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 최초의 ‘필리핀 통역사’ 

21세기인 지금은 해외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외국어 공부를 할 환경도 잘 마련돼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19세기 조선 시대에는 외국인을 만날 기회도 흔치 않고, 특히 평민은 문자를 익힐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 흑산도에서 홍어를 팔던 상인 문순득은 조선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가 돼서 높은 벼슬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문순득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조선 생선장수 문순득, 눈 떠보니 ‘일본?’ 

▲ 문순득 초상화 [출처=mof.go.kr] 

문순득은 조선 후기 전라남도 신안군 근처에서 홍어를 팔던 상인이었어요. 그러던 1801년 12월의 어느 날, 그는 동료들과 전라남도 신안군 근처에서 배를 타고 흑산도에 홍어를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거센 파도가 잠잠해지고, 주위를 둘러본 문순득은 크게 놀랐어요. 배가 도착한 곳은 조선이 아닌 현재 일본에서 오키나와라고 불리는 ‘유구국(琉球國)’이었던 거예요.  

어쩌다 보니 문순득은 그곳에서 8개월간 머물게 됐어요. 다행히 그와 동료들은 유구국에 머무는 동안 좋은 대접을 받았어요. 문순득은 유구국 언어 유구어를 열심히 배웠고, 현지인과 대화해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냅니다. 사실, 당시에 유구국은 조선과 표류민을 본국으로 송환해주는 조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즉, 그가 유구어를 열심히 배우지 않아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와 별개로 문순득은 원래 외국어에 호기심이 많고 사람과 소통하는 일을 좋아해서 유구어를 열심히 배웠다고 해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필리핀’으로 또 표류! 

문순득과 동료들이 유구국에서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중국을 거쳐야 했어요.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요?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탄 그들은 또 다시 풍랑을 만나 표류합니다. 이번에는 유구국보다 더 남쪽으로 떠밀려가 당시 스페인 지배를 받고 있던 필리핀의 루손 섬 ‘여송(呂宋, Luzon)’에 표착하게 돼요.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일행들은 흩어지게 되고, 문순득은 여송에서 9개월 동안 지내게 됩니다.

이곳에서도 문순득은 필리핀 언어인 여송어를 열심히 배워요. 언어 능력을 키운 그는 끈을 꼬아 파는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관광도 하고, 성당도 다니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며 지냈어요. 또한, 그곳에 전해진 다른 서양 국가의 문물도 경험했다고 해요. 

이후 그는 마카오, 광둥, 난징, 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 약 4년 만에 그리운 고향 신안군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조선판 하멜표류기 ‘표해시말’ 탄생! 
문순득이 고향으로 돌아왔던 시기, 마침 신안군 근처 흑산도에는 실학자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유배를 내려와 있었어요. 그는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렸다가 우연히 정약전을 만나게 되고, 풍랑을 만나 유구국과 여송에서 표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죠. 

▲문순득 표해시말 사진 [출처=jeolla.com]

정약전은 문순득의 경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해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마치 네덜란드인의 조선 표류 스토리 '하멜표류기'처럼요. 이 책에는 문순득의 표류일정과 함께 유구, 여송, 마카오의 풍속·언어·의복·선박·토산품·기후 등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어요. 특히 책 끝에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이를 일본어 81개와 필리핀어 54개로 바꿔 적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언어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고 해요.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자(字)를 지어줍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은 조선 땅에서 네가 처음’이라는 뜻이에요. 정약전이 문순득의 경험을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정약전은 문순득의 여행기를 편지에 담아 동생 정약용에게 보냅니다. 편지를 받은 정약용은 여송에서 쓰는 화폐가 얼마나 유용한지 알게 됐고, 조선의 화폐 개혁을 제안하게 돼요. 또한 당시 정약용도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요. 제자였던 이강희를 문순득과 만나게 해, 서양의 선박과 항해에 관련된 책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쓰게 돼요. 문순득의 영향이 엄청났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죠? 

19세기 조선 최초의 ‘필리핀 통역사’ 

한편, 문순득이 유구국에 떠내려갔던 1801년,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에 표류해 있었어요. 국적불명의 사람들과 조선인들이 말이 통할 리가 없었죠.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 길이 없자, 조정에서는 그들이 청나라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쪽으로 보내버렸어요. 하지만 청나라에서도 자국 사람이 아니라며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그들은 꼼짝 없이 9년 동안 제주도에 머물게 됐어요. 

그런데 그 즈음, 외국에 표류했다 4년만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문순득의 기록이 조정으로 전해집니다. 기록에는 여송에서 쓰는 말이나 사람들 외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데, 그 설명은 제주도에 표류한 외국인들과 비슷했어요. 1809년,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문순득은 국적불명의 외국인들을 만나러 제주도로 내려가요. 그리고 그들이 여송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그가 여송어로 훌륭하게 통역한 덕분에 마침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문순득은 이 공을 인정받아 조선 시대 고위직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로 기록을 남기게 됐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다!” 전화위복의 아이콘 문순득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문순득의 일화를 살펴보니 어떤가요?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조선 시대에 평민들은 문자를 익힐 기회도 없었고, 외국인들을 자주 만날 수도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다른 나라에 뚝 떨어지면 두려울 법하죠. 

하지만 문순득은 겁먹지 않고 그 나라 말을 공부하고 사람들과 소통했어요. 그곳에서 신세한탄을 하며 허송세월하지 않고, 일도 하고 관광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지요. 게다가 고향에 돌아와 통역으로 벼슬까지 받다니!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도 앞으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무작정 겁부터 먹기보다 어떻게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 보면 어떨까요? 

-이 기사는 <톡톡> 2020년 12월호 '똑똑 라이브러리-인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놀기만 좋아하는 우리 아이, '책'과 놀게 할 수는 없을까? 재밌는 잡지를 읽었더니 두꺼운 책도 술술 읽혀요! 독서능력이 쑥쑥! 다양한 분야에 걸친 흥미로운 기사로 아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톡톡으로 내 안에 숨은 잠재력을 깨워보세요. 

■ <톡톡> 2020년 12월호 해당 페이지 안내 

*에듀진 기사 URL: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249 
기사 이동 시 본 기사 URL을 반드시 기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재력 깨우는 청소년 매거진 월간 '톡톡' 구독 신청 클릭!
잠재력 깨우는 청소년 매거진 월간 '톡톡' 구독 신청 클릭!

 

저작권자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