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스럽고 찬란한 건축물의 주인공, 그를 둘러싼 수수께끼

“인부들은 여느 때처럼 정글 속의 석벽 앞에 몰려들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이 든 우두머리 석공들은 그늘에 앉아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작업장으로 건너와 진행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부터 한 도제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죽었대요! 그가 죽었대요!’

도제 아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치는 소리가 정글을 뚫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인부들은 일순간 모두 돌을 쪼던 손길을 멈췄다. 작업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정과 망치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웨덴 작가 얀 뮈르달)

캄보디아의 광개토대왕!

높이 8m에 이르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한 변이 3km인 정사각형 모양에 그 주위를 다시 폭 113m인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고 있는 도시…

5개의 성문 위에는 각각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관세음보살상인 사면불안(四面佛顔)이 23m 높이까지 올려져 있고… 전성기에는 주민 10만명이 지냈다고 할 정도로 융성했던 도시…

그 도시가 이처럼 한순간에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돼버린다. 그리곤 400여년이 흐른다.

그러나 도시는 죽지 않고 살아나 다시 세상에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치즈나무라고 불리는 거대한 열대수가 불상을 휘감아 숨통을 조이고, 무화과나무의 뿌리가 석상의 얼굴을 파고들어 동강내는 지경인데도… 죽지 않았다.

열대밀림 속의 석조도시와 거대사원들은 거의 1천년 동안 베트남인·타이인·버마인·영국인·프랑스인·일본인 등 이름을 바꿔가며 찾아오는 약탈자들이 석상의 발목을 자르고 손을 부러뜨리고 목까지 잘라내는 것도 모두 이겨냈다. 론놀-폴포트-헹삼린 등 현대 캄보디아의 역사를 장식한 무장세력이 서로 순서를 바꿔가며 심어놓은 지뢰에 부서지고 난사하는 총탄에 신음하면서도 끝내 살아남았다.

19세기 말엽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를 유혹해 과로사로 이끌고, 20세기 말엽 한 벨기에 할머니를 아름다움에 취해 쇼크사로 이끈 이 신비의 정글도시…. 앙코르를 세운 사람들은 누구일까?

자야와르만 7세(Jayavarman VII·‘자야바르만’이 아닌 ‘자야와르만’이 실제 발음에 더 가깝다). 그는 앙코르톰의 창건자이다. 우리에겐 앙코르와트가 익숙한 이름이지만 실제로 앙코르와트는 거대한 앙코르 유적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1234’로 등록된 것도 ‘앙코르의 유적군’ 전체이다.

어쨌든 앙코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시작연도인 889년부터 샴족에게 점령돼 약탈된 1431년까지 약 540년 동안 지속적으로 건설됐고, 그 가운데 건축이나 정치군사 면에서 가장 융성한 시기가 바로 자야와르만 7세 때라고 할 수 있다.

자야와르만 7세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왕조를 통치할 때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그는 동으로 베트남 중부의 참파 왕국을 정복해 바닷길을 열어놓고 중국과 조공무역까지 실시했다.

북쪽으로는 라오스의 브양트얀과 버마,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 북단에 이르기까지 인도차이나 최대의 국가를 건설했다. 이런 위업을 보면 자야와르만 7세는 캄보디아의 광개토대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신비에 싸여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업적을 기술하고 추적하는 것도 그가 남긴 유적의 기록문을 통해서 간신히 재구성하는 정도이다. 오히려 그의 유적은 찬란하게 재확인되는데도 그의 후기통치 기록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이 수수께끼와도 같은 정황 때문에 얀 뮈르달은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

일단 유적의 기록문 등을 바탕으로 그의 생을 재구성해보자.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거의 800여년 동안 이어져오는 수수께끼들을 추적해보자.

   
▲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자야와르만 7세 때의 건축물인 바욘사원의 대형 사면불안상. <제공=한겨레21>

정치종교적 토목사업에 정열을 쏟다

“자야와르만 7세는 1120년 앙코르 왕조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는 매우 신앙심이 깊고 의지가 굳은 자야라자데비라는 이름의 공주와 결혼했다. 자야와르만은 30대 후반에서부터 40대 전반까지 현재의 중부 베트남에 해당하는 참파 왕국에 머물고 있었다.

아버지인 다라닌드라와르만 2세(재위 1150~60년)가 죽었을 때 그는 참파에서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형제(또는 사촌형제)인 야소와르만 2세(재위 1160~66년)가 즉위하자 그는 그대로 참파에 머물렀다.

1166년 궁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캄보디아로 돌아왔으나, 이미 왕을 살해하고 반란을 주도한 트리부와나디타와르만(재위 1166~77년)이 즉위한 뒤였다. 그는 반란으로 즉위한 왕의 밑에서 지내며 언젠가 왕위 계승 권리를 주장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2년 뒤 참파족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찬탈왕은 이 침공으로 괴멸적인 상황에 빠진다. 수도 앙코르가 정복당해 약탈됐다. 그리고 이민족인 참파의 지배가 시작됐다.

이런 상황에서 50대 후반의 나이가 된 자야와르만은 일어서기 시작했다. 캄보디아에서 참파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 그는 5년 만에 캄보디아를 재통일한다. 이민족을 몰아내고 모든 정치적 라이벌들도 제압한 것이다.

