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차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의사 과학으로 포장된 인종 차별의 논리
-분리되었지만 평등하다?

*사진 출처=클립아트코리아 

2019년 1월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찍힌 사진이 SNS에 올라왔다. 그러자 이 사진이 인종 차별을 나타낸다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져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상기시켰다.  

어떤 사진이었을까? 학급에서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는데 문제는 사진 속 학생들의 자리 배치였다. 백인 아이들 20여 명이 교탁 앞에 앉아 있고, 그 뒤쪽으로 흑인 아이들 3~4명이 따로 앉아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 가장 남단에 위치한 국가이다. 과거 유럽 여러 나라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거쳐 간 곳이다 보니, 유럽 여러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서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유럽 백인들이 만든 인종 분리 제도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던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사진을 올린 학교 담임교사는 인종에 따라 학생들의 자리를 달리 배치하는 차별을 했다며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담임교사는 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의 저항으로 흑백 인종 분리 정책이 사라진 지 20여 년이 넘었지만 이런 인종 차별적 양상은 여전하다. 

이곳만이 아니다. 흑인 노예 해방 선언과 흑인 민권 운동으로 제도적인 흑백 차별이 없어진 미국에서도 여전히 흑인, 정확히는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은 노골적이다. 그리고 흑인을 차별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기사는 <나침반> 10월호 '인문 다이제스트'에 6p분량으로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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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차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왜 백인은 흑인을 차별하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언제부터 시작된 일일까? 흑인 노예 무역을 시작한 그 즈음일까? 아니면 더 이른 시기일까?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동 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아서 다수가 이동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각 사회마다 자신들과 다른 곳에 사는 모든이들이 삶의 영역을 침해하는 이방인이었기에, 피부색에 상관없이 이방인은 그 자체로 모두가 적이었다. 종종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자신들보다 낮은 문명에 사는 이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딱히 피부색으로 인종의 위치를 서열화한 경우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와 관련해 세네갈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인 크리스티앙들라캉파뉴(Christian Delacampagne)는 그 근원을 성경에서 찾는다. 그는 『구약성경』의 「창세기」 부분에 등장하는 노아의 세 아들에 주목한다. 「창세기」 9장에 따르면 대홍수 이후에 노아가 거나하게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장면이 나온다. 

노아의 세 아들은 벌거벗고 자는 아버지에게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한다.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이불을 덮어주지만, 막내아들 함은 벗은 몸을 보고 비웃는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함이 자신을 비웃은 것을 알고는 대노한다. 더불어 “함의 자손은 야벳과 셈의 자손들의 종이 될 것이다” 라는 저주를 내린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들 세 형제의 피부색이나 인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기독교가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노아의 세 형제에 피부색을 부여하게 된다. 세 형제의 지리적 이동 계보를 보고 세 형제를 인종적 측면으로 구분한 것이다. 즉, 야벳은 유럽으로 가서 백인, 셈은 아시아로 가서 황인, 그리고 함은 아프리카로 가서 흑인이 되었다고 본다. 

“함의 자손은 야벳과 셈의 자손들의 종이 될 것이다”라는 「창세기」의 내용은 세형제에게 인종을 부여한 유럽인들에게 의해서 “흑인은 백인의 종이 될 것이다”로 새롭게 해석된다. 이 해석에 따라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은 거룩한 종교적 논리로 공고해지고, 종교 교리를 따르는 것이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진리로 고착되어 갔다. 

중세 이후 유럽의 기독교 미술에서 신과 연관된 상징물들은 대부분 흰색으로 그렸는데, 이 또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 논리를 공고하게 하는 근거로 작동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성령을 나타내는 흰 비둘기, 천사의 하얀 날개, 예수를 상징하는 어린양, 마리아의 하얀 수건 등과 같이 거룩한 것은 모두 흰색이다. 반면 흰색과 대조를 이루는 검은색에는 악마와 저주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신화적 신념이 백인이 흑인에게 가한 차별에 영향을 주었을 혐의는 있지만 명확한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실제로 유럽인이 가한 흑인 인종 차별은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근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이 신화적 측면을 뛰어 넘어 ‘의사 과학’이라는 이름을 달면서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의사 과학으로 포장된 인종 차별의 논리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1953년에 DNA 구조를 발견한 미국의 생물학자이다. 그는 이 공로로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학자로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 총장직도 역임했다. 그런데 2007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진화의 역사에서 서로 다른 인종이 동일한 지능을 가지리라고 믿는 것은 희망일 뿐이다. 흑인 직원들을 고용해 본 사람들은 이 말뜻을 다 알 것이다”라는 인종 차별 발언으로 자신의 여러 직위를 박탈당한다. 

▲인종 차별 발언을 직위 박탈당한 미국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 [사진출처=wikipedia] 
▲인종 차별 발언을 직위 박탈당한 미국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 [사진출처=wikipedia] 

왓슨이 저명한 유전학자였기에 ‘흑인이 열등하다’는 그의 발언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전공은 유전자 구조와 유전자 정보 전달에 관한 것이지, 인종 간 유전자의 우월성과 열등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런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왓슨의 인종 차별 발언은 그가 연구한 과학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편견이 가득한 한 개인의 헛소리일 뿐이었다.

