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중심주의 공박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여성예술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등 외형상 매우 남성주의적인 직책을 많이 맡았던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이 한 여성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어진 어머니로는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을 비롯해 정몽주의 어머니,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 같은 많은 분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버이에 효도한 여성을 든다면 신라의 지은을 비롯해 선산의 송씨, 문화의 류씨, 홍원의 현씨 등 고을마다 적지 않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능했던 여성으로는 고구려의 여옥, 신라의 설요, 광해군의 장모 봉원부부인 정씨, 난설헌 허씨, 영향당 한씨, 품일당 전씨, 정일당 강씨, 윤지당 임씨 등 수백을 헤아릴 수 있다. 글씨 잘 쓰는 부인으로는 이제현의 손녀 이씨와 강희안의 딸 강씨, 장홍효의 딸 장씨 같은 이들이, 그림 잘 그리던 화가로는 육오당 정경흠의 누이 정씨와 강희맹의 10대 손자며느리 되는 월성 김씨 같은 이들이…. 그러나 그 모든 여성들은 한두 가지에만 능해 이름을 떨쳤을 뿐이다. 오직 한 사람 그야말로 교육가이자 인격자이면서 효녀, 현부인, 학문가, 시인, 서예가, 화가 등을 한몸에 지닌 종합적인 모범 부인이 바로 사임당 신씨인 것이다.”(신구문화사 발행 <한국의 인간상> 5권)

여러 방면에서 당대 최고의 능력 발휘
 

   
▲ <일러=한겨레21> 신사임당 상상도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사임당은 1504년(연산 10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명화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외조부와 어머니에게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고 효성이 지극했다.

7살 때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리는 등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시문·경전·서예·자수 등에도 탁월했다. 19살 때인 1522년 덕수 이씨 원수와 결혼해 모두 4남3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셋째아들이 율곡 이이다.

신사임당은 48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이자 이른바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그림에 뛰어나 채색화·수묵화 등 약 40점의 작품이 전해져온다. 그의 그림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숙종대왕, 소세양, 송시열, 권상하, 오세창, 이석 등 많은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쓴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숙종 때 사람 송상기는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내게 일가 한 분이 있어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집에 사임당의 풀벌레 그림 한 폭이 있는데, 여름에 마당 가운데로 내다가 볕을 쬐는데 닭이 와서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는 것이다.”

사임당은 글씨 역시 뛰어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시와 문장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사친’(어머니 그리워)이라는 시를 보자.

思親(사친)

千里家山萬里峰 歸心長在夢魂中 (천리가산만리봉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孤輪月 鏡浦臺前一陣風 한송정반고륜월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任西東 사상백구항취산 해문어정임서동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衣膝下縫 하시중답임영로 갱착반의슬하봉)

   
▲ <사진=한겨레21> 신사임당이 그린 <화훼초충도>. 그는 현모양처와 효녀이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뛰어난 예술가였다.

어머니 그리워

산첩첩 내 고향 천리연마는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모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이처럼 신사임당은 여러 방면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후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왜곡하고 부당하게 평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신사임당이기도 하다.

“내가 죽은 뒤 다시 장가들지 마시오”

가장 큰 편견은 그를 전통적인 가치관에 딱 들어맞는 모범적인 여성으로나 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현모+양처+효녀’ 콤플렉스다. 그러나 여러 기록 등을 종합하면 신사임당은 기본적으로 예술가였다는 점이 좀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현재까지 전하는 시 세편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들은 사실 정통적인 유교 가치관에선 빗겨난 것이다. 결혼한 딸은 친정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이른바 ‘출가외인’의 도덕률과 분명히 거리가 있다.

율곡이 <선비행장>에 남긴 글을 보면 더 확실한 그림이 떠오른다.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늘 강릉 친정을 그리며 깊은 밤 사람들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을 지으며 우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어느 때는 밤을 꼬박 새우시기도 했다.”

자기억제를 강요받는 양반집 부인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적 감수성에 충실한 한 인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는가. 더구나 강릉 친정은 그를 예술가로 교육하고 그의 예술활동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후원하는 ‘예술적 고향’이었던 것이다.

신사임당 집안의 여인 3대는 이 강릉집을 생명의 근원처럼 사랑했으며 그렇게 ‘예술가’가 되어갔다.

   
▲ 강릉 오죽헌은 그가 생명의 근원처럼 사랑한 곳이다. <출처=문화재청>

예술에서뿐이랴. 사임당은 학문적으로도 조선의 남성중심주의를 해박하고 탁월한 논법을 동원해 깨부수고 있다. <동계만록>(東溪漫錄)을 통해 전해져오는 신사임당과 그 남편의 대화 한 토막을 보자.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시오. 우리가 7남매나 두었으니까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오.”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이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나타나게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증자의 부친이 찐 베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베를 잘못 쪄서 부모 공양하는 도리에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이오. 그러나 증자도 한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해서 다시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같은 일이 없소?”