1181년 그가 왕으로 즉위할 때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그 뒤 그는 30여년 동안 캄보디아를 통치하며 왕국을 최대로 넓히는 한편 오늘날까지 인류를 경탄시키는 놀라운 건축물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처음 즉위한 뒤 그는 먼저 정복전쟁에 박차를 가했다. 라이벌인 참파를 공격해 마침내 1203년 앙코르 왕국에 병합시켰다. 이어 주변국가를 공격해 북으로는 라오스의 브양트얀 부근까지, 남으로는 말레이반도의 북단까지 점령했다. 서쪽으로는 메남강 상류지역까지 차지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그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종교적 토목사업에 정열을 쏟기 시작했다. 그의 치하에서 처음으로 도성 앙코르를 석벽으로 둘러싸는 재건축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렇게 세워진 석벽이 오늘날 앙코르톰으로 불리는 장엄한 석벽도시이다.

이 앙코르톰 안에 바욘사원이 세워졌다. 이와 함께 타 프롬, 프레아 칸, 반테아이 크데이, 네아크페안 같은 사원들이 건립됐다. 앙코르톰 바깥에 다시 해자를 건설했으며, 프레아 칸 바라이 등도 건설했다. 이런 건축물은 앙코르 왕조의 최대 걸작으로서 세계사에 그 이름을 빛내고 있다.

왜 그토록 건설사업을 서둘렀을까

이와 함께 그의 치하에서 앙코르와 왕국의 주요 지점을 잇는 도로망을 대대적으로 건설하고, 이 도로를 따라 121개의 숙식시설도 세웠다.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시설도 100여개 지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인물인데도 그는 이상하게도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90살 이상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 그의 즉위연도는 정확하게 나와 있는데 사망연도는 확인되지 않는 것일까? 수수께끼는 그뿐이 아니다. 이상하게 그가 이룩한 대규모 건설사업들은 규모에 비해 대단히 서둘러서 진행됐다는 특성을 지닌다. 도대체 그토록 서둘러야 할, 말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당시 힌두교의 문화적 영향력이 강한 캄보디아에 대승불교를 대대적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사후에 캄보디아는 급속하게 소승불교쪽으로 바뀌어갔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마지막으로 왜 그토록 거대하고 장엄한 시설물들이 그렇게 한순간에 버려져 오랫동안 방치될 수 있었던 것일까?

   
▲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의 <왕도의 길> 표지. 말로는 앙코르 유적을 실제로 밀반출하려다 체포되기도 했다(왼쪽). 캄보디아의 5만리엘 지폐 뒷면을 장식한 앙코르와트. <제공=한겨레21>

그의 사망연도에 대해선 1215년부터 1218년 그리고 1225년까지 많으면 10년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 문제는 어느 면에선 두 번째 의문인 대규모 건설사업을 대단히 서둘러 진행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말년에 홀로 지냈기에 사망연도를 정확히 기록하지 못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부는 그 이유를 그가 나병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병을 앓았기에 격리생활을 했으며, 병을 불교의 힘으로 고치기 위해 대규모 불사 등을 서둘러 진행했다는 주장인 것이다. 실제로 캄보디아 구전설화에는 앙코르에 나병을 앓는 왕이 살고 있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그가 즉위했을 때 이미 61살에 이르고, 그 이전에 참파에 머물고 있을 당시 그곳에 유행하던 대승불교에 심취하면서 즉위 뒤에 펼칠 건설 구상을 이미 완성해놓았기 때문이라고 반론을 펴는 이도 있다. 이와 함께 구전설화에 나오는 ‘나병을 앓는 왕’은 자야와르만 7세 이후의 왕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반론도 있다.

자야와르만의 대승불교에 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가 급속히 소승불교로 전환한 데 대해선 몇 가지 해석이 나온다. 먼저 몽족 언어를 구사하는 타이의 소승불교 전파자들이 궁정에서만 정성을 기울이던 대승불교나 브라만교와 달리 일반 서민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갔다는 점을 든다.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급격한 교세 확장의 근거가 됐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대규모 정복전이나 건설사업에서 볼 수 있는 자야와르만의 과대망상적 기질을 후대 집권자들이 기피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자야와르만 8세는 자야와르만 7세의 대승불교를 거부하면서 그의 대표적인 불교 사원인 바욘사원을 힌두사원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바욘사원에 있는 일부 불상의 자세를 바꾼다든가 얼굴에 수염을 새로 새기는 등의 방식으로 힌두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상처받은 캄보디아의 구심점, 앙코르

앙코르가 한순간에 버려져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된 것과 관련해선 세 가지 정도의 설명이 나온다. 하나는 앙코르 왕국의 집단적인 노동동원 문화가 너무 과도한 부담을 백성에게 지워 민심을 잃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1430년 타이의 샴족에게 앙코르가 함락되고 당시 앙코르식 건설사업을 주도하던 건축가와 하천공사 등을 주관하던 엘리트들이 타이로 끌려가자 앙코르의 퇴조와 방치가 가속화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변화과정이 개인주의 성향의 소승불교 확산과 결합해 훨씬 강력하고 급격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의 시련을 겪은 뒤 앙코르는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오랜 국제전과 내전 그리고 학살과 가난으로 분열되고 상처받은 캄보디아를 통합하는 구심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나아가 대외적으로는 위대한 문명의 발상지로서 수많은 인류의 끊이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고마움에 대한 예의로서 캄보디아는 각종 화폐에 앙코르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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