문제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과학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정확한 실험이나 관찰과 같은 경험적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즉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 논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비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는데도 과학의 이름을 다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의사 과학(유사 과학 또는 사이비 과학, pseudo-science)이다. 의사 과학을 자세히 보면 논리적으로 관찰한 결과를 제시하는 것 같지만, 비논리적인 방법을 적용하거나 논리가 왜곡되어 있다. 

의사 과학으로 포장된 인종 이론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흑인종은 백인과 원숭이의 교배로 태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흑인을 원숭이와 유사한 종으로 보는 사례이다. 이는 18~19세기 당시 초기 생물학에서 식물과 동물을 분류하던 방법을 인간종 분류에 적용하여 내세운 의사 과학의 결과물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오로지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당시 사람들의 편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나오면서 인간 종을 우월하고 열등한 정도에 따라 분류하는 논의가 나왔는데, 바로 프랑스의 외교관인 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가 저술한 『인종 불평등론』이다. 이 책에서 고비노는 “가장 우수한 인종은 백인종인 코카서스 인종이고, 이들이 세계 문명의 발전을 이끌고 있는데, 열등한 유색 인종과의 혼혈로 우월한 인종의 피가 손상되어 인류 전체가 쇠퇴할 것”이라는 비논리적인 주장을 하였다. 특히 백인 중에서도 게르만이 속한 아리아인이 켈트인이나 슬라브족보다 더 우월하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후에 독일의 나치 히틀러가 악용한다. 

분리되었지만 평등하다?
흑인 노예 무역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물라토’와 같이 혼혈 결혼으로 태어난 자손에게 차별적 용어를 붙였다. 그럼에도 이 당시에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을 많이 했다. 그 결과 피부색이 다양한 혼혈 자녀들이 태어났다. 

반면에 북아메리카, 특히 미국에서는 혼혈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1660년대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서는 인종 간 결혼 금지법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 선언 이후 1865년에 「수정헌법」 제13조가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흑인노예 제도는 폐지된다.

그러나 흑인들이 많이 살았던 미국 남부의 11개 주에서는 백인의 지배를 강화하고자 공공장소에서 유색 인종과 백인의 분리를 인정하는 「짐 크로 법(Jim Crow Law)」을 통과시킨다. 인종 차별적인 이 법은 1896년 “분리되었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라고 주장하며 연방법원에서 합헌 판결을 받는다. 

이 법에 따라 식당, 호텔, 병원, 학교, 화장실, 극장,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분리되었다. 식당 창에 “개와 흑인은 들어올 수 없다”라고 버젓이 써붙이기도 했다. 노예제를 폐지하기는 했지만 흑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생활을 지속했던 것이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Parks)는 법에 정해진 대로 백인에게 버스 좌석을 내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다. 그러자 흑인들은 버스 승차 거부 운동 등 다양한 저항 운동을 시작한다. 이것이 흑인 인권 운동으로 확대되면서 결국 짐 크로 법은 폐지된다. 그리고 1964년에 인종, 민족, 출신 국가, 여성을 대상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연방법을 만들게 된다.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법은 또 있었다. 2016년에 개봉한 <러빙>은 「인종순결법(Racial Integrity Law)」에 대한 위헌 판결(1967년 6월 12일)을 다룬 영화이다. 백인과 흑인의 피가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백인과 유색인종 간 결혼을 금지한 「인종 순결법」이 남아 있던 1958년 버지니아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 '러빙' 포스터 [사진 출처=wikipedia] 
▲영화 '러빙' 포스터 [사진 출처=wikipedia] 

백인인 리처드 러빙은 미국의 수도였던 워싱턴 D.C.에서 고향 친구였던 흑인 여성 밀드레드와 결혼한다. 그리고 아내가 임신을 하자 이들은 함께 고향인 버지니아주로 돌아온다. 고향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웃의 제보로 이들 부부는 「인종순결법」을 어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다. 

1심에서 실형을 받은 부부는 항소를 했지만, 버지니아주를 떠나 25년간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풀려난다. 이때 재판부는 “전지전능한 신은 백인과 흑인, 황인, 말레이인, 홍인을 창조하고 각기 다른 대륙에 배치했다. 신이 인종을 분리한 것은 인종을 섞을 의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판결문에 밝혔다. 이 재판부의 주장을 생각해 보면, 노아의 세 아들에게 피부색을 덧입힌 유럽인들의 미신이 매우 오랫동안 지속된 셈이다. 

워싱턴 D.C.로 돌아온 이들 부부는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연방대법원에 해당 법률이 위헌이라며 소송을 한다. 결국 소송에서 이겨 「인종순결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낸다. 

이후 인종 차별과 관련한 다양한 법들이 미국에서 대부분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백인이 아닌 유색 인종에 대한 혐오 표현은 불쑥불쑥 나온다. 

*자료 제공=해냄출판사

*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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