하지만 번번이 기각 당한다. 다니엘의 주치의와 관공서 심사관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게 다 매뉴얼 때문이다. 우연히 질병 급여를 신청하러 갔다가 만나게 된 케이티. 그녀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빠가 다른 첫째와 둘째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런던 외곽으로 이사를 와서 힘겹게 살고 있다. 이들의 만남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다니엘의 이웃에는 ‘비주류’들이 산다. 유색인 남성과 백인 빈곤층 남성. 이들은 중국에서 소위 ‘밀수’로 들여온 고급 운동화를 몰래 팔아 일확천금을 노린다. 영화는 다니엘과 케이티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과정을 무심하게 그리지만, 보는 이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질병급여를 신청하려고 콜센터에 전화하면 대기시간이 ‘축구경기’ 시간보다 길다. 그런데 통화가 연결되지 않아도 통화요금이 부과된다. 콜센터는 인도에 있을 것이며, 콜센터 여직원은 영어를 사용하지만, 영국 사람의 영어 발음이 아니다. 평생 연필로 쓰는 것만 알고 살아온 노인 다니엘에게 관공서에서는 실업급여나 질병급여를 ‘인터넷’으로만 신청하라고 알려준다. ‘디지털 시대’라는 명분을 대면서 말이다.

몇날 며칠 끼니조차 잇지 못한 케이티는 ‘식료품 지원소’에서 받은 통조림을 집에 가기도 전에 ‘너무 어지러워서’ 그만 뜯어 먹고 만다. 이때 함께 간 다니엘이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잘 하고 있어. 잘 견뎠잖아.”
‘네 잘못이 아니야’란 말이 이토록 슬픈 말일 줄은 영화를 보기 전엔 몰랐다.

   
▲ 대림대학교 입학처 https://goo.gl/t5iQC2


복지는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
슬픈 장면은 이 밖에도 많았다. 가장 슬펐던 장면은 케이티가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서 마트에서 몰래 훔치다가 발각되어 우는 장면이다. 결국 이 사건은 케이티가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허무는 계기가 된다.

영화를 보고난 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여러 가지 영화의 사건들이 비단 먼 영국만의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벌써 잊은 송파 세 모녀 사건, 그리고 지난 봄 매우 자극적인 기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신발깔창 생리대 사건’, 손발도 못 쓰고 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가 돼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노인장기요양보험 문제 등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우리가 흔히 ‘복지’를 얘기할 때 의무복지냐, 시혜적 복지냐의 프레임에 갇혀 ‘왜 복지가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놓칠 때가 많다. 복지는 왜 필요한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에 의하면, 복지가 필요한 이유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 대등한 조건에서 ‘의사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다. 그 전제조건이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 보장인 것이다.

‘의사소통’은 2차적 문제다. 단순 비교해서, ‘예, 아니요’란 대답밖에 할 줄 모르는 모 그룹 총수와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겨우겨우 삶을 살아내는 노인이 ‘대등한 조건’에서 의사소통할 수 있겠는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복지’라는 것이다.

나는 신자유주의나 이런 것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영국의 경우 대처 수상 이후 사회 곳곳의 시스템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그리고 국가가 왜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켄 로치 감독이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인 듯하다.

국가란 무엇인가?
1997년 12월,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IMF 외환위기가 시작된 그 해 겨울, 가난했던 내게 외환위기는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 있던 영어교육과 친구들이 급거 귀국하는 모습을 보며 ‘아, 이게 이런 식으로 문제가 생기는구나.’라고 외환위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IMF 구제금융 시대의 실상을 제대로 목도한 것은 바로 1998년 교육실습을 나가서였다. 나는 모 여고에서 교육실습을 하게 됐는데, 수학여행이 취소되는 것을 보며 금융위기의 여파를 실감했다. 제주도로 계획했던 모 여고 수학여행은 수학여행 경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이 1/3이 넘는 관계로 결국 취소됐다.

이후 중식지원 및 수업료 지원이란 제도가 생겼고, 구조조정이란 단어를 알게 됐으며, 명퇴라는 단어에 익숙해졌다. 그다지 큰 인기가 없었던 교직이 최고의 인기직종으로 급부상했고, 나는 그 바늘구멍을 통과한 대견한 엄마의 딸이 됐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금융위기가 몰고 온 변화의 아주 일부분이다. 금융위기의 가장 큰 여파는 아마도 ‘가족해체’가 아닐까 한다. 가족해체가 꼭 금융위기만의 탓은 아니겠지만, 금융위기 이후 가장들의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해지면서 가족해체가 급증한 것을 보면 연관성이 큰 듯하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불편한 속담이 있다. 그러나 국가는 시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의무가 있다. 최소한의 의무도 다하지 못하는 국가가 시민에게 “당신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가란 무엇인가? ‘순실의 시대’에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참 우습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던져야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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