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 신라, 고려 지역명이 존재하는 이유

고조선, 삼국, 고려 등 우리 조상들이 살았다는 중국 동부에는 우리 선조의 유적·
유물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까?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낸 후, 새로운 사상으로 중공을 무장해야 하고 예전의 구태를 벗겠다며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0년간 문화 대혁명을 실행했다. 이전의 유적, 유물 등은 모두 가차 없이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많이 거주한 중국 동부는 특히 피해가 심했다. 동시에 공산당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을 숙청했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법하지만 그래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삼국과 고려의 유물, 유적을 소개한다.

1. 북경에 있는 고려영진(高麗營鎭)
현재 북경에는 고구려, 고려의 군사기지인 고려영진(高麗營鎭)이라는 넓은 구역이 남아 있다. 영진은 군사를 주둔한 곳을 말한다. 이곳이 적대국의 땅이었다면 불가능한 지역명이다. 당연히 우리의 영토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와 고려의 주요 지역 중에 하나였는지에 대한 다각적인 검증이 필요하다.

2. 산동반도에 있는 장보고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칭다오맥주로 유명한 청도는 한반도 서쪽과 가까운 산동반도에 있다. 이곳에 신라 말기 장보고가 매입하여 지었다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존재한다. 이곳은 지금도 청해와 발음이 비슷한 정해(靜海)의 군사기지(衛)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장보고가 땅을 매입하고 1만명의 군사를 주둔할 수 있었던 크기이다. 역사적으로 소국이 대국의 땅에 군사를 계속 주둔할 수는 없다. 이곳이 신라의 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연히 교차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3. 항저우에 있는 고려 혜인사(慧因寺)

이 근처는 예전부터 강도(江都)라 불렀고 지금은 양주(揚州)와 가깝다. 양주는 고려시대 수도 남경(고려의 남쪽 수도)이라 고려해 볼수도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고). 양자강 근처의 항저우는 고대로부터 비단으로 유명한 곳이다. 항저우에는 혜인사 외에도 고려시대 무역관이 있었고, 고려시대의 난파선이 발견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난파선은 산동반도, 양자강, 서해 태안 앞바다에서 골고루 발견됐다. 고려시대는 송나라와 무역을 활발히 했다고 기술되고 있는데 현재 한반도에는 송나라의 유적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송나라의 유적유물은 한반도에 없지만, 양자강 근처에는 고려의 유적유물이 존재한다.

무역을 활발히 했다는 것은 당시 영토와 직접적인 관련이 깊기 때문에 고려의 남쪽 수도는 남경, 즉 양주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려는 한반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자강 근처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의심하며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역사대로 해석하여 답습한다면 우리 역사는 미래에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다.

4. 구화산(九華山)과 신라 김교각 스님

이곳은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을 모시는 곳이며, 당시 유물과 기록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양자강 주변은 팔공산, 함산, 진해, 황룡 등 삼국사기 신라의 지명들이 가득 있는 곳이다. 아마도 이곳이 신라의 중심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동안 우리가 배운 역사가 실증 없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상상 속의 날개로 만들어진 산물인지 안타깝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이러한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고 연구한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다.

5. 중국 전주(全州)백제향(百濟鄕)
중국의 전주는 한반도 전주와 동일한 지역명이다. 그 세부 지역명이 방위각까지 똑같은데, 엄마, 아빠 등 기초 언어 및 문화풍습도 거의 동일해서 놀라움을 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 전주의 금산사(金山寺)가 더 오래되었다는 비문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전주에서 강을 타고 내려가면 백제향이라고 백제마을이 나타나는데, 그 곳의 주민들은 본인들이 산동반도에서 왔다고 증언을 하고 있다. 한국의 전주보다 더 오래된 백제로 증명이 된 곳이다. 이에 중국 동부가 백제의 본토가 아닌지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나오는 삼국시대의 유적유물은 그 긴 역사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물량이라는 것만 보아도 아직 우리 지역명과 유물, 유적이 존속되고 있는 중국의 동부 지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6. 고구려말 연개소문의 추격지, 강소성 몽롱보탑(朦朧寶塔)

고구려 말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쫓아갔고, 당태종은 가까스로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서 귀국했다. 당태종은 우물에 숨어서 목숨을 건졌고 ‘몽롱~~하다’라는 뜻으로 탑을 세웠다. 그것이 몽롱보탑이다. 중국 현지인들이 주장하는 이 유적과 유물. 과연 고구려의 최대 영토는 어디까지 해석해야 맞을까? 역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7. 김일제 집성촌

양자강 근처 구화산의 북쪽 안후이성에는 김일제의 집성촌이 있다. 투후 김일제로 알려진 김씨의 또 다른 시조이다. 이 근처에는 왜 신라의 지역들과 유물, 유적들이 이리도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곳이 신라의 본토가 아니었는지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8. 신라말기 최치원 사당

신라말기 당나라 황제가 황소의 난으로 중국 사천성으로 도망갔었다. 사실상 당나라는 수도를 뺏기고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황소에게 장황하게 글로 혼내주던 문인이 바로 신라말기의 최치원이다. 위대한 문장가, 혹은 용기있는 문장가로 당나라에서 평가를 내렸었다.

최치원을 기리는 사당이 현재 양자강 양주(楊揚)에 존재한다. 이곳은 신라와 고려의 지명과 유적이 많은 중국의 동부이다.

9. 고려의 강화(江華), 제주(濟州), 오련(五蓮), 견자산(見子山)
고려 고종은 몽고(원나라)의 공격으로 강화로 피난을 간다. 대략 38년간(1232년~1270년) 강화는 고려의 수도가 되었다. 고려 고종의 왕성이 있던 곳은 오련산 부근이다. 그리고 왕자를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 늘 쳐다보며 올라가던 산이 견자산이다.

한반도 강화도에도 이 2개의 산은 모두 존재하지만, 오련산과 견자산은 고려 때부터 등장한 산 이름이다. 그 후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의 제후국이 되면서, 다시 예전 수도인 개경으로 천도를 한다. 이에 40년간 강화에서 토지와 생활권을 가지고 살던 지주들이 수도 이전을 반대해 벌어진 사건이 삼별초의 난이다. 이 삼별초는 후에 제주로 이전에서 항전을 계속한다.

이 제주가 한국의 제주도(濟州島)라면, 강화에서 40년간 태어나고 자라고 살았던 삼별초가 갑자기 떠나 한번도 가본 적 없던 한반도 남부의 섬까지 이동해서 전쟁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연스레 중국 산동반도가 강화이고, 그 위가 현재도 제주(濟州)로 불리는 곳이기에, 가까운 그곳에서 삼별초가 수도이전에 반대하며 고려정부와 항전을 벌일 수 있었던 걸까?

우리는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지명이 있는 지역을 떠올렸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지역은 중국 동부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현재 중국에는 존재하는 지역명들까지 기록 되어 있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추론을 한다면 중국 동부까지 고려의 영토는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현재 한반도에 살고 조선시대 500년을 한반도와 만주 일부에 살았다고 해서 한정된 지역만으로 역사를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그보다 대륙의 중심부를 모두 차지했던 민족이고 그런 나라를 살았던 선조들의 후예로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에듀진 기사 URL :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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