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팝스타 아델이 노래할 수 있던 이유

   
▲ 19살의 아델 애드킨스. 앳되고 청순한 그녀에게서 울려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의 호소력을 담은 목소리는 곧 세계의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키기 시작한다. [사진 출처=bbc.com]

1988년 런던 북부 토튼햄에서 18살 소녀가 미혼모로 딸 하나를 낳았다. 예술학교에 다니던 페니 애드킨스가 북런던의 한 맥주집에서 20대 중반의 마크 에반스를 만나 짧은 사랑 끝에 임신을 한 것이다. 아기는 1988년 5월 5일 어린이날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책임을 맡아야 할 에반스는 아기가 두 살 때 자신의 고향인 웨일즈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그 곳에서 배관공으로 살아가다가 나중에 알코올중독자가 됐다. 그래서 소녀의 이름은 외할아버지의 성 에드킨스를 따서 아델 에드킨스가 됐다.

미혼모의 딸이었던 소녀 아델, 천부적인 노래실력을 타고나다!
10대의 엄마는 아기를 억척같이 키웠다. 그녀는 ‘예술’ 대신 마사지사 일도 하고, 가구제작도 하고, 사무실 일도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을 넉넉하게 밀어줄 수는 없었다. 딸의 기억으로는 어렸을 때의 생활은 어둡고 칙칙했다. 그들이 자리 잡은 런던 외곽 지역은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다양한 노동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과 에너지가 이 가난한 도시의 밑바닥에서 자라나고 있었지만,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어린 소녀는 아직 그 가능성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 내 것으로 만들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놀랍도록 천부적인 목소리를 타고 태어났다. 그렇기는 했어도 소녀는 가정형편 때문에 공립학교를 다니며 여전히 문법 같은 것과 씨름해야 했다. ‘영혼이 없는’ 학교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동네 중고음반가게에서 5파운드를 주고 산 에타 제임스라든가 엘라 피츠제럴드의 음반을 들으며 음악을 향한 꿈을 이어나갔다.

   
▲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입학처 http://goo.gl/FZ1vLX

영국 브릿스쿨의 예술 영재교육으로 ‘폭풍성장’하는 아델
14살 때 그녀가 브릿스쿨에 지원해 입학을 허가받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이 열린다. 영국음반산업협회가 운영하는 이 학교의 학비는 무료였다. 영어문화권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영국의 음반산업계가 사회공헌 겸 미래의 대중음악 영재들을 키우기 위해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학교다. 소녀는 이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쇼’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비즈니스’까지 가르쳤다. 15살도 안 된 학생들은 서로를 ‘아티스트’라고 부르곤 했다.

꿈을 향해 주저 없이 나아가던 아델, 자작곡으로 열아홉에 데뷔하다!
소녀는 여전히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갔다. 소녀 아델은 뒤늦게 생부 마크 스펜스가 사준 기타로 기타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따금 끄적이며 작곡도 했다. 기타를 배운지 18개월 만에 아델은 자기가 작곡한 곡 3개를 스스로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로 불렀다. 그녀의 친구가 이 장면을 녹화해 브릿스쿨의 재학생 작품을 온라인으로 싣는 마이스페이스에 2006년 데모작품으로 띄웠다.

그러던 중 힙합음악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음반제작업체인 엑스엘(XL)의 한 음반제작PD가 이 데모작품을 보고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능력 있는 신진 매니저 조나단 디킨스에게 보고했다. 디킨스는 3곡 가운데 하나인 ‘홈타운 글로리’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바로 아델을 오라고 불렀다. 아델은 당시 이런 회사 이름을 알지 못했기에 긴가민가 하는 마음에 친구와 같이 갔다. 디킨스는 아델의 자작곡 3곡에 밥 딜런의 노래 하나를 더 불러 곡을 늘리자고 했다. 아델의 졸업 뒤 XL과의 정식계약은 체결되고 2008년 1월 첫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 아델의 첫 번째 앨범 '19' [사진 출처=alamy.com]

혜성처럼 등장한 아델의 앨범, ‘히트다 히트!’
<19>, 아델의 앨범작업 나이를 따 이렇게 이름 붙인 데뷔앨범은 소위 말해 대히트를 쳤다. 나오자마자 영국 음반판매 1위를 기록하고 그해 여름 미국회사 콜롬비아와 계약을 체결하자 미국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아델의 표현으로는 “내 가슴에 가득한 남자 친구를 향한 마음을 내가 사랑하는 다양한 음악을 빌어 표출한 것을 레코딩 했을 뿐”인데, 제임스 워즈워드의 시처럼 “자고 나니 유명해져” 버린 것이다. <빌보드>는 “아델은 정말로 그녀 세대에게 가장 훌륭하고 영감을 주는 국제적인 아티스트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아델은 미국 진출 뒤 2008년 미국 투어 일정을 갑자기 취소하면서 한때 미국 시장에서 인기가 떨어지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해 10월 미국의 인기 TV 프로그램인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해 매우 솔직하게 자기를 표현하며 시청자에게 다가가고, 그 심야의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노래 2곡을 열창하면서 압도적인 인기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1,700만 명이 시청한 이 심야 프로그램 이후 <19>는 곧바로 아이튠즈의 인기차트 1위로 치솟아 올라갔다. 결국 그녀의 데뷔 앨범 <19>는 미국에서 200만 장 이상 팔리며 더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세계적으로는 600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 <엄마 잔소리 필요 없는 공신 학습법>
https://goo.gl/xwVvBm

아델, 앨범 판매로 신기록 세우다!
2011년 나온 아델의 두 번째 앨범 <21> 역시 영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대히트를 이어갔다. 클래식과 컨템포러리 루츠 그리고 컨트리 음악 장르까지 망라한 다이내믹한 이 음반은 미국에서만 첫째 주에 35만 2,000장을 팔아 빌보드 200에 1위로 데뷔하는 것을 시작으로 영국 등 다른 18개 국가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결국 <21>은 2011년 한해에만 1,500만 장을 팔아 그해 가장 많이 판 앨범이 됐다. .