“주자가 47살 때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건마는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소.”

이런 일도 있다. 일찍이 남편이 영의정 이기의 문하에 가서 노는 것을 보고 이렇게 권한다.

“저 영의정이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를 탐하니 어찌 오래갈 수가 있겠소. 그가 비록 같은 덕수 이씨 문중이요, 당신에게는 오촌 아저씨가 되지만 옳지 못한 분이니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시오.”

남편이 이 말대로 그 집과 발걸음을 끊은 결과 나중에 정말 아무 화도 입지 않았다. 또한 공부하러 서울길을 떠났다가 세번이나 되돌아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남편을 독려해 결국 학문에 매진토록 만든 이도 바로 신사임당이다.

‘자아실현형 교육’으로 자녀를 이끌다

이런 예술적·학문적 능력으로 사임당은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남성중심주의의 조선사회에서도 특출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사임당 신화’ 가운데 하나인 자녀교육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모두 희생하면서 자녀를 100% 지원하는 ‘자아상실형 교육’을 펴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내는 ‘자아실현형 교육’으로 자녀들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어머니상보다 더 좋은 ‘살아 있는 교육‘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 결과 셋째아들 이이는 성리학의 대가로서, 사상가로서, 정치가로서 성장한다. 나아가 일본 등 외부의 침략을 대비하는 ‘10만 양병론’을 주장하는가 하면, 서자 차별을 철폐하는 제도를 도입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국가 잠재역량을 극대화하자는 탁월한 개혁론도 발의한다.

특히 사임당의 맏딸 매창과 넷째아들 우가 어머니처럼 예술가로 성장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는 거문고·글씨·시·그림에 뛰어났으며, 매창은 시문과 그림에서 빼어난 재주를 보여 ‘작은 사임당’으로 불렸다.

꿈도 재능도 많았던 신사임당은 그렇게 모든 일마다 최선을 다하며 자아를 실현해나갔다. 그런 혼신의 정열을 쏟은 결과 큰 성과를 거뒀지만, 기력을 다한 그는 48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야 했다.

“유교사상의 도가니 속에서도… 오늘의 사임당이 된 것을 생각해볼 때 만일 그녀가 자유로운 현대적 분위기 속에서 생활했다면 틀림없이 절세의 대가가 됐을 것이다.”(노산 이은상)


:: 온 + 오프 항해지도 ::

▶ 중고생
-<역사학자 33인이 추천한 역사인물동화 21 신사임당> 장정예, 파랑새어린이

▶▶ 대학생 이상
-<한국인의 인간상 5 문학예술가편> 신구문화사 ☞ 신사임당(절판 상태라 구하기 어려움. 일부 도서관에만 있음).
 

‘사임당’의 반역음모?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잘 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사임당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이 호에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 부인을 본받으려 ‘사임’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특히 사임당이 태임 부인의 태교를 본받으려 했다고 강조하는 후세의 해석은 넘치고도 넘친다.

“사임당도 7남매를 두었을 때 몸을 매우 조심했다. 어머니의 몸가짐이 발라야 배 안에 든 아이도 바르게 자란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사미(邪味)한 음식은 먹지 않았으며, 좋지 못한 것은 보지 않았다.”

그러나 태임 부인은 ‘역사상 가장 현숙한 부인의 전형’이라는 측면과 함께, 전혀 다른 해석도 가능한 여성이다. 태임 부인은 바로 은나라를 대신할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을 낳은 사람이다.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을 패퇴하여 은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바로 그 손자인 주 무왕이다. 따라서 태임 부인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토대를 쌓은 인물을 낳은 셈이다. <사략> 등 역사서도 두루 독파한 신사임당이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사임당이 이런 호를 지은 게 연산군 때(실제로는 연산군 다음인 중종 16년 무렵)였다면 반역음모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중종이 바로 주나라와 비슷한 방식인 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기에 그런 호도 용인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호는 여전히 매우 도전적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태임‘에 관련된 표현은 조선의 왕가에서 쓰는, 매우 엄중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조선 성종이 모후인 인수대비에게 올린 ‘인수대비 가상존호 옥책문’을 보자. “우러러 생각건대 도리로서는 우빈(虞嬪·하나라 우 임금의 부인 도산씨)을 이으셨고, 덕은 문모(文母·문왕의 어머니 태임 부인)에 협화하시여 선성(先聖·성종의 부왕 덕종)의 배필이 되시니….”

사임당은 성종 때의 이 글을 이미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원래 꿈이 매우 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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