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되고 싶었던 절대 군주 루이 14세

   
▲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베르사유 궁전에서 배우는 프랑스의 '그때 그 시절'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 여러분은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에펠탑, 개선문, 노트르담 대 성당 등 여러 유명한 건축물이 떠오를 거예요. 베르사유 궁전 역시 ‘프랑스’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 중 하나죠.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루이 14세가 만든 이 궁전은 프랑스 ‘절대왕정’을 상징한다고도 하는데요. 아름답고 화려한 외관과 달리 많은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았다고 해요. 이 아름다운 궁전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함께 루이 14세가 통치했던 시절의 프랑스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도록 해요!

화려함의 극치, 베르사유 궁전
화려하고 웅장함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대표 건축물 ‘베르사유 궁전’. 이 궁전은 파리에서 약 22km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위치해 있어요. 이 궁전은 근대유럽의 궁전 중 가장 거대한 궁전으로 총 대지 면적이 2,500만 평이고, 가장 큰 건물의 길이는 500미터가 넘습니다.

   
▲ 베르사유 궁전의 조각상

이 궁전에 상주했던 귀족만 해도 5천 여 명이고, 근위병과 하인을 포함하면 총 2만여 명이나 살았다고 해요. 이 어마어마한 크기가 상상이 되나요? 맨 처음 베르사유 궁전은 왕의 사냥용 별장 정도로만 사용됐던 건물이에요. 또 맨 처음에는 이렇게 크고 화려하지도 않았죠.

하지만 한동안 방치돼 있던 이 건물이 루이 14세를 만나면서 궁전으로 탈바꿈했어요. 무려 50년 동안이나 루이 14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궁전은 무려 2만 5천 명에서 3만 6천 명에 달하는 인부들이 매년 동원됐다고 해요.

특히 궁전의 건물보다도 더 넓은 정원이 유명하죠. 당시 유럽의 경제적인 번영을 바탕으로 왕과 귀족들은 화려함과 성대함을 즐겼습니다. ‘사치’를 능력으로 여기던 시절이었죠. 이에 걸맞게 베르사유 궁전도 화려함과 성대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특히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기도 한 베르사유 궁전은 1672년 루이 14세가 수도를 이곳으로 옮긴 뒤,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문화, 사교의 중심으로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신이 되고 싶었던 절대군주
그렇다면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지은 왕은 누구일까요?

바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랜 기간 왕으로 군림했던 ‘루이 14세’입니다. 루이 14세는 겨우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무려 72년이나 유럽을 통치했지요.

   
▲ 루이 14세 [사진 제공=위키디피아]

루이 14세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는데요. 바로 ‘프롱드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당시 30년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는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게 세금을 걷고,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내기도 했죠. 따라서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귀족까지도 이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새벽을 틈타 궁전을 기습해 반란을 일으켰지요.

당시 겨우 14살이던 루이 14세는 그를 도와 섭정을 하고 있던 쥘 마지랭 추기경과 함께 머물던 루브르궁을 빠져나와 생제르망앙레 궁으로 피신했습니다. 반란은 진압됐지만 이때의 기억은 루이 14세에게 ‘더욱 더 강력한 왕’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어요.

따라서 왕권 강화에 집중하던 루이 14세는 자신을 태양의 신 ‘아폴로’와 동일하게 여기기도 했는데요. 이 때문에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내려받는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하며 왕의 지위에 신성함을 더해 감히 그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볼 수 없도록 만들었죠.

‘짐은 곧 국가’라는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루이 14세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절대 군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지기위해 노력했습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것도 바로 이 ‘왕권강화’의 목적이 숨어있어요.

그가 20대 젊은 왕이었던 시절, 수상의 자리를 노리던 당시 재정장관 니콜라 푸케는 왕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루이 14세를 자신의 성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살고 있는 궁전보다 더 화려한 자신의 성과 함께 사치스런 자신의 삶을 과시했지요.

그러자 “감히 누가 왕보다 더 화려한 궁전을 가지고, 이렇게 화려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인가!”며 분노한 루이 14세는 푸케가 국가의 재산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씌워 평생 감옥 신세를 지게 만들고, 푸케의 성을 지은 건축가, 정원가, 화가 등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불러다가 훨씬 더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힘 있는 귀족들을 이 궁전으로 불러다 자신의 곁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향유하게 했는데요. 이 때문에 귀족들은 루이 14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죠.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귀족들의 힘을 점점 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고, 이에 따라 왕의 힘은 강해져 갔습니다. 루이 14세는 이를 통해 귀족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었어요.

아름다움의 이면, 눈물로 지어진 베르사유 궁전

   
▲ 베르사유 궁전 전경

한편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군림하던 시절동안 백성들은 끊이지 않는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로 인한 고된 노동에 시달렸어요. 루이 14세는 영토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런 전쟁이 재위기간 72년 중 무려 31년이나 된다고 해요. 하지만 무리한 침략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는 결국 영토가 반으로 줄어들었고, 잦은 전쟁으로 나라에는 빚만 쌓여갔습니다.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부담으로 돌아왔고, 결국 프랑스의 모든 도시는 거지가 들끓고 굶어죽은 시체들로 넘쳐났어요.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퍼지면서 많은 민중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죠. 베르사유 궁전의 아름다움 뒤에도 프랑스 국민들의 피와 눈물이 숨어있습니다.

프랑스의 백성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위한 부역에 동원됐지만 그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어요. 오히려 사고로 죽은 백성들은 보상과 사과는커녕 그 시신을 암매장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이런 백성들의 민심을 돌보려 하지 않고 자신의 궁전에서 여전히 귀족들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외면했지요.

하지만 죽음이 가까워진 때가 되자 루이 14세는 그동안 자신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정치를 하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한편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슬픈 기색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의 기쁨에 크게 환호했다고 합니다.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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