이런 기록적인 판매고에 걸맞게 <21>은 2012년 그래미상에서 히트곡 ‘롤링 인 더 딥’(Rolling in the Deep)으로 올해의 노래상을 받는 등 후보에 오른 6개 부분에서 모두 수상했다. 이것은 2년 전 미국의 팝스타 비욘세가 세운 6관왕과 타이를 기록하는 성과이다. 전 세계를 겨냥한 월드 투어도 일찍이 없던 대성공을 거두며 이어졌다.

   
▲ 2016년 벨기에 앤트워프 공연 [사진 출처=adele.com]

2015년 발매된 아델의 세 번째 앨범 <25>도 역시 대성공을 거뒀다. 이 앨범의 리드 싱글 ‘헬로’(Hello)의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 공개된 지 24시간 만에 2,770만건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며칠 뒤에는 시간당 평균 10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영국을 비롯해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 독일 등에서 1위에 오르고 미국에서도 첫 주 100건을 판 첫 노래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어서 곧바로 빌보드 100의 1위로 등극했다.

이 앨범의 성공은 그래미상으로도 그대로 이어져 2017년 초 그래미상에서 후보로 오른 5개 부문에서 수상해 5관왕에 올랐다. 그녀의 라이벌 격으로 역시 그래미상 각 부분에서 치열하게 경합한 비욘세를 압도하는 성과였다.

아델의 성공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델의 성과는 “비틀즈 이후 영국음악의 첫 번째 미국 점령”이라고 표현됐다. 특히 그녀의 성공은 디지털음악기기의 범람 속에서 앨범 등의 판매가 이전보다 절반 이하로 격감한 속에서 이뤄졌다는 점, 진정한 음악은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호응하도록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아델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성공요인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듯한 그래서 쉽사리 몰입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천부적인 목소리

2.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탁월한 작곡능력

3. 어느 상황에서나 솔직하게 표현하고 남을 배려하는 능력

4. 춤이나 율동, 백댄스를 배제하고 오로지 가수와 가수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도록 이끄는 고도의 몰입이벤트 기법

5. 어려움을 극복하는 용기와 의지

 여기서 4, 5번째 요인은 한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델은 자기의 음악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나는 눈으로 보는 음악이 아니라, 귀로 듣는 음악을 만든다.”

요즘 TV나 인터넷 스마트폰 등 스마트기기에 넘치고 넘치는 대중음악은 대부분 보는 음악을 강조하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음악 본연의 기능과 효험에 보다 집중하는 절제된 미학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이런 방식이 아델의 3번째 성공요인인 솔직함에서 우러나는 호소력과 결합해 놀라운 음악제일주의의 성공이라는 화학적 변화를 이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과감한 결단으로 극복해내는 아델
어려움을 극복하는 아델의 용기와 의지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녀가 줄곧 성공가도만을 달려온 것은 아니다. 세계 정상급의 싱어 겸 싱어송 라이터로서 아델은 두 차례 자신의 가수 생명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병과 맞닥뜨려야 했다. 2011년 여름 두 번째 앨범을 내고 미국 투어로 인기를 몰아가던 아델에게 후두염이 발병했다. 이 고비에서 아델은 과감하게 투어를 모두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자칫 무리하다가는 가수의 생명인 목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2017년 영국 웸블리구장 공연 [사진 출처=adele.com]

그 뒤 후두염을 가라앉힌 뒤 건강을 회복한 아델은 그 해 가을 투어를 속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예상치도 못했던 성대에 이상이 생겼다. 위기였다. “노래는 나의 취미이자, 나의 사랑, 나의 자유이자 지금은 나의 일 그 자체인데….” 그러나 그녀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다. 또 다시 모든 투어 일정을 취소하고 그해 11월 성대 수술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아델은 또 한 차례 앨범 판매와 음악상 수상에서 밀려날 수 있었지만, 목소리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불이익을 감수했다. 진정한 용기를 선택한 것이다.

현재 아델의 공식 트위터 팔로우 수는 세계적으로 약 2,888만 명이다. 그의 노래와 그의 인생에 사랑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이들과 소통하면서 아델은 사회와 공동체에 대해 끊임없이 발언하고 호소한다.

“그렌펠탑 참사의 희생자 유족과 부상자들이 수상에게 조사위원회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하는 청원에 서명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여기 동참해 주세요!”

“해마다 150만 명의 어린이들이 물 때문에 죽어갑니다. 물의 위기를 끝내려는 #W4Water를 도와주세요!” “세계야생기금의 활동을 여러분의 앱으로 도와주세요.”

자칫 소외되기 쉬운 인재들의 숨겨진 재능을 발굴해 성공으로 이끄는 영국교육의 강점은 뉴턴에 이어 아델에게서도 증명되고 있다.



*에듀진 기사 원문: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029

   
▲ <나침반36.5도> 정기구독 http://goo.gl/bdBmX

 

 

저작권